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사의재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에서 처음 머문 동문밖 주막이 사의재이다.
▲ 사의재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에서 처음 머문 동문밖 주막이 사의재이다.
ⓒ 조찬현

관련사진보기

 
지금이야 서울에서 강진까지 차로 2, 3시간 거리이지만 당시는 멀고 먼 땅끝 오지 마을이었다. 주민들의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는" 등의 소란 끝에 간신히 술과 밥을 파는 노파의 토담집 뒷켠의 방 하나를 거처로 삼을 수 있었다. 「객지에서의 회포」에서 이때의 감회를 적는다.

 북풍이 하얀 눈 휘몰듯이 나를 몰아붙여
 남쪽 강진의 주막까지 밀려왔네
 다행히 낮은 산이 바다 빛을 가리고
 좋을씨고 대숲이 가는 세월 알리네
 장기(璋氣) 때문에 옷이야 덜 입지만
 근심 때문에 술이야 밤마다 느네
 나그네 근심 덜 일 하나 있으니
 동백꽃이 설 전에 활짝 피었네.

술집이다 보니 정약용도 술을 자주 마시면서 귀양살이의 고뇌를 달래고, 마당가에 오상고절의 동백꽃이 피어서 한가닥 위안으로 삼았다. 관직에 나온 이래 만고풍상을 겪은 터라 유배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사의재 현판 다산 정약용이 머물 당시 지은 이름이다.
▲ 사의재 현판 다산 정약용이 머물 당시 지은 이름이다.
ⓒ 조찬현

관련사진보기

 
그는 학자였다. 어떤 장소에서도 꺼지지 않는 학문의 열정은 그를 다시 일상으로 복귀시켰다. 토담집 옹색한 방의 이름을 생각ㆍ용모ㆍ언어ㆍ몸가짐 네 가지를 학자로서 지켜야 할 덕목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사의재(四宜齎)'라 짓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뒷날 지은 「사의재기(四宜齎記)」에서 술회한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며 거처하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게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四宜之齎)'이라고 했다. 마땅함이라는 것은 의(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을 둔 사업이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嘉慶) 8년(1803년) 11월 신축일(辛丑日, 10일) 동짓날이니 갑자년(180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읽었다.
 
 정약용
 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관련사진보기

 
아무리 타락한 '권세의 시간'이라 해도 세상에는 인심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정약용이 어떤 인물인가, 입 소문을 통해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주막을 들락거리던 아전들도 차츰 경계심을 풀고 그들의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기를 간청하였다.

해가 바뀐 1802년 10월에 주막집 뒷방에 작은 서당을 열었다. 더 이상 폐족 상태의 고향집에 부담을 주기도 어려웠다.

처음에는 아전의 자식 몇이 왔는데 소문이 나면서 학동이 늘었다. 그 중의 하나가 황상(黃裳, 1788~1870)이다. 열다섯 살에 정약용을 만나 수학했으며 해배 뒤에는 스승의 고향으로 찾아와 만년까지 교유하였다.

스승의 아들들과도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고, 스승은 물론 추사 김정희에게 인정을 받았으나 스스로 '다진(茶塵), 다산의 티끌)'이라 일컬으며 겸손해 한 인물이다.

정약용 연구에 일가를 이룬 정민 교수는 황상에 관한 책의 서두에 이렇게 썼다.

"이 책에서 살핀 황상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눈으로가 아닌 당시의 시선으로 볼 때도 그랬다. 이름 없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 멋진 스승을 만나 빚어낸 조화의 선율은 그때도 많은 사람을 열광케 했다.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 편에 고무되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가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주석 3)

장기수들이 그렇듯이 유배자들도 첫해 1년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정약용이 마흔 살이던 1801년은 생애 최악의 연대였다. 초봄에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귀양갔다가 7개월 10일 만에 다시 압송되어 또 추국을 당하고, 서울에서 800리 떨어진 땅끝 강진에 유배되어 주막의 봉놋방에 유치되었다. 셋째 형은 목이 잘리고 둘째 형은 바다 멀리 흑산도에 귀양 갔다. 악몽의 신유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피첩.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 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서첩이다.(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하피첩.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 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서첩이다.(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이종헌

관련사진보기

 
해가 바뀌면서 자식들의 편지를 인편으로 받았다. 그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다. 큰 아들은 학연(學淵), 둘째는 학유(學游), 셋째는 농장(農牂)이고, 막내가 외동딸이다. 셋째가 1802년 겨울에 요절하여, 고향에는 아내와 두 아들, 딸이 남았다. 그때 학연과 학유는 20살과 17살이어서 집안에 휘몰아친 피바람을 뼈저리게 지켜보았다. 이런 속에서도 자식들은 아버지를 닮아선지 공부에 제법 재능이 있었다.

두 아들의 편지를 받고 아비는 강진에서 첫 편지를 쓴다. 「두 아들에게(答二兒)」라는 제하의 편지다. 부정(父情)이 서리고, 비록 폐족이지만 글도 못하고 예의도 갖추지 못하면 어찌되겠느냐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너희들의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덕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자포자기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부지런히 책을 읽는 데 힘써라. 초서(鈔書, 책에서 중요한 내용을 골라 뽑아 기록해 두는 일)나 글을 쓰는 일에도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말도록 해라.

폐족이면서 글도 못 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일반 집 사람들보다 백배 열심히 노력해야만 겨우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 내 귀양살이 고생이야 매우 심하긴 하다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큰애가 4월 10일 께 말을 사서 타고 오겠다고 했는데, 벌써 이별할 괴로움이 앞서는구나.


주석
3> 정민,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2쪽, 문학동네, 201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