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왼쪽:이율)와 담이(오른쪽:박정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열이(왼쪽:이율)와 담이(오른쪽:박정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 랑

 
뮤지컬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에 유독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작품들이 있다. 처음 듣는 곡인데도 계속 생각나고 한 번 들었는데도 가사가 외워지는 그런 노래들. 얼마 전 보고 온 뮤지컬 <풍월주>의 노래들이 그랬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련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중독성 있는 넘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들을수록 참 좋은 노래들이다. 그런데 <풍월주>의 노래들은 곱씹을수록 참 좋은데 작품 내용은 곱씹을수록 아쉬운 점이 늘어난다.
 
<풍월주>의 배경은 신라 시대 남자 기생들이 모여 있던 '운루'다. 이들은 '바람과 달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풍월주'라고 불렸다. 운루에는 신분 높은 여자 귀족들이 찾아왔는데 그 중 신라의 진성여왕도 있었다. 진성여왕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풍월주 열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열이는 운루 제일가는 풍월주로 가무는 물론 훌륭한 말솜씨까지 지녔다. 그렇지만 열이는 여왕의 사랑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오랜 친구 담이만 바라봤다.
 
열이는 기생이었고 담이는 그의 몸종이자 운루에서 헤드렛일을 담당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겉모습만 봐서는 대체 누가 제일가는 풍월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의상이 허술하다. 투박한 디자인과 지나치게 수수한 옷 색깔은 매혹적인 열이의 춤선을 방해한다. 게다가 <풍월주>에 나오는 거의 의상들은 신라시대라는 설정에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에서나 입을 법한 재킷을 입는가 하면 가죽 의상까지 나와 몰입을 깬다.
 
이외에도 몰입을 방해한 장면들이 많다. 열이와 담이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만큼 애절한 사이다. 근데 작품 내내 이들의 관계가 우정인지 사랑인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나는 열이와 담이의 관계가 우정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무엇인지 보다도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토록 절절해졌는지가 궁금했다. 서로 눈물 쏟고 있는 결과만 있지 언제 처음 만났는지, 우정인지, 사랑인지, 가족애인지 등의 과정이 없다.
 
열, 담, 진성 세 사람 개인의 서사를 들여다봐도 비어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서사가 부실한 캐릭터는 담이다. 오죽하면 공연을 보는 동안 열이를 간절히 원하는 진성에게 마음이 쏠려 속으로 진성 여왕과 열이의 행복한 앞날을 응원했을 정도로 담이의 눈물은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담이가 열이를 바라보고 쫓아다니는 행동만 나올 뿐 그의 마음이 자라난 이유를 알지 못해 공감할 수 없었다. 
 
 열이를 바라보는 진성여왕. (김지현)

열이를 바라보는 진성여왕. (김지현) ⓒ 랑

  
여왕은 얼굴과 몸에 커다란 흉터가 있다. 지금은 천하를 쥐고 있는 왕일지 몰라도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큰 고난이 있었는지, 또 왕이 된 이후에도 혼자서 얼마나 큰 상처를 견디고 있는지 이 흉터를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이 흉터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만 있고 과정이 없는 <풍월주>의 문제점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흉터 때문에 아파하는 장면만 있을 뿐 왜 흉터가 생겼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운장의 느닷없는 사랑 이야기는 군더더기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운장은 오랜 세월 여왕을 곁에서 보필하면서 사랑을 키웠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본인 대신 여왕 옆에 열이를 세웠다. 사랑하는 진성의 오랜 소망인 임신을 위해서도 열이를 앞세웠다. 이렇게 갑자기 나오는 운장의 이야기에 놀랐다. 인물 한 명씩 각자의 사연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좋으나 주인공 열이와 담이의 서사도 부족해서 공감이 안 되는데 운장의 이야기가 구구절절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노골적인 대사들
 
기생들이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노골적인 대사들이 꽤 많았다. 열이와 여왕이 주고받는 대사나 운루를 찾는 여자들과 풍월주 사이에 오고 가는 이야기들이 그랬다. 재치 있는 농담식이 아니라 대부분 비유적으로 표현한 어휘들이었다. 수위가 불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놀랄 만은 했다.
 
더 불쾌한 부분은 이 대사들이 아니고 귀족 부인들이 '주령구 놀이'를 하는 장면이었다. 주령구 놀이는 지금 시대로 따지면 술게임인데 주사위를 던져 해당하는 벌칙을 수행하는 게임이다. 그런데 부인들은 기생도 아닌 담이를 강제로 데려와 몸을 만지려 하거나 강제로 술을 먹이려 하는 등 성희롱을 했다. 작품에서 꼭 있어야 할 중요 장면인지 의문이 들만큼 불쾌했다.
  
 뮤지컬 <풍월주>의 한 장면. (왼쪽:성두섭, 오른쪽:손유동)

뮤지컬 <풍월주>의 한 장면. (왼쪽:성두섭, 오른쪽:손유동) ⓒ 랑

  
아쉽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작품
 
<풍월주>는 이렇게 곱씹을수록 아쉬운 점이 많은 작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밉지 않은 작품이다. 비어있는 서사는 배우들의 열연과 아름다운 넘버로 채우고 있고 특유의 가슴 저린 분위기는 긴 여운을 남겼다.
 
'달의 남자'는 열이가 여왕 앞에서 춤을 추며 밤의 문을 여는 노래다. 운루에서 제일가는 풍월주라는 설정을 납득시킬 만큼 매력적이다. 왜 여왕이 열이에게 빠졌는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왕 앞에서 얌전한 듯하다가 돌변하는 모습이 좋았다. 이 장면은 열이 역할을 맡은 배우마다 조금씩 다르다. 열이의 춤이 구체적인 안무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몸짓이나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느낌을 준다.
 
이외에도 '너에게 가는 길' '너의 이유' '너를 위해 짓는 마음' 등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풍월주의 주제답게 슬프고 아픈 분위기의 좋은 넘버들이 많다.
  
 뮤지컬 <풍월주>의 마지막 장면

뮤지컬 <풍월주>의 마지막 장면 ⓒ 랑

  
여기에 달 모양의 무대가 합쳐지니 더욱 풍월주스러운 느낌이 풍긴다. 모든 인물들이 열정적인 사랑을 하지만 아프고 미련하고 슬픈 사랑이다. 이루어질 수 없고 방해받는 사랑이기에 눈물 난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에서 두 주인공 열이와 담이가 달 앞에 선다. 이미 관객들은 그들의 뒷모습만 봐도 열이와 담이가 흘리고 있는 눈물을 알기에 같이 슬퍼 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내가 <풍월주>에 여운을 느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풍월주>는 참 신기한 작품이다. 이때까지 공연을 보면서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었지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든 작품은 <풍월주>가 처음이다. 정말 잘 관람하고 왔지만 생각할수록 아쉬운 작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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