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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 전 예사 때의 우키시마 호
 침몰 전 예사 때의 우키시마 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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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들, '광산 함바' 앞서 눈물 흘리다(http://omn.kr/1lnzh)

지난 11월 4일, 일본강제동원 현장답사 둘쨋날. 우리 일행은 단바망간기념관 자료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뒤 곧장 그곳을 떠났다. 다음 일정은 교토부 마이즈루시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비 앞에서 거행되는 추도제에 참석하는 것. 우리 일행을 태운 전세 버스가 마이즈루시에 이르자 마치 호수 같은 잔잔한 바다가 불쑥 나타났다.

이곳 지형은 마치 복어 주둥이처럼 마이즈루만 어귀는 좁고 내해는 복어 배와 같이 넓었다. 버스의 차창으로 바깥을 바라보자 바닷가에 '해상자위대'란 글씨가 새겨진 건물이 눈에 띄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마이즈루는 우리나라 진해와 같은 군항으로 보였다. 천연 군항으로 지형이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둘러본 중국의 뤼순항, 극동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항도 꼭 이와 같은 지형이었다.
    
추도제 참배객들이 일본 마이즈루 만 현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추도제 참배객들이 일본 마이즈루 만 현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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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상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태평양전쟁 패전을 선언했다. 일본 아오모리현(靑森縣) 오미나토(大湊) 해군경비부는 8월 18일 상부로부터 특별지시를 받았다. 이는 오미나토 지구의 방공호, 지하창고, 비행장, 철도 건설 등에 강제 동원으로 일했던 수천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선으로 귀환시키라는 임무였다.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우키시마호에 승선하게 했다.

이 배의 승선자 수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한쪽은 4000여 명이라고, 다른 한쪽에서는 7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1만2000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그 혼란기에 정확한 숫자와 승선자 명단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45년 8월 21일, 우키시마호는 조선인 귀국자를 태우고 부산항을 목적지로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우키시마호는 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8월 24일 오후 5시께, 교토부 마이즈루만(舞鶴灣) 내해로 들어온 뒤 갑자기 원인 모를 폭발로 인해 순식간에 침몰했다. 이 폭침 사고로 승객 수천 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됐다.
 
우키시마 호가 침몰된 마이즈루 만 내해
 우키시마 호가 침몰된 마이즈루 만 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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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 신속한 구조와 생존자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일본 당국은 1주일이 지난 뒤에야 조선인 524명, 일본인 25명이 사망했다고 축소발표했다. 그후 이 시간을 흐지부지 처리했다. 그때 사고현장에서 인양된 사체는 인근 해안에 가매장됐다가 1950년과 1954년 선체 인양작업을 할 때 수습된 유해와 함께 화장돼 도쿄 유텐지(祐天寺)에 안장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고 원인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진상규명은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에 의한 폭발사고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일부 생존자 및 유가족 측은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동자의 생존 귀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고의로 폭침시켰다는 주장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3시, 우리 답사단 일행은 우키시마호 침몰현장과 가장 가까운 시모사바카(佐波賀) 언덕에 세워진 순난의 비 앞에 이르렀다. 행사 집행부에서는 그때까지도 추도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행사장 일대를 촬영한 다음, 현장을 일일이 취재수첩에 옮겨적었다.
 
우키시마호 순난의 비
 우키시마호 순난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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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루(浮島丸) 순난자의 비 건립에 즈음하여

1910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한일병합' 이후 36년에 걸친 조선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토지와 일터를 잃은 사람들이 급증하여 그 대부분은 일본으로 전 가족이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온 젊은이들이나 일가의 기둥인 부친이 잇달아 일본에 강제적으로 끌려와 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력으로 일본 각지에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전쟁에 졌다. 아오모리현(靑森縣) 오미나토(大湊) 구 해군시설 등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3735명(일본 정부 발표)은 강제 노동과 비인간적인 생활에서의 해방과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을 안고, 오미나토항에서 구 일본군 수송선 '우키마루호' (4730톤)에 승선해 8월 21일 오후 10시에 조선의 부산항을 향해서 출항, 귀국길에 올랐다.
 
 
원혼을 달래는 인간문화재 이우선 씨의 살풀이춤 공연
 원혼을 달래는 인간문화재 이우선 씨의 살풀이춤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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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요구에 따라 일본정부가 내린 명령으로, 우키시마호가 항로를 변경해 마이즈루 항구로 들어갔다. 그 직후인 8월 24일 오후 5시 30분경, 이곳 시모사바카 앞바다에서 갑자기 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둘로 갈라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현지 사람들의 필사적인 구조 활동에도 불구하고, 확인된 것만으로도 부인, 유아를 포함한 524명이 일본인 승무원 25명과 함께 그 고귀한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식민지지배와 강제연행만 없었더라면, 이와 같은 비참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산천과 잊을 수 없는 육친과의 재회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 직전 이국의 바다에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잃어버린 순난자(殉難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이 우키시마마루 사건을 '풍화(風化)'시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잊혀져서는 인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상·신조·종교의 차이를 초월한 인도적인 차원에 입각하여 추도비 건립운동을 추진시켜 폭넓은 부(府)·시민 여러분의 정재와 교토부 및 마이즈루시의 후원을 얻어 기념공원과 추도비를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비(碑)가 평화와 국제우호의 가교로서 뜻깊은 역할을 해내기를 바라면서.
1978년 8월 24일 우키시마마루 순난자의 비 건립실행위원회
1998년 일부 보정 우키시마마루 순난자 추도회
 
 
유족 김영채 씨가 분향, 헌주하고 있다.
 유족 김영채 씨가 분향, 헌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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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제라도 우키시마호 진상을 밝혀라

그리고 4일 오후 4시, 마침내 '우키시마호 침몰사건 한인 희생자 추도회'가 시작됐다(관련 기사 :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 75년전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한)

1시간 정도의 추도제가 끝나자 그새 날이 저물어 사방은 어둑해졌다. 숱한 원혼이 수장된 마이즈루 만 시모사바카 바다를 그대로 둔 채 추도제 참석자들은 교토의 숙소로 가고자 버스에 올랐다. 마침 옆자리에 유족 김진국씨가 앉게 돼 교토시에 이를 때까지 2시간가량 유족 처지에서 본 우키시마호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칠몰 74년 만에 사고 현장을 찾아온 우키시마 호 유족 일동
 칠몰 74년 만에 사고 현장을 찾아온 우키시마 호 유족 일동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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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 측은 '우키시마호가 미군이 설치해 놓은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족들은 그 주장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한다. 나도 기자의 눈으로, 작가의 처지로 볼 때, 일본 측 미군 기뢰 폭침설 주장은 그들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야비한 변명으로 보였다. 대부분 법률은 사고 책임과 보상문제에 천재지변과 전쟁에 의한 피해에 대해서는 면책권을 주고 있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 보는 까닭은 사고 당일인 1945년 8월 24일은 일본이 정식 항복하기 이전이다. 그때 미군은 미처 본토에 상륙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내가 미국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도쿄만 일본 항복사진의 촬영 날짜는 1945년 9월 2일 자였다. 이로 미뤄볼 때 미군의 일본 상륙은 그 하루이틀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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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부 일본 측 주장으로 미국 항공기가 기뢰를 투하했다거나 잠수함이 이를 설치했다는 기뢰 폭침설 주장도 언뜻 수긍하기 어렵다. 일본은 사고 후 책임자 처벌 및 보상 등 엄청난 비난과 후유증이 두려운 나머지 미군 기뢰 폭침으로 그 책임을 전가, 전쟁에 의한 불가피한 사건으로 덮으려는 음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기뢰 폭침설이 맞다면 그것은 미국이 설치한 기뢰에 의한 폭발이 아니라, 어쩌면 일본이 설치한 자기들의 기뢰에 의한 실수 또는 고의 폭침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일었다. 그곳은 바로 일본 군항이 있는 깊숙한 내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이런 추측이 따르기 마련이다. 당시 일본 최고위층에서는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상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진상을 사실대로 밝히면 더 이상의 추측은 사라질 것이다. 
   
일부 유족 측 주장은 한결같이 일본의 고의적인 폭침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고인이 된 그때 생존자들의 증언이라고 한다. 사고 그날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 내해에 이르자 본선에서 작은 구명정이 바다로 내려지고 20~30명의 일본인들이 화급히 하선해 본선을 떠난 뒤 곧장 배가 폭발해 두 동강 났다고 전한다. 이는 사전에 상부의 지시를 받은 상급자는 도망을 친 후 배가 폭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살아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것이 두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은 '그들의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불법적 행위가 만천하에 알려지고, 그런 일들이 전범 재판에  회부될 것으로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하지만 내가 하얼빈 731부대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난징 대학살사건의 진상을 기록으로 본 바, 일본인들의 잔인 무도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에게 인권은 없었다. 더욱이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그저 통나무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부 유족 측의 주장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교토 니조조(二條城) 앞 재일동포 식당에서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과 나란히 앉아 저녁밥을 같이 먹으면서 사제간 소주잔을 나눴다. 나는 그에게 소주잔을 건네면서 한 마디했다.

"자네가 억울한 동포들의 눈물 닦아주는 일을 꾸준히 하시게."

언제나 과묵한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민화협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이 유족들에게 눈물을 닦아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사하고 있다.
 민화협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이 유족들에게 눈물을 닦아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사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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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연재는 5회까지 이어집니다.


태그:#우키시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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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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