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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박경이 전 교사 부부
 이인호 박경이 전 교사 부부
ⓒ 이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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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재합법화 되면서 1989년 전교조 태동 당시의 사건 하나가 새롭게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던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의 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정권은 전교조를 '좌파 이념단체'로 규정하고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을 경우 직권 면직 혹은 파면을 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실제로 당시 전교조 탈퇴를 거부한 1527명의 교사는 해임 또는 파면을 당했다.

얼마 전 당시 해직된 신맹순(78·전교조1호해직교사)씨가 손수레를 끌며 폐지를 줍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보도 사진 속에 비친 신맹순씨의 모습은 1989년 당시 '전교조 탄압 사건'이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을 시각적으로 환기시켰다.

1989년 당시 충남에서는 52명의 교사가 해직됐다. 이인호(64)·박경이(63)씨도 그 당시 해직된 충남 부부교사 3쌍 중 하나이다. 전교조 탈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지난 1989년 8월 1일부터 1994년 2월 28일까지 4년 7개월 동안 해직교사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해직 당시 박경이씨는 당진여고, 이인호씨는 당진상고에서 국어교사로 일했다. 두 사람 모두 공주사범대학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다. 이인호씨는 지난 2월 34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했다. 박경이씨는 지난 2010년 명예퇴직을 하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엄마 꽃밭은 내가 가꿀게요>, <만화 학교에 오다>, <천방지축 아이들 도서실에서 놀다> 등이 그가 쓴 책이다.

두 사람은 10년 쯤 천안의 광덕산 자락에 집을 짓고 귀촌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1989년 해직 사건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박경이씨는 "친구들과 제자들을 불러 차 한잔 할 수 있는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사를 치유하고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1989년 해직 교사'들의 명예가 반드시 회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월 31일 광덕산 자락에 있는 이인호·박경이씨 집을 방문했다. 부부는 마치 기자의 학창시절 담임 선생님 댁을 방문한 것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명퇴 직전까지도 학교에 내자리가 없는 악몽에 시달려"
     
- 1989년 해직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달라.
이인호 : "1987년 민주항쟁 직전 교사들은 '교육민주화 선언'(86년)을 통해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87항쟁 이후, 전국 교사협의회를 구심점으로 교사들이 모였다. 교사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교사협의회는 교육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교섭력이 떨어졌다. 1989년 5월에 교원노조를 결성하게 된 배경이다.

전교조가 결성되자 마자 정권(노태우)의 전교조 탈퇴 요구가 시작됐다. 당시 정권은 교사들을 마음대로 지시하고, 요구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정부의 거의 모든 부처가 나서서 대응할 정도였다. 충남에서는 전교조 탈퇴각서를 거부한 52명이 해직됐다. 그 과정에서 가족을 동원해서까지 회유하고 협박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박경이 : "그때는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대였다. 감사하게도 당시 YMCA에서 교사협의회(YMCA 중등교사협의회)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나온 교육민주화선언도 YMCA 중등교사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교사라면 다들 공감하고 있던 것들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이인호 : "198년 6.29 선언이후,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군부독재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교육은 정권의 하인이었다. 입시 경쟁 속에서 자살하는 학생도 많았다. 교육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고 있었다."
  
- 해직 이후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이인호 : "해직 기간 동안 상당히 바쁘게 지냈다. 농민회와 연대해 사회문제에 대응하고, 학교 현장 문제 해결에도 뛰어들었다. 어렵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물론 어린 두 아이가 있었고, 부모님과도 함께 지내다 보니 생계 문제가 생겼다. 동료교사들이 준 후원금으로 버텼다.

해직 후, 3년 반 정도가 지날 무렵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교사로서 학교와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이러다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박경이 : "우리는 교사이기를 원했지 사회운동가가 되길 원했던 것은 아니다. 해직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사회운동을 하게 됐다. 금방 복직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복직이 안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커졌다. 경제적으로도 암담하고, 교단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꿈을 꾸면 항상 학교에 출근을 하는데, 교무실에 내 자리가 없었다. 또 시간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시간표를 찾고 나면 교실이 보이질 않았다. 복직 이후는 물론이고 명퇴하기 직전까지도 가끔 그런 악몽을 꾸었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꽤 많은 해직교사들이 비슷한 꿈을 꾼 경험이 있다."

- 당시 문교부가 내린 공문의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 특이했다. 이른바 '문제 교사(전교조)식별법'에는 '촌지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인호 : "<한겨례> 창간호에 '문제 교사 식별법'이 공개돼 전문을 처음 접했다. 당시에는 관료들은 학급신문을 내고 학급 문집을 내는 등의 교사의 일상적인 교육활동에 대해서도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대이다. 학교에서는 내가 가르친 아이들의 일기장이나 노트까지 일일이 검사할 정도로 단속이 심했다."

박경이 : "문제교사가 아니라 오히려 교사로서 참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들을 식별하는 방법에 가까운 내용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 해직 당시 여러 단체와 시민사회에서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시민사회에서 어떤 조력이 있었나.
이인호 : "관료들이 '문제(전교조) 교사 식별법'을 만들고 있을 그 시에 농민회의 경우, 교사들이 부당 징계를 당하거나 교권침해를 당하면 마치 내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었다. 농민단체에서는 교육청 항의 방문과 연좌농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교사들과 노동단체와의 교류가 많았다면, 농촌 지역에서는 그 특성상 농민단체와의 교류가 더 활발했다."

"1989년 명예회복은 해직교사만을 위한 게 아냐"
 
지난 10월 31일 이인호 박경이 전 교사부부를 만났다.
 지난 10월 31일 이인호 박경이 전 교사부부를 만났다.
ⓒ 이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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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직 당시 동료 교사들의 조력도 컸다고 들었다.
박경이 : "물론 당시 전교조조합원들의 힘이 컸다. 하지만 조합원이 아닌 동료 교사들을 역할도 컸다. 해직교사들을 지키겠다며 후원금을 낸 교사들이 많았다.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1500여 명의 해직 교사들을 지키겠다며 전국에서 초중고 교사들이 사비를 털어 후원했다. 후원은 해직기간 내내 이어졌다.

학부모나 시민들의 도움도 많았다. 당시 한살림 운동과 생협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다. 학부모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은 친황경 상품을 소소하게 후원했다. 감사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1989년 해직교사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우리 해직교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때 당시 우리를 도왔던 교사, 학부모, 농민회와 시민단체 분들에 대한 명예를 동시에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분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국가가 인정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이다. 그런 만큼 이 정부에서 화답하고, 이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인호 : "우리 부부는 당시 52만 원을 매달 지원 받았다. 생활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 당시에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전국 1500여 명의 교사를 5년 동안이나 후원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사건이다. 교사집단에 대한 자긍심도 그때 생겼다. 후원금을 전달한 사실이 발각되면 교장 교감에게 불려가 '불법단체를 후원한다'며 질책을 듣던 시대였음에도 많은 교사들이 후원에 동참했다."

- 89년 해직교사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어떤 의미인가.
이인호 : "일각에서는 모두 해결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증서가 발급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가 필요하다. 해직교사들은 복직 이후 5년 후배들과 동일한 호봉과 월급을 적용 받았다.

우리보다 연령대가 높은 선배 교사들의 경우, 근무연한 때문에 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그분들의 고통을 현실적으로 보상하는 문제도 있다. 또 특별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해직교사들의 활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국가가 잘못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의미가 크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박경이 :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국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누군가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부당함에 저항했을 때는 적어도 희망이 있어야 한다. 배상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다. 이 일이 해결되면 그동안 도와주었던 모든 분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이고 싶다."
 
이인호 :
 "실제로 89년 해직 교사들의 경우, 받지 못한 월급을 보상 받으면 참교육 연수원을 만들고, 별도 공간을 마련해 배움을 나누고, 지역 사회와 연대하는 데 쓰고 싶다는 교사들도 많다. 최근 전교조의 재합법화됐다. 이런 국면에서 동시에 풀어야 하는 문제가 바로 1989년 해직교사들에 대한 문제이다. 전교조 태동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 만약, 1989년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하실 생각인가.
박경이 : "우리는 부부 해직교사였다. 부부라서 전략적으로 한명은 학교에 남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라면 결국 맞벌이를 하지 않고 혼자 일하는 교사들은 해직을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건 말이 안 된다. 당연히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경이 : "나의 두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물론 엄마, 아버지의 삶 덕분에 아이들이 좀 더 자립적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때 아이들에게 좀 더 안정적인 지원을 하지 못한 것은 부모로서 미안하다. 국가의 호응과 응답이 미래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 그리고 우리를 응원했던 수많은 제자들의 삶에도 화답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책임을 다하는 대표자로서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한다."

태그:#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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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 이성애자. 윤회론자. 사색가. 타고난 반골. 충남 예산, 홍성, 당진, 아산, 보령 등을 주로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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