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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개학 연기 후 고3의 첫 등교일인 5월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 고등학교에서 고3 학생이 등교를 하며 교사와 팔꿈치 인사를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학 연기 후 고3의 첫 등교일인 5월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 고등학교에서 고3 학생이 등교를 하며 교사와 팔꿈치 인사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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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일 남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매일 아침 등굣길 교문에서 너희들과 '주먹 인사'를 나누며, 난 '인간 계수기'를 자처했다. 수능 'D-day 100일'이라고 외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불과 20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날짜가 세 자리에서 두 자리, 다시 한 자리로 내려갈 때마다, 시간이 쏜살같다는 걸 실감할 것이다.

자녀가 수험생이면 부모 역시 수험생이 되고, 집은 쥐 죽은 듯 고요한 독서실이 된다. 가정만 그런 건 아니다. 알다시피, 고등학교의 교육과정과 학사일정의 편성 기준은 수능과 모의고사 일정이다. 너희 후배들은 '학교의 진짜 주인은 고3 형들'이라며 눈을 흘기더구나.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도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은 '절대 반지'다. 웬만하면 허물을 들추지 않고, 관용을 베풀며,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모든 건 수능 이후로 유예된다고나 할까. 물론, 그것이 흔쾌히 누릴 수 없는 부담이라는 건 안다.

교사이기 전 기성세대로, 너희에게 미안하다
 
오죽하면 고등학교는 3년제가 아니라 '2+1년제'라는 말이 나올까. 고1부터 고2까지 2년만 고등학교고, 고3은 입시 학원이라는 조롱 섞인 표현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일과 중 서로 만나지 않도록 고3 교실을 별도의 건물에 배치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하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수능의, 수능에 의한, 수능을 위한' 학교. 아무리 학생부종합전형(아래 학종)의 비중이 커졌다고 해도, 수능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른다. 사실상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마무리되는 날은 졸업식이 아니라 수능일이다. 너희들 역시 수능이 끝나면 곧장 방학이라며 들떠 있더구나.

일부 언론에서는 벌써 수능이 치러지는 당일의 날씨와 수험생 유의 사항을 기사로 내보내고 있다. 출근 시간이 늦춰지고, 듣기평가 시간에는 비행기의 이착륙이 금지된다는 것까지 자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늘 그래왔듯, 수능일 하루 온 국민의 일상은 잠시 멈추게 된다.

대체 수능이 뭐길래, 이렇듯 호들갑스러운 걸까. 온전히 수능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는 숫자가 10명 중 3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여전히 수능은 수험생 본인은 물론, 교사와 학교, 지역의 '품질'을 가늠하는 잣대로서 우뚝하다.

수능이 아예 폐지되지 않는 한, 현재의 위상이 낮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전국 공통의 표준화된 시험만이 공정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 신뢰가 부족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수능의 위상이 굳건할수록 학교 교육의 신뢰가 흔들리는 불편한 진실을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고3 교실마다 '수능 대박'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음을 본다. 23년 전 초임 시절 때부터 봐왔던 풍경이라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동안 응시 과목 수와 반영 비율 등이 무시로 바뀌고, 입학사정관제와 학종 등 여러 보완책이 도입되긴 했어도, 수능 폐지 여론이 비등한 적은 없다.

'수능 대박'이라는 주술은 그만큼 수능을 앞두고 부담감이 크다는 고백일 테다. 경쟁자들은 이 시간에도 깨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새벽녘 잠자리에 누워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는 한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잠시간이 시나브로 줄어드는 것 같다며 푸념하더구나.

그는 '수능 대박'을 '인생은 한 방'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수능 점수와 대학의 간판이 이후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수명이 100세라면 고3 시절은 1/100일 뿐이며, 인생은 내내 성장기라는 내 말에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교사이기 전에 기성세대로서, 서글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올 초 고3 교과 담임을 배정받았을 때 스스로 다짐한 게 있다. 적어도 내 수업만큼은 수능에 종속시키지 않겠다는 것. 지난해 해왔던 방식 그대로 모둠을 만들어 퀴즈 게임을 하며 수업을 즐겨보려 했다. 누구도 졸거나 딴청 피우는 경우가 없었던 좋은 기억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능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주고 싶은 바람에서다. 교과마다 EBS 문제집만 붙들고 주야장천 문제 풀이만 반복하는 수업 방식이 도리어 '수능 대박'이라는 주술을 강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고3 수험생에게도 '삐딱한' 수업 하나쯤은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다.

대신 퀴즈 문항은 수능 기출 문제에서 발췌했고, 재미를 위한 상식 코너는 국어, 영어, 수학 영역의 기출 문제를 활용해 제작했다. 수업 장면을 떠올리며 열심히 만들었고, 개학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수능 준비에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치르게 될 숱한 시험 중 하나일 뿐
  
2021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30일 앞둔 11월 3일 오전 강원 춘천고등학교에서 고3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2021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30일 앞둔 11월 3일 오전 강원 춘천고등학교에서 고3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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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학을 코앞에 두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멈춰 선 것이다. 학교의 교문이 닫혔고, 교육과정과 학사일정이 어그러졌으며, 교사와 학생의 일상은 갈피를 잃었다. 수능을 앞둔 너희 고3 수험생들은, 말 그대로 '멘붕'을 겪어야만 했다.

지난 3월 개학 연기가 결정되었을 때, 교사들은 이구동성 '올해 고3 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수능 준비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에서다. 5월 말 가까스로 등교는 하게 됐지만, '골든 타임'을 허비하게 됐다며 하나같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마음 설레며 준비했던 내 수업도 물 건너갔다. 교실에서 모둠활동은커녕 짝꿍과 나란히 앉을 수도 없는 마당에 너희들 앞에서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띄엄띄엄 떨어져 앉은 교실에서 강의식 문제 풀이 수업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나마 내내 원격수업을 해야 했던 후배들보다야 백 번 낫다고 위안 삼을 뿐이었다.

그러잖아도 긴장의 연속인데, 코로나로 수능에 대한 중압감은 더욱 커졌을 테다. 올해 내내 마스크와 한 몸이 되어 지내야 했고, 학사일정조차 뒤엉켜 학습 리듬이 흐트러진 건 당연지사다. 당장 비교과 활동 시간이 대폭 축소되다 보니 생활기록부가 텅 비게 될 것부터 걱정이 됐을 것이다.

한 친구는 학종에서 비교과 영역의 반영 항목을 줄이겠다는 교육부의 발표가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오히려 적어도 올해는 내신 등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조건 수능에 '올인'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더란다. 올해 학종은 '로또'와 다를 바 없다면서.

교육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와 상관없이 수능은 예정된 날짜에 치르겠다고 공언했다. 이마저도 너희에겐 수능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괘념치는 마라.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수능은 너희가 지금껏 치렀고 앞으로 치르게 될 숱한 시험 중 하나일 뿐이다.

거듭 말하건대, 수능이라고 특별할 건 없다. 다가올 시대엔 수능 점수와 대학 간판이 너희들의 창창한 인생과 행복을 결정하지 못한다. 다만, 수능에 견줘 언뜻 사소해 보이는 교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너희 각자가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수능을 준비하면 된다.

수능을 코앞에 둔 지금, 사교육에서 떠들어대는 고득점을 위한 일일 전략 따위에 솔깃하기보다 평상시대로 먹고, 자고,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일 평소처럼 교복 차림으로 시험장에 가라고 조언하는 이유다. 수능 시험 일정에 맞춰 여러 차례 모의고사도 풀어봤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올해는 시험장 풍경마저 낯설 것이다. 그러잖아도 다른 학교라 어리둥절할 텐데, 시험실 당 응시생 수가 대폭 줄고 책상마다 칸막이가 설치될 예정이다. 코로나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시험장을 수능 일주일 전에 비우고 방역 소독을 하게 된다. 이달 26일부터 시험장으로 쓰이는 학교는 일괄 원격수업으로 전환되는 이유다.

해마다 수능일이 가까워지면 난 홍역을 앓듯 병치레를 하곤 한다. 너희들과의 만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서운함이 커서일까.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났지만, 졸업 후에는 인생의 도반으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너희들이 성장해가는 만큼 나 역시 성숙해지도록 힘쓰겠다.

재능이 발현될 날, 반드시 올 거라 믿는다
 
끝으로, 두 친구에게 건넬 말이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모의고사 점수가 오르지 않아 속상해하는 성진(가명)이. 결과가 좋다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낙담할 건 없다. 네가 쏟은 땀과 시간은 언젠가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인생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아무래도 공부에는 젬병이라며 일찌감치 손을 놔버린 형수(가명). 그런데도 올해 수능을 보겠다는 이유가 수험표 때문이라는 네 말에 솔직히 '웃펐다'. 수험표가 웬만한 할인 카드 10장보다 낫다며 좋아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래, 언젠가 '포텐이 터질 것'이라던 네 말마따나, 공부가 아니래도 네 재능이 발현될 날이 반드시 올 거라 믿는다. 혹 나중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동하거든, 그때 해도 늦지 않다. 공부엔 때가 없을 뿐더러 그때에도 수능은 치러질 테니까.

태그:#대학수학능력시험, #코로나 수능, #방역 지침, #수능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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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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