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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전 세계에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 강하게 반발한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다. 서구 열강이 을사조약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가운데, 일제는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원했다고 대외에 선전했다. 의병들은 간도·연해주 등지로 건너갔고, '105인 사건'(1911)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거의 투옥됐다. 그로부터 9년 뒤 일어난 3.1운동은 조선의 독립의지를 처음으로 외부 세계에 보여준 대사건으로 기록됐다.  

경성 주재 외국 기자들이 3.1운동을 목격했다. 각국 외교관들은 본국에 보고했다. 선교사들은 부상자를 치료했다. 오늘날 3.1운동을 기록하고, 그 당위성을 주장한 외국인들의 글이 다수 남아 있다. 당대의 기록이 많지만, 어떤 기록은 80년이 지난 뒤 출판됐다. 힐디강의 <검은 우산 아래에서- 식민지 조선의 목소리, 1910~1945>(2001, 국내출판 2011·산처럼)가 그것이다.  

한국인 이민자들의 생생한 목소리
 
 <검은 우산 아래에서> 책표지
 <검은 우산 아래에서> 책표지
ⓒ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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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 남성을 만나 결혼한 백인 여성 힐디강은 시아버지를 비롯해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 이민자 51명의 목소리를 <검은 우산 아래에서>에 담았다. 당시 인터뷰 대상자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노인들이었다. 힐디강은 해당 저작의 첫 장에서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참여했던, 현재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이 살던 집이 있는 곳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수백 명의 조선 사람들이 "이제 독립이다!"라고 외치면서 우리를 향해 다가왔어요. 남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앞장섰고 그 뒤로는 군중들이 밀치면서 "만세!"를 불렀어요. (중략) 우리는 함성과 함께 뒤에서 밀며 서울역 쪽으로 나아갔어요." (김순옥, 남, 1910년 마포 출생, 소방관)


트럭 운전사 출신의 이상도(남, 1910년 오산 출생)씨는 가족과 함께 나간 경기도 오산 장터에서 태극기를 처음 봤다.
 
"어린 마음에 태극기는 너무 흥미롭고 예뻤어요. 오산엔 일본 상인들의 가게가 많았는데, 우리가 가게 앞을 지나가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어요. 젊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독립가'를 부르며 춤을 추더군요. 나도 정신없이 그들을 따라 춤을 추었지요. 그들은 횃불을 들고 거리를 따라 행진했어요."


저자는 은행 지점장 출신인 시아버지의 진술도 기록했다. 시아버지 강병주(1910년생)는 일제강점기에 신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평북 정주 출신이다. 시아버지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이었던 이명룡 장로와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 장로가 정주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기억했다. 그해 3월 1일 사람들은 하얀색 새옷을 입고 오산학교 뒷마당에 모였다.
 
"내가 기억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운동이지요. 나 같은 어린아이가 어떻게 독립운동에 가담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을 거예요. (중략) 우리는 태극기를 흔들었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연단으로 뛰어올라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에 대해 큰소리로 연설을 했지요. (중략) 우리 모두는 목이 쉴 때까지 독립 구호를 외쳤어요."


일본경찰이 출동해 시위대를 탄압한 경험은 저마다 약간 차이가 있다. 각 지역에 주재한 일본인 경찰 책임자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운이 좋았던 몇몇을 제외하면, 구술내용 대부분은 '폭력' '부상' '체포'에 대해 증언한다.  
 
"나중에 경찰서장이 "소란 피우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서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주었어요. 특별히 나이든 사람들에겐 "할아버지, 왜 소란을 피우는 거요?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 했어요.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말했어요. 다른 곳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우리 마을에선 그런 일이 있었어요."(이상도)

"기마경찰들은 군중을 두들겨 패면서 다가왔어요. 모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지요. 시위대 중 어떤 사람들은 난간을 넘어 철길 아래로 뛰어내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총검에 찔렸어요. 말 탄 군인들이 사람들을 둘러싸더니 밧줄로 묶은 다음 다른 사람들 뒤를 쫓았어요. 그들은 말채찍 손잡이 끝으로 사람들을 후려쳤어요. 나는 숨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10살밖에 안된 아이라 놓아준 모양입니다."(김순옥) 

"우리 시위행렬이 막 만주와 신의주 방면에서 오는 철길을 건너려 할 때 기차 한 대가 우우웅 경적을 울리며 터널을 빠져나와 시위대 앞 건널목에 딱 멈춰서더군요. 갈색 제복을 입은 수십 명의 일본 군인이 기차에서 뛰어내렸어요. 그들은 시위대를 마주보고 일렬로 늘어서더니 배를 깔고 엎드려서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탕! 탕! 탕, 탕, 탕, 탕! 워낙 총소리가 커서 우리는 무서움에 얼어붙고 말았어요. 그런데 진짜 총알이 아니었어요. 공포탄을 쐈던 거예요. 

우리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서 있다가 총소리에 놀라 그만 기절을 해버렸어요. (중략) 이 사건이 있은 뒤 정주에선 독립집회가 다시 열렸어요. 그러자 일본인들은 확고하고 가차없는 방법으로 대응했어요. 그들은 진짜 총을 쏘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지요. 그뒤 나는 약 열흘 동안 집에만 있었어요."(강병주)



대대적인 운동에 당황하고 겁먹은 일본인 경찰의 모습에 대한 구술도 있다. 
 
"내 옆에 있던 사람이 큰 몽둥이를 경찰서 창문 안으로 던졌어요. 그러자 경찰이 수화기를 떨어뜨리고는 안쪽에 있는 방으로 뛰어가더니 담요 밑에 숨으려고 했지요. 그 사람은 정말로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어요."(김순옥)


이들의 말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들과 꼭 같다. 3.1운동을 평가절하하거나 과장됐다고 의심을 품는 입장에 반박하듯 생생한 목소리들이다. 

이외에도 "우린 하루종일 만세를 부르면서 돌아다녔지만, 군인도 경찰도 오지 않았어요. 우리 마을은 너무 작아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게지요"(김여성, 남, 1910년 평남 출생, 사진사) "경찰은 우리 동네까지 와서 아버지를 끌고 갔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일본인 학교에 보냈다는 이유로 하루 동안이지만 경찰서에 있다가 풀려났어요"(주봉예, 1913년 경북 출생, 주부) 등의 기록이 실려 있다. 

한편 <도쿄니치니치신문> 1910년 10월 2일자 사설은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신문은 일일이 검열당했고, 회사에 대한 통제 또한 대단히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회사들은 잇달아 문을 닫아야 했다. 기자들과 작가들은 숨막히는 상황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불평이라도 하면 체포될지도 모른다. 나는 마치 지옥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9년 뒤 무단통치에 저항하는 혁명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저자는 "확산되는 시위에 놀란 일본인들은 지배방식을 재고하는 한편 새로운 룰을 모색했다"면서 "몇몇 영역에서 자유의 증대는 다른 영역에서의 엄격한 통제를 동반했다. 역사가들이 경찰통제 강화, 정보원 네트워크 확장, 감옥 확장과 사상범 체포 증가 등을 들어 이 시기(문화통치기)를 '겉만 번지르르한 변화'라고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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