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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있는 드넓은 돌다리를 건너
 
광교 전경 길이(12m) 보다 폭(15m)이 더 넓은 다리다. 청계천을 대표하는 다리로, 1410년 태종 이방원이 축조하였다. 1958년 청계고가도로를 만들면서 매몰되었다가, 2005년 다시 빛을 보았다. 원래 위치에서 상류로 155m 옮겨 보행자전용으로만 사용 중이다.
▲ 광교 전경 길이(12m) 보다 폭(15m)이 더 넓은 다리다. 청계천을 대표하는 다리로, 1410년 태종 이방원이 축조하였다. 1958년 청계고가도로를 만들면서 매몰되었다가, 2005년 다시 빛을 보았다. 원래 위치에서 상류로 155m 옮겨 보행자전용으로만 사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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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서 맨 처음 행행을 맞이하는 다리가 대광통교(광통교, 광교)다. 널돌다리다. 하천 바닥에 지대석 역할을 하는 주춧돌을 놓았다. 횡 열 교각은 7개의 돌기둥이며, 종으로 2열을 배치했다. 교각을 물 흐름에 맞서 각지게 세우고 6개 멍엣돌을 얹어 상판 우물마루도 6열이 되었다.

양 하안에 석축을 쌓아 교대를 만들고 7개씩 귀틀돌을 3열로 걸어 결구했다. 상판 청판석이 무척 두껍다. 밑에서 보면 다리 아래로 볼록하게 나와 있다. 다리는 길이 12m에 너비 15m다. 너비가 길이를 능가한다. 대로를 잇는 다리 위용을 넉넉하게 갖췄다. 도성 안에서 가장 넓은(廣) 이름에 걸 맞는 다리(橋)다.

교대역할을 하는 하안 축석이 특이하다. 여러 유려한 문양이 도드라져 보인다. 원래 흙다리였던 것을 1410년(태종 10년) 널돌다리로 고쳐 만들었다. 이방원은 아버지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에게 원한이 많았다. 나이 어린 동생들 방번과 방석의 어머니다. 그 중 방석이 세자가 된다. 방원은 이 일로 원한이 뼈에 사무친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다.
 
광교 교각과 교대 교대로 삼은 축석에 아름다운 문양이 보인다. 이성계 비 신덕왕후 강 씨 능에 있는 석물을 사용한 흔적이다. 교각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이 선명하다. 하천을 준설하라는 기준선이다. 청계천에 토사 등이 퇴적되어 홍수 시 천 범람을 막기 위한 지혜다.
▲ 광교 교각과 교대 교대로 삼은 축석에 아름다운 문양이 보인다. 이성계 비 신덕왕후 강 씨 능에 있는 석물을 사용한 흔적이다. 교각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이 선명하다. 하천을 준설하라는 기준선이다. 청계천에 토사 등이 퇴적되어 홍수 시 천 범람을 막기 위한 지혜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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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은 광통교를 만들면서, 정동(貞洞)에 있는 계비 강씨 능(陵)의 석물을 가져다 쓴다. 왕비 능 석물을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만들어 버린다. 능은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시켜 버린다. 원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죽은 사람 무덤까지 훼손시킬 생각을 했을까? 광통교는 일제에 의해서도 수난을 당한다. 전차선로를 놓고 넓히는 과정에서, 점차 훼손되고 무너져 간다. 일부 난간은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8년 청계고가도로를 만들면서 그 밑에 완전히 매몰되어 버린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겨우 옛 모습을 되찾는다. 각 궁궐에 흩어져 있던 석물을 찾아와,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다. 다만, 위치는 원래 자리에서 상류로 155m 옮겨 보행자만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드디어 광통교가 빛을 찾았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광통교가 청계천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게 될까? 온전하게 제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제 순전히 우리 몫이다.

행행 행렬은 광통교를 지나 소광통교(현 을지로입구 역 부근, 남대문로1가 23번지)가 있는 창동(倉洞)천을 건넌다. 동현(명동)과 송현(한국은행)을 지나 수각돌다리(남대문로4가 1번지)를 지난다.

두 다리 모두 현재는 흔적이 없다. 이 길을 곧장 빠져나가 숭례문을 통과해 도성을 벗어난다. 도저동(서울역 인근)을 지나 청파교(청파동1가 168번지 일원, 갈월동 쌍다리 부근)를 건넌다. 현재는 다리가 있었다는 비석만 길가에 남아있다. 율원현(원효2가∼용산방면 언덕)과 석우(남영역 인근)를 지난다.

만천(또는 만초천(蔓草川))을 만난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서대문, 서울역을 거쳐 용산을 지나 한강으로 빠지는 제법 굵은 하천이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있다. 이 하천을 배다리로 건넌다. 현재 남영역 앞에 돌비석만 남아있다. 행렬은 이곳을 지나 한강에 이른다.

치밀한 계획과 설계로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고
 
화성능행도병풍-한강주교환어도 사진 상단이 용양봉저정(노량행궁)이고, 그 좌측 백성들이 모여 구경하는 곳 산자락이 지금의 용봉정공원이다. 사진 하단 모래사장이 지금의 노들섬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총 38척의 교배선이 사용되었다. 홍살문 3개와 오색깃발, 단청한 난간 등이 장관인 '한강주교'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말 5필이나 혹은 성인 장정 10여명이 횡으로 늘어 설 만큼 넓은 배다리다.
▲ 화성능행도병풍-한강주교환어도 사진 상단이 용양봉저정(노량행궁)이고, 그 좌측 백성들이 모여 구경하는 곳 산자락이 지금의 용봉정공원이다. 사진 하단 모래사장이 지금의 노들섬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총 38척의 교배선이 사용되었다. 홍살문 3개와 오색깃발, 단청한 난간 등이 장관인 "한강주교"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말 5필이나 혹은 성인 장정 10여명이 횡으로 늘어 설 만큼 넓은 배다리다.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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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배다리 추정지 한강대교 남단에서 용산 방향을 바라본 풍경이다. 을묘능행이 '용산~용양봉저정(노량행궁)'을 지난 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강 배다리는 한강대교 남단에서 용산을 향한 노들섬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한강 배다리 추정지 한강대교 남단에서 용산 방향을 바라본 풍경이다. 을묘능행이 "용산~용양봉저정(노량행궁)"을 지난 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강 배다리는 한강대교 남단에서 용산을 향한 노들섬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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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 행렬은 한강을 배다리로 건넌다. 주교사를 설치, 안전하게 한강을 건널 방안을 미리 도모 한다. 왕은 1790년에 이미 <주교지남(舟橋指南)>이란 글을 통해 배다리의 설계원칙을 제시한다.

큰 배를 강 한가운데 배치하고 이를 축으로 남북으로 작은 배들을 배치하는 방법이다. 배다리 선형을 자연스럽고 완만한 무지개 형상이 되도록 구상하였다. 1789년 아버지 능을 이장할 때 시험한 한강 배다리의 단점을 완벽하게 극복한 내용이다.

주교사 주도로 배다리는 을묘 2월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능행 최고정점이 한강을 건너는 길이다. 이 배다리를 '노량주교(鷺梁舟橋)'라고도 부른다. 관선(官船)과 민선(民船)을 동원하였다. 주교지남 등에는 교배선(橋排船) 36척, 난간선(欄干船) 240척, 위호선 12척 도합 총 288척의 선단(船團)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기록한다. 동원된 민간인에게는 전라·충청의 대동미 운반권한을 주었다.

강 양안에 선창(船艙, 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가 닿을 수 있게 한 곳)을 만든다. 잡석을 모아 배 높이로 쌓고 회반죽을 발라 항구적인 시설물로 쓸 수 있도록 한다. 선창엔 큰 쇠못을 박아 조교(弔橋, 일종의 현수재(懸垂材)로 양쪽 언덕에 줄이나 쇠사슬을 건너지르고, 거기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은 다리)를 연결할 수 있게 한다. 오늘날 현수교 원리와 유사하다.

선창에서 항선(項船, 배다리와 선창 사이에 띄워 놓은 배)이 자리할 간격을 벌리고, 강 위에 따로 배다리를 만든다. 교배선을 일정 간격으로 늘여 세워 닻을 내린다. 교배선 사이사이 난간선 여러 척을 끼워 넣는다. 배끼리 연결하는 삼판(杉板, 배 바닥에 댄 널)을 개 이빨처럼 서로 엇물리게 연결(犬牙相制)한다. 그래야 배가 흔들리지 않는다.

각 배끼리는 세로막대기(縱樑)와 버팀목(泂柱)으로 연결한다. 그 위에 횡판(橫板)을 까는데, 판자끼리 맞닿는 곳에 드러나지 않게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시킨다. 횡판 아래쪽은 견마대철(牽馬帶鐵, 한 부재에 걸쳐 놓아 다른 부재를 받게 하는, 안장처럼 만든 철물)을 박고, 판자 양 끝은 구멍을 뚫어 삼줄을 꿰어 좌우 세로막대에 묶는다. 배다리 위에 설치된 횡판이 편평하고 안정감 있게 버텨준다. 형상은 우물마루 상판이다. 횡판 위에 난간을 만들고 조교를 설치한다. 난간엔 단청을 하고 그 밖으로 오색 깃발을 세운다.

선창과 배다리 사이에 항선을 띄운다. 항선 머리와 꼬리 부분을 묶어 낭창한 조교를 걸어 선창에 있는 쇠못에 연결시킨다. 다른 끝은 배다리에 설치된 조교에 묶어 연결한다. 선창과 항선 사이 조교는, 조수간만의 차이에 유연하게 적응하도록 낭창하게 만들어 둔다.

배다리 입·출구와 한가운데에 각각 홍살문을 세운다. 이는 왕의 행차에 대한 권위와 경건함의 상징이다. 가운데 홍살문을 높여 배다리의 안전성과 시각적 균형점을 확보한다. '노량행궁(용양 봉저정)에 들어 점심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들섬 부근 한강을 건넜음이 확실하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사이로 추정한다.
 
용봉정공원에서 바라 본 배다리 길 '한강주교환어도' 좌측 상단 백성들이 행행하는 주교를 구경하고 있는 곳에서 바라 본 한강 배다리 추정지다.한강대교 남단에서 노들섬 사이에 배다리가 놓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사이 용산방향으로 향하는 한강이다.
▲ 용봉정공원에서 바라 본 배다리 길 "한강주교환어도" 좌측 상단 백성들이 행행하는 주교를 구경하고 있는 곳에서 바라 본 한강 배다리 추정지다.한강대교 남단에서 노들섬 사이에 배다리가 놓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사이 용산방향으로 향하는 한강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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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2월 13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2월 24일에 끝이 난다. 당초 20여일을 예상했으나 불과 11일 만에 끝낸 것이다. 치밀한 사전 계획과 획기적인 설계가 반영되었다는 반증이다. 예산도 획기적으로 절감한다.

능행도 중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를 보면 하중도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주교가 놓인 곳은 노량행궁에서 노들섬 사이다. 노들섬∼노량진 간 강폭이 340여m로 당시와 비슷하다. 많은 학자들이 배다리 실제 길이가 약 330여m라 추정한다.

한강주교환어도는 노량행궁(용양봉저정)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능행 마지막 날 오후 궁궐로 향하는 걸음이다. 양안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구경한다. 이는 한강에 넓게 퍼져있던 모래사장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당시 한강 풍경이다.

1920년대까지 한강은 곳곳에 모래사장이 넓고 길게 퍼져있었다. 금빛 모래사장이다. 용산 방면 이촌동 방향도 모두 모래사장이었다. 서빙고에서 노들섬을 이어 이촌동까지 북측하안 모두가 모래사장이었다.

'한강이 범람하면 강변북측에 샛강이 생겨 이를 노들강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제 강점기 경원선철도 부설과 군사기지 용산 보호용 제방을 쌓는다고 야금야금 한강 모래를 파낸다. 현재 노들섬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생겨난다.

1917년 한강대교를 만들면서 노들섬을 빙 둘러 둑을 돋워 올린다. 하중도가 생겨난다. 이름을 '중지도'라 부른다. 을축(1925)년 대홍수 당시 지도(경성부수재도)는 섬 주변이 비교적 번성한 시가지였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1929년 이곳까지 전차선을 들여온다.

한강대교를 넓혀 증설(1936)하면서 전차선로가 노량진까지 연장(1937)된다. 그래도 모래사장은 1960년대 중반까지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었다. 1960∼70년대 '한강개발계획'으로 모래를 더 파낸다. 공유수면매립으로 땅 장사를 하지만, 명분은 홍수방지용 제방 쌓기였다. 제방 위에 도로를 만든다. 현 도시고속도로(강변북로, 올림픽대로)의 모체가 된다. 강 양안이 넓어지기 시작한다.

결정타가 날아온다. 1982년부터 한강 골재를 마구잡이로 파낸다. 골재를 매각하는 막대한 이권이 걸려있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한강을 규격화시켜버린다. 그 상처가 지금도 깊다. 유람선 때문이었나? 잠실과 신곡에 수중보를 만든다. 강물 흐름이 느려진다.

그런 측면에서 한강하구를 막고 있는 신곡수중보 해체는, 호수처럼 변해 바닥에 오니가 퇴적되었을 한강을 살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강 양안으로 차가운 도시고속도로가 생겨난다. 우·오수 분리 관을 매설하고 5개소에 하수종말처리장을 짓는다. 콘크리트 블록 호안을 쌓고, 정체불명의 둔치를 조성한다. 노들섬은 완전한 하중도가 되어 버린다.
 
용양봉저정 한강을 배다리로 건너고 이곳 용양봉저정(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먹은 것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곳곳이 헐리어 목욕탕이나 위락시설로 변해버리고 한채만 덩그마니 남아 있다. 지금은 복원하기 위해 사진 건물 하단을 매입하여 공사 중이다. 그 앞에 주교사가 있었다.
▲ 용양봉저정 한강을 배다리로 건너고 이곳 용양봉저정(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먹은 것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곳곳이 헐리어 목욕탕이나 위락시설로 변해버리고 한채만 덩그마니 남아 있다. 지금은 복원하기 위해 사진 건물 하단을 매입하여 공사 중이다. 그 앞에 주교사가 있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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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설계한 한강 배다리는 시도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만, 조운과 물류·과학기술 측면에서도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다. 더구나 세세한 기록이 남아 있어 더욱 소중하다. 당시 한강은 역동적이었다. 상류에 댐이 없어 지금보다 유속이 더 빨랐다.

바닷물의 영향도 있었다. 노량진까지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저런 길이의 배다리는 현재에 비추어도 대단한 규모다. 첨단장비로 특화된 도하부대(渡河部隊)도 만만치 않은 너비의 배다리를 1795년에 구현해낸 것이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용양봉저정(노량행궁)에 들어서니 점심이다. 행궁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헐어내어 목욕탕 등 위락시설로 바꾸어 버렸다. 현재는 1채만 덩그마니 남아있고 그 앞은 복원을 위해 공사 중이다.

오후에 다시 길을 떠나 만냥(혹은 마냥)고개, 장생현(장승배기)을 넘어 도화참발소전로(상도동길)를 지나 번대방평(대방동)에 다다른다. 번대방평에서 문성동 앞길(시흥대로)로 접어든다. 이곳에서 시흥행궁으로 들어 하룻밤을 유숙한다.(계속)
 
상도터널 인근 용양봉저정을 나와 이 고개를 넘어 장생현(장승배기)를 지난다. 높은 언덕을 넘고 작은 개울을 건너 저녁엔 '시흥행궁'으로 들어 행행 1일차를 마친다.
▲ 상도터널 인근 용양봉저정을 나와 이 고개를 넘어 장생현(장승배기)를 지난다. 높은 언덕을 넘고 작은 개울을 건너 저녁엔 "시흥행궁"으로 들어 행행 1일차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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