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작품 포스터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작품 포스터 ⓒ 디오시네마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떠올린 건 롱테이크라는 단어였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자 정말로 33여 분의 롱테이크가 시작되었다. 이게 뭔가 싶어 낄낄대며 영화를 보다가, 꺼질 것 같지 않던 카메라가 꺼지고 새 국면이 시작되었다. 화면 위에 시간을 되돌리는 문구가 새겨졌고 영화의 시간은 되돌아간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방점은 그 뒷부분에 찍혀 있었다. 

'롱테이크'를 사용한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강박이 느껴진다. 바쟁이 말했듯 "현실의 고통스러움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건데, 이 영화도 그랬다. 영화 초반에 제시된 33분여의 롱테이크는 방송국의 하청에 거역하지 않으려는 한 감독의 투지 때문이었다. 방송국이 제시한 기획안은 너무나도 황당해 제안을 받았던 감독들이 모조리 거절했고, 그 덕에 이 보잘것없는 하류 감독에게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싸고 적당하게." 이 하류 감독이 내건 신조다. 아마도 그는 영화에는 손대지 않는 듯하다. TV 프로그램에 들어갈 재현 영상을 주로 찍는다. 그런데 이 감독에게 들어온 제안은 TV에서 생방송될 영화를 원테이크로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알고서 거절하려 한다. 그러나 무슨 사정인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생방송에 들어가자 감독은 자신이 하지 못했던 말을 한다. 주가가 높아 까다롭게 구는 남자 배우에게 "이러쿵저러쿵 토 달지 말라"며 화를 내고, 아이돌이기에 활동에 제약이 많은 여자배우에게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라"고 화를 낸다. 요컨대 그는 영화라는 조작된 현실을 전송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본심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현실은 중첩되어 있다.

좀비 영화를 찍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 마치 영화가 말하는 TV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한 장면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한 장면 ⓒ 디오시네마


어떻게든 본다

약 다섯 번에 걸쳐 액션을 외치는 영화 속 감독의 모습은 이것이 '영화를 찍는 영화'라고 말해준다. 이때 첫 번째 액션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액션은 영화가 끝날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시간이 되돌아가며 영화를 만들기 위한 메이킹 필름이 나타난다. 생방송이기에 철저하게 동선을 계산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롱테이크 한 편을 찍기 위한 고도의 노력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제작진들도 영화를 찍기 위해 여러 번의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좀비 영화를 찍고 있다. 감독은 진짜 연기를 보여 달라며 화를 낸다. 그리고 정말로 좀비가 등장한다. 좀비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던 감독이 튀어나와 "액션!"을 외친다. 이때 우리는 현실이 중첩되었음을 느낀다. 이것은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것이 영화 촬영임을 말하고 있다. 인물들은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단지 감독만이 이것이 연기인 것처럼 태연하다. 요컨대 그들은 카메라로 영화를 찍으면서 카메라로 비추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은 관음하고 관음된다. 

영화를 찍는 영화가 이곳에 있다. 이런 영화를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문법은 기존의 것과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단지 코미디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실수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이곳에 있다는 현장감이며 그래서 감독의 아내와 딸은 현장에서 즉시 투입될 수 있었고, 중단될 뻔했던 영화 리얼리즘의 현장은 지켜진다. 어떻게 해서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는 말은 아주 필사적이고, 관객의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든 '보는 행위'를 중단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언제 어디서나 영화는 존재해야 한다. 

왜 영화를 극장에서 보아야 하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어떻게든 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혹은 본다는 행위 자체가 시뮬라크르(복제) 속에서는 더 의의가 있는 게 아닌가.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어쩔 수 없으니 중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프로듀서의 말과 그럼에도 '이것을 진행하겠다'는 필사의 몸부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밖에 서서 지켜보는 방송국 간부가 있다.

그들의 카메라, 지켜본다는 리얼리즘의 환영은 세 갈래로 분할된다. '실수하는 것 또한 현장'이라는 프로듀서의 말. '콘티뉴이티'가 깨지기에 작품에 해가 된다는 배우의 말. '어찌 됐든 방송되었으니 그만'이라는 관계자의 말.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본다는 것이다.

백남준의 개념 미술처럼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마르셀 뒤샹의 그 유명한 작품을 떠올려 보자. 소변기에 사인을 해두고 작품이라고 우기는 행위. 그것을 작품으로 만든 건 사인을 한순간의 이데올로기이자, 그것이 미술관에 진입했다는 공간의 신호이다. 이 영화는 그 연장선에 있다.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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