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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문득 떠오르는 제자가 있다. 퇴임 전 일이다. 무슨 일로 교무실에 들른 녀석이 나를 보더니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아까운 인생을 책만 보다가 허송하실 건가요?"

그 말에 허허 웃고 말았지만, 그날 제자아이가 한 말은 퇴임 후까지도 영향력이 꽤 컸다. 엉뚱하긴 하지만 뭔가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준 것 같아서다. 책을 70쪽까지만 읽고 잠시 덮는 묘한 버릇이 생긴 것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책을 못 읽게 하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 책만 보며 허송세월 보낼 거냐는 식의 귀여운(?) 시비 정도가 아닌, 특정 도서를 읽고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범법자가 되거나 심지어는 불법 구금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고 옥살이를 시키는 국가를 상상할 수 있을까? 문명화된 민주사회에서 그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있다. 놀랍게도, 그리고 부끄럽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언젠가 아버지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생은 이 나라를 위해 한 몸 기꺼이 바친다! 고 생각하고 있다." 정의가 촌스럽지 않은 사회. 부당함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사람 나의 아버지-고새롬
▲ 당신 참 좋은-고호석이 쓰고 고호석을 쓰다  언젠가 아버지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생은 이 나라를 위해 한 몸 기꺼이 바친다! 고 생각하고 있다." 정의가 촌스럽지 않은 사회. 부당함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사람 나의 아버지-고새롬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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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참 좋은>(도서출판 빛누리)에는 '고호석이 쓰고 고호석을 쓰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고호석 선생은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 사건'의 피해자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변론을 맡았고, 이후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됐다.

부산 지역 최대 용공 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은 1981년 공안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도 없이 체포해 수십 일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조작한 사건을 말한다.

'부림 사건'은 정치적 배경 속에서 자행되었지만 법적으로는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국가보안법 7조에 명시된 찬양·고무죄는 국가보안법 가운데에서도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핵심조항으로 손꼽힌다.

찬양·고무의 판단 기준이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법집행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 시대적 변화 등에 따라 해석과 적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가 보안법 7조 폐지 없이 평화통일을 위한 어떤 노력도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 7조 폐지를 주요골자로 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입법 발의된 상태이다. 일이 진척되기까지 산파역을 맡아 디딤돌을 놓았던 박미자 선생도 남북교육자교류 과정에서 교육용으로 구입한 민족의 세시풍속을 담은 책 몇 권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 7조 5항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30년을 일한 학교에서 해직 당하고 연금마저 박탈당했다. 먼 과거의 일이 아닌, 올해 1월에 일어난 일이다.

<당신 참 좋은>은 지난해 11월 25일 암 투병 끝에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한 고호석 선생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책이다. 글쓴이는 고호석과 그 벗들이다. '고호석의 벗들'의 따뜻하고 빛나는 마음들이 모여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1부 '고호석이 쓰다'는 고호석 선생이 생전에 쓴 글을 모은 것이고, 2부 '순간들'은 지역 시민사회 운동을 함께 해온 벗들과 시민들, 그리고 가족들의 사진과 글을 담았다. 3부 '고호석을 쓰다'는 고호석의 벗들이 쓴 글들이다. 한 개인을 추모하는 책이지만 부산 지역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사와 서정이 씨줄과 날줄로 교차하며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감동을 자아내는 이 책을 평소 습관대로 70쪽에서 책을 덮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뒷장을 넘길수록 아픔이 느껴지면서도 가슴 가득 차오르는 숭고한 느낌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끝까지 읽고 나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는데, 책 말미에서 고호석 선생의 벗이자 책임 편집자로 수고한 윤지형 작가가 쓴 글 한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울컥해지고 말았다.
 
"또 다른 가시밭길인 지겨운 재판이 끝나고 징역 6년이 확정되지만 복역 2년 5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김해교도소에서 출소할 때는 1983년 12월, 그는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만신창이가 된 대공분실에서 곧바로 세상에 내팽개쳐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지 않고 감옥에서 2년 넘게 갇혀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던 것 같다'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연옥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뜻이었을까?" - 251쪽
 
고호석 선생은 출소한 지 5년이 지나서야 교단으로 돌아온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한 열매로서 사면 복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항쟁의 날들 속에서 국민운동부산본부 사무국장 겸 상임집행위원으로서 맨 앞에 서 있었다. "한마디로 고호석은 전두환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캄캄하기만 했을 복직의 문을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젖힌 거나 다름이 없었다"라고 윤 작가는 책에서 적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제자 얼굴이 떠올랐다. 70쪽을 막 읽고 난 뒤였는데, 차마 책을 덮을 수가 없어서 다음 페이지를 곁눈질하다가 마침 정의감이 남다른 녀석이 강하게 동의해줄 것 같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눈이 나쁘다'는 말은 옳은 말일까? 왜 눈이 '나쁜가'? 눈이 무슨 못된 짓을 했단 말인가? 그렇잖아도 약한 시력 때문에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이만저만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닌데, 눈이 '나쁘'다니! (중략) 사고력이나 판단력이 부족한 경우에도 '머리가 나쁘다'고들 하는데 이 또한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 71쪽
 
고호석 선생은 시력이 매우 약했다.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도 칠판에 적힌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그 덕분(?)에 교사의 말을 유심히 귀담아 듣는 버릇이 생겼다. 그는 체력도 약한 편이었고 성격도 매우 내성적이었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원칙주의자에 가까운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낸다. '나라를 구하신 대통령께서 두 번만 하고 물러나시면 훌륭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거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겁이 나서 집 바로 앞에 있는 우체통에도 못 넣고 20분 정도 걸어가서 다른 우체통에 넣고 왔지만 말이다.

그는 76학번으로 부산대 영어영문학과에 들어간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지 3년이 지난 뒤다. 그는 입학 전부터 대학에 대한 기대가 컸다. 최소한 고등학교처럼 교과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과서 밖 이야기들을 하면서 같이 토론도 하고 그런 줄 알았다. 특히 좋아하는 문학이나 역사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도 오가는 강의 시간을 꿈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을 실망뿐이었고, 대학에서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양서협동조합이었다. 그곳에서 동료 교사나 시민들과 함께 책도 읽고 토론도 하면서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인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고호석이란 이름 석 자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온다.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참 좋은 사람을 만난 기쁨이 더 크다. 그는 병상에서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까지도 더 좋은 사회를 꿈꾸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한 아름다운 시민운동가이자 참다운 교육자였다. '당신 참 좋은'이란 책 제목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윤지형 작가의 말처럼 무릇 인간의 삶과 죽음이란 덧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견결하고 아름답게 살고자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 또한 아름답고 소중한 일일 것이다. '고호석의 벗들' 중 한 사람인 조향미 시인의 추모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고호석 선생의 명복을 다시금 빈다.
 
싸워야 할 것들 피한 적 없어
자주 피 흘린 날들
고문, 투옥, 해직……
기나긴 장마와 폭우 속에서도
눈부신 햇살 웃음꽃 만발한 정원
화롯불 같은 사랑 가슴에 품었지
하지만
나날이 커지는 통증과 쇠락
초가을의 캄캄한 밤
누구나 건너는 길
조금 이르면 어때
말간 눈으로 깊은 어둠을 내다 보네
마지막 고행
견결히, 견결히 견뎌 나가네
울지 말게나 우리 작별의 날
생은 찬란하고 신비롭지
죽음이 있어 더욱 그러하다네

 

당신 참 좋은 - 고호석이 쓰고 고호석을 쓰다

고호석과 그 벗들 (지은이), 빛누리기획(2020)


태그:#고호석, #부림 사건 ,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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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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