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하 기진모)은 일제로부터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들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일본인과 재일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 2018년 12월 14일 구미시 왕산기념관을 방문한 일본 기진모 사토선생 일행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하 기진모)은 일제로부터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들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일본인과 재일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 김도형

관련사진보기

  
2018년 12월 14일, 일본 역사학자인 사토 쇼진(77,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장) 선생과 재일교포 김정미 선생은 구미시 왕산기념관 관계자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을 만나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의 활동사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들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김창숙 전 도의원(장세용 구미시장 부인)이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추모하는 일본인, 사토 선생

당시 사토 선생 일행을 만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수익사업에 대해 물었는데, 사토 선생은 "일본의 시민단체는 관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결성한다"라는 말로 모임의 자긍심을 설명했다.

사토 선생은 해남도근현대사 연구차 한국 등 자료 조사로 나갈 때 자비로 다닌다고 이야기하면서 "왜? 우리가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시민단체활동을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김창숙 전 의원도 "제가 일본에 단을 꾸려가도 자신들이 식사와 호텔비를 계산하는 걸 본 적이 없다"라면서 기진모 모임과 대비되는 한국 시민단체의 활동을 지적하기도 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자주 초청하는 인사인 사토 선생 일행의 이번 한국 방문은 기슈광산 강제징용 희생 한국인 추모터를 경상북도에 기증하는 문제가 행정부(외교부-행정안전부)간 미루기로 잘 풀리지 못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경북에 알려진 기슈광산 강제징용 한국인들의 애환 

한편, 김창숙 전 의원은 지난 도의회 의정활동 시절 기슈광산 방문단을 꾸릴 때 군위와 안동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과 함께했다. 당시 새누리당 일색이었던 경북도의회에서 민주당 의원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이제는 많은 이가 도와준다고 한다. 김창숙 전 의원은 홍진규 전 경북도의원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기로 하고, 일본 기진모 회원들과 계속 교류를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진실규명의 발걸음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2012년 3월 9일 김창숙 의원 등 24명이 발의한 '기슈광산 강제동원 희생자 진실규명 촉구 결의안'은 행정보건복지위원회에 회부됐고 동년 3월 22일 제253회 경상북도의회 임시회 제3차 본회의에서 원안가결됐다.

김창숙 전 의원은 지난 2012년도에 기슈광산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일본 미에현 구마노시를 2회 방문했으며 기슈광산도 직접 탐방했다.

김 전 의원의 노력으로 채택된 '기슈광산 강제동원 희생자 진실규명 촉구 결의안'을 시작으로 경북도의회 차원에서 강제징용관련 진상규명 요구와 추모비 부지에 대한 과세철회 결의문을 미에현과 구마노시에 전달한 바 있다.

2015년 2월 26일 사토선생과 김정미 선행 일행은 '일제시대 기슈광산 한인 강제노역 희생자 추모터'에 대한 경북도 기부채납 추진사항 협의차 경북도의회를 방문했으며, 또 같은해 4월 기슈광산 현지 방문을 시작으로 11월 6일부터 9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경북도의회에서 미에현 구모노시에 소재한 일본 기슈광산 한국인 강제노역 희생자 추도집회에 참석해 희생자를 애도했다.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은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 있는 개항기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다. 왕산 허위 선생은 개항기 대표적인 의병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나라 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위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28일 기념관을 개관했다.
▲ 왕산허위선생과 기념촬영한 김창숙 전 경북도의원, 사토 선생, 김정미 선생, 홍진규 도의원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은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 있는 개항기 의병이자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다. 왕산 허위 선생은 개항기 대표적인 의병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나라 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위의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28일 기념관을 개관했다.
ⓒ 김도형

관련사진보기

  
이외에도 경북도의회에서는 해방 후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이 귀향하기 위해 집결한 장소인 신궁역과 신구 및 쿠마노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의 유골이 안치된 정천사 등 현장을 답사하고 관계자들과의 간담회를 가지기도 했다. 

당시 기슈광산 모임 관계자로부터 일본 미에현과 구마노시의 추모터에 대한 부당과세 철회소송 진행과정을 듣고, 경북도로부터 기부채납에 따른 부지 등기이전에 대한 계획 등 의견교환을 이뤄냈다.

일본 미에현 구마노시에 소재한 기슈광산은 이시하라산업(주)가 1934년부터 1978년까지 주로 총알 제조용 구리를 생산한 곳으로 이 광산에는 경상북도를 비롯해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1300여명이 강제 동원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35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며 경북도 내에는 군위군 32명과 안동시 30명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2월 일본에서는 역사학자와 사회단체 및 재일교포 등 300여 명으로 구성된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 결성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임은 1926년 1월 3일 일본 주민들이 기노모토정(현 구마노시)과 경찰의 관여하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종자 이기윤과 배상도를 무참히 학살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기노모토정의 사죄와 희생된 노동자에 대한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결성됐다.

이들의 꾸준한 활동으로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2009년 7월 희생자 추모비 건립 부지를 매입해 2010년 3월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하지만 추모비가 소재한 미에현과 구마노시에서는 2011년 3월 취득세 2만6300엔과 고정자산세 연 1만6200엔을 부과해, 이에 대해 모임에서는 추모비의 공공성 인정을 요구하면서 과세 철회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12월 1심 패소 후 항소해 동년 4월에 항소심 공판이 진행, 현재 대법원 계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0여명의 한국인이 강제징용된 일본의 구리광산
▲ 기슈광산 항공사진 1600여명의 한국인이 강제징용된 일본의 구리광산
ⓒ 김도형

관련사진보기

   
암흑으로 치닫는 갱도의 입구는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의 절망적인 심경을 느끼게 한다.
▲ 기슈광산 입구 암흑으로 치닫는 갱도의 입구는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의 절망적인 심경을 느끼게 한다.
ⓒ 김도형

관련사진보기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한국인보다 더 일본인들의 지난 과오에 대해 통렬히 성찰하고 반성함으로써 미래의 평화를 위한 진실한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 기슈광산 전경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한국인보다 더 일본인들의 지난 과오에 대해 통렬히 성찰하고 반성함으로써 미래의 평화를 위한 진실한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 김도형

관련사진보기

 

이 사안에 대해 일본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미에현  기슈광산에 끌려왔다가 사망한 영국군 포로 노동자에 대해서는 희생자 묘비와 추모비를 만들어 매년 위로행사까지 벌였다. 한국인 희생자의 대우와는 달랐다.

이에 대해 김창숙 전 의원은 결의안을 통해 "미에현과 구마노시에 대해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 건립부지에 대한 부당과세 즉각 철회"와 "한국인 희생자들에 대한 역사적 사죄와 보상을 할 수 있도록 법적, 행정적 방안을 신속히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이시하라산업(주)는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한국인들을 동원해 일본 미에현에서 기슈광산을 운영한 기업이다. 이 업체는 동남아시아와 사할린, 중국 하이난도 등지에서도 강제노역을 시키던 중 의문의 사망자 1000여 명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1993년 발행된 기와정사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구마노시의 기와정에는 영국군 전쟁포로 16명의 무덤이 기와정 지정문화재로 된 역사가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미에현과 구마노시에서는 기와정에 당시 기슈광산에 조선인이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것을 견문한 사람이 있으나, 기와정사를 비롯한 어디에도 조선인의 강제 동원 및 노역에 대한 사실은 기록돼 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인류사회에 있어 가장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에 대한 존엄과 이를 지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에 기슈광산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참고] 끊임없는 진실 추구,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의 활동 역사

아래는 기자가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의 활동일지가 기록된 일본 사이트를 찾아 번역한 내용의 일부다. 한국인들보다 더 의지를 갖고 일제시대의 잘못된 과거에 대해 바로잡으려고 하는 일본인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기주광산 강제연행자들의 고향으로>

미에 현 목본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상도) 추모비를 건립하는 모임이 처음으로 구마노 시에 인접한 기와마을의 옛 기슈 광산 터를 현지 조사한 것은 이기윤씨와 사상도 추모비를 제막한 1994년 11월 20일 이후 1995년 11월 18일 추모비 앞에서 추모집회를 연 지 하루 뒤였다.

다음 해(1996년) 여름, 미에현 목본으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상도)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은, 이시하라 산업 기주 광산이 미에현 내무부에 1946년 9월에 제출한 보고서의 복사를 입수했다.

다음은 미에 현 목본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 추모비를 건립하는 모임 회보 48호기주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회보 3호 합병호(2008년 2월 25일 발행)에 실린 기주 광산에 강제 연행된 사람들의 고향으로의 전문이다.

■ 1996년 10월 사토우마사토

이시하라 산업기슈 광산이 미에현 내무부에 1946년 9월에 제출한 보고서를 입수한 것은 1996년의 여름이었다.거기에는 기주광산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 738명의 이름과 본적지와 입소경로가 적혀 있었다.

그해 10월, 나는 그곳에 쓰여 있는 본적지를 근거로 남한 강원도 인제군의 5만분의 1 지도(6장)를 들고 인제읍 서화면 북면 기린면을 찾았다.

강원도로 출발하기 전 박경식 선생을 서울에서 만나 알아듣기 위한 방법과 내용을 상의했다.그것을 바탕으로 인제로 청취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듣기 항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징용 통지는 어디서 왔나.
- 징용 통보부터 출발까지 얼마나 시간이 있었나. 그 동안 무엇을 했다냐?
 2.인제부터 기주광산까지의 도정은?
-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연행했는가.
- 도중의 '처우'는?
3.기주 광산에서 무엇을 했는가.노동조건은? 임금은? 그 사용처는?
- 고향에 송금 왔니?
- 노무계의 태도는 어땠는가.폭력을 휘두른 적은 없었나.
4.개 숙소 명칭, 규모, 상태는?
- 식사의 질·내용은?
5. 숙소나 노동 현장의 구금도는?
- 관리체제의 실태는?
- 외출할 수 있었니?휴일에는 무엇을 했느냐?
6.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는?
- 인제 이외의 지역에서 강제 연행된 사람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었는가?
- 얼마나 기주광산에 있는지...?
- 영국인 포로를 만난 적이 있는가.
- 지역 일본인과의 접촉은?
- 일본인 노동자와의 관계는?
7 .사고는 경험하지 않았나.사망자 부상자는?
- 도망간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 도망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가.
8. 해방은 언제 알았나. 어떻게 알았느냐? 그때의 감상은?
9. 8.14 이후 귀국까지 무엇을 했는가. 8.14 이후 일본인들의 태도는?
10. 언제 귀국했는가.
- 귀국때 임금 귀국비용을 받았나? 귀국 경로는?
- 고향으로 돌아가서 우선 무엇을 했는가.

■ 강원도와 경북에서 기주광산으로 강제연행된 사람의 고향을 처음 찾은 1996년 10월 인제군 기린면사무소에서는 면장박선진 씨도 총무과 안호열 씨도 여러 직원이 문자 그대로 친밀감 속에 기주광산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의 소식을 물었다. 이때 인제군에서 20여명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김흥룡 김석환 정태순(기주 광산에서는 금라태순) 손옥현씨를 만날 수 있었다.

두 달 뒤인 1996년 12월 나는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동료들과 함께 강원도 정선군을 다녀온 뒤 이듬해인 1997년 5월 인제를 다시 방문하고 8월 강원도 평창군을 찾았다.

평창군에서도 진부면 봉평면 미탄면 도암면 등 면사무소에서 진지하게 조사해주는 직원, 부면장, 면장을 만났다.강원도회의원이었던 박동락은 마음을 다잡고 각 면의 노인모임에 온 삶을 안내하며 희귀한 만남을 주선했다.

이후 나는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의 동료들과 함께 1998년 6월 해남도에서 이시하라 산업이 자원을 빼앗아간 전독광산을 현지조사하고 8월 경북 안동과 군위로 기주광산으로 강제 연행된 사람들을 물었다.

그로부터 10년. 올해 2월 하순 나는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의 동료들과 강원도나 경북에 간다. 기주광산에 강제연행된 사람들을 재회하기 위하여

<기주광산에서 숨진 조선인 추모비 제막까지 도정 2>

2010년 03월 20일 |기주광산

◆ 기주광산에서 숨진 조선인 추모비 건립

2008년 8월 31일 기주 광산에서 숨진 조선인 추모비 건립회 창립집회(주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미에 현 본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미에 현 지방본부,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2008년 10월 16일 쿠마노시와의 이야기.쿠마노시측에서는, 하마구치 사회교육과장, 마츠오카 사회과장 보좌가 출석.
광산자료관 땅에 추모비를 짓기 어려울 경우 구마노시의 소유지인 기와 정 판자의 구선광산소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미 쿠마노시가 공원과 같이 하고 있는 토지)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을 검토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요청.하마구치 과장은, "검토한다"라고 회답.

2008년 10월 25일 성공회 평화학습위원회의 멤버가 기주 광산 "현지 조사".
이 날, 키와쵸의 "영국인 묘지"에서 15번째의 추도 집회가 행해졌다.
사전에 기주광산에서 조선인 추모비를 세우려는 운동을 알게 된 성공회가 그동안 기주광산에서 숨진 영국인 포로 추모식에 참석해 왔지만,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지 않았다는 반성 때문에 조사에 협조해 달라고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에 요청이 있었다.
2008년 11월 23일 제15회 기주 광산 "현지 조사".
2008년 11월 24일 조선인 강제연행 기주 광산터 조사 마이니치신문(미에구마노판).강제노동 실태조사 곰야광산터나 절 등 시찰 " "중일 신문"(기주판).

2009년 2월 15일 세 번째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미에현 지방본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미에현 본부, 기슈광산 진실을 밝히는 모임의 합동회의.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 쿠마노시와도 협상을 계속하고 독자적으로 추모비를 세울 방침을 제기. 결정.
2009년 3월 14일~15일 제16회 기주 광산 "현지 조사".
2009년 5월 27일 비 건립 예정지 구입 가계약. 7월 10일에 본계약.
2009년 7월 5일 다케모토 노보루,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삼중본부 주최 세미나에서 기주광산으로 조선인 강제연행 등에 취임하였다.

대서 보고

2009년 8월 11일 비 건립 예정지에 무궁화 등을 심고 기주 광산에서 숨진 조선인을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수공 작업을 시작하다.
2009년 8월 12일 희생자의 이름을 새기는 돌을 비 건립 예정지로 옮긴다.
2009년 9월 키와마치 중심부에 추도비를 건립하는 토지를 구입.
2009년 9월 6일 기주 광산에서 숨진 조선인 추모비 건립모임 제2회 집회.
2009년 9월 7일 '조선인 근로자 추모비 내년 3월 제막식 해일로 건립하는 모임' '이세신문' 추모비 제막
  내년 3월 기주 광산 ''조·일 신문'(미에판)
2009년 9월 11일 기주광산에서 숨진 조선인 추모비 건립회, 구마노시 시장, 구마노시 교육장에 인묘지에 영국병 유골은 묻혀 있는지 등 9개항의 질문.
2009년 9월 13일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미에본부 유지, "키모토 사건"·기슈 광산"현지 조사.
2009년 9월 30일 "강제 노동의 기억비에 기주 광산 동포·시민이 내년 봄 건립 미에현 쿠마노시", "민단신문".
2009년 10월 12일 비 건립 예정지에 식수. 추모비 원석 탐색.
2009년 10월 16일 쿠마노시에서, 다음과 같은 문서 회답.

"현재의 영국인 묘지는, 1981년경 기와쵸의 주민 쪽이 개인으로 이전한 사적이며, 1987년 이후 연 5월 30일자로 구키와쵸가 묘지를 포함 이시하라 산업주식회사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옛 키와쵸에서 돌아가신 16명의 영국인 포로분을 매장했던 자리에 있었던 영국병의 유골은 전후 요코하마시의 영연방묘지로 옮겨져 있어 현재의 영국인 무덤 땅에는 매장되어 있지 않습니다.또한, 1981년경 현재지로 이전할 때에 원래의 장소를 중기로 파헤치다 보니 항아리가 발견되고 안에 재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항아리를 깨뜨리고 현재의 영국인 묘지에 재를 묻었다고 들었습니다."

2009년 11월 1일, "조선인 희생자의 추도비를 구기주 광산에서 강제노동 관계자,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 내는"이세신문".
2009년 11월 22일 '기주광산의 역사전시 웅야조선인 추모비를 건립하는 모임' 요미우리신문(삼중판).
2009년 11월 23일 제17회 기주 광산 현지 조사.
  희생자의 이름을 새기는 돌을 비 건립 예정지로 옮긴다.키와쵸에서 추도비원석탐색
2009년 11월 26일 조선인 추모비 건립 준비 기주 광산에서 강제노동 끝에 사망 영국인과의 취급 차이는 차이별 기남신문.
2009년 12월 13일 오와시에서 추도 비원석 탐색.
2009년 12월 22일 키와쵸에서 추도비 원석 탐색.
2009년 12월 26일 "기주 광산에 조선인의 추도비 설치에 시민단체, 고절 13년"공동 통신사 전달.
2010년 1월 25일 추도비 원석 결정.
2010년 1월 29일~2월 5일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한국 강원도 인제·평창군, 경북 안동시로
2010년 2월 1일 쿠마노시 시장 및 교육장에게 구마노시가 영국병원의 유골이 매장되지 않은 현재의 영국인 묘지를 문화재로서 지정하고 있는 이유, 혹은 ''현재의 영국인 묘지'에 묻혀있다고 하는 '재'가 수병 유골 재인가 등, 쿠마노시 지정 문화재 "사적 영국인 묘지"와 관계되는 중대한 의문에 명쾌하게 대답할 것을 요구하는 재질문서를 2월 15일을 회답 기한으로 보낸다.
2010년 2월 2일 오후 9시가 넘은 안동 MBC TV 소식이 3월 28일 기주 광산에서 숨진 조선인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제막집회가 열리자,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회원들이 기주광산으로 강제 연행돼 사망했다.
천병대씨의 유족을 방문한 것 등을 보도.
2010년 2월 22일 재질문에 신속하게 회답할 것을 요구하는 문서를 쿠마노 시장과 교육장에게 보낸다.
2010년 2월 25일 추도비의 돌을, [추도의장]에 두어, 비문판의 크기와 위치를 결정. 참가자 전원이, 기주광산에서 죽지 마라.
조선인의 이름을 한 명씩 돌에 새긴다.추모비 건립선언 게시판 토대 설치
2010년 3월 1일 기주 광산에서 사망한 조선인을 추모하는 비문 결정.
2010년 3월 10일 추모비 건립 선언문 결정.
2010년 3월 20일 "추도의 장소", 정비.
2010년 3월 27일 "추도의 장소", 최종 정비.
2010년 3월 28일 기주 광산에서 숨진 조선인을 추모하는 비, 제막.

태그:#기슈광산, #기진모, #김창숙 결의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빨간이의 땅 경북 구미에 살고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우리네 일상을 기사화 시켜 도움을 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힘이 쏫는 72년 쥐띠인 결혼한 남자입니다. 토끼같은 아내와 통통튀는 귀여운 아들과 딸로 부터 늘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