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에르고 프록시>의 작품 포스터

애니메이션 <에르고 프록시>의 작품 포스터 ⓒ manglobe


<에르고 프록시>는 2006년에 제작된 일본의 애니메이션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애호가들 사이에서 명작 10선을 꼽을 때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이 손에 꼽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이유란 다음과 같다. '심오함'. 과연 어떤 심오함이길래 다들 이 작품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작품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제목에서부터 심오함이 잘 드러난다. 제목 에르고 프록시의 영문은 'Ergo Proxy'인데, 여기서 프록시는 단어 그대로 '대리인'을 뜻한다. 그리고 에르고란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원문에서 따온 것으로, 'Cogito, ergo sum'의 에르고다. 번역과 원문의 단어 배치는 동일하므로 에르고 프록시란 '그러므로 대리인'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무언가 이상하므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에르고와 비슷한 발음의 'Ego'를 상정하고 제목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에고(Ego)란 심리학에서 자아를 뜻하는 용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작품의 본의는 '자아 대리인'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작품을 보게 된다면 두 가지 의문을 가지고 시작하는 셈이다. 첫째는 '자아란 무엇인가? 이며 둘째는 '자아를 대리한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애니메이션 <에르고 프록시>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에르고 프록시>의 한 장면 ⓒ manglobe



[자아란 무엇인가?] 에르고 프록시가 찾아 떠나는 것

미래의 지구는 모종의 사건으로 생명이 살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사람들은 지구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인류가 우주에서 머무는 가운데, 지구에는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를 측정하도록 설계된 '돔'이 수백 개 세워진다. 각각의 돔에는 거주민과 '프록시'라는 개체가 있는데, 돔 내에서 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는 생명을 부여하지는 못해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힘이 무척 세며, 그가 없다면 돔은 필연적으로 무너진다. 어찌 됐든 인류가 떠난 후로 시간은 계속 흘렀고, 돔들의 대다수가 거주민이 죽거나 프록시가 사라지거나 하는 이유로 멸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릴 메이어'는 '롬드'라는 돔형 도시에서 시민정보국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롬드는 '인공지능 로봇' 기술이 발달된 돔이며, 그것을 통해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롬드에서는 일 인당 하나의 로봇을 할당하는 것으로 삶의 질과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 있는데, 그들은 각각 자아를 지니고 마치 비서처럼 주인을 섬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 전체에 '코기토 바이러스'라는 것이 돌게 되고, 그것에 감염된 로봇은 '로봇 3 원칙'을 무시하고 '사고'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방점이 사고에 찍힌 것은 '단지 인간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위협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흐름은 작품 전반에 걸친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작중 인물들은 코기토 바이러스를 제거해야 할, 인간에게 위협적인 무언가로 여긴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로봇들이 한결같이 인간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물들의 고정관념, '자아를 가진 로봇'은 위협적이다는 표지가 강화된다. 그러나 작중에는 '자아를 가졌음에도' 위협적이지 않은 로봇이 두 개 등장한다. 하나는 애완형 로봇 '피노'이고 다른 하나는 '릴 메이어'의 동반자 로봇 '이기'다.

피노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애완형 타입에 맞게 감정 표현에 능한 로봇이다. 작품 후반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그런 감정 표현은 사실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코기토 바이러스'로 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어떤 생각에 마주하게 된다. 그동안의 보았던 '감염된 로봇'은 무척 '난폭'했었는데 피노는 그렇지 않다. 피노와 다른 로봇의 차이란, 기계처럼 생긴 타 로봇과 달리 피노는 '사람처럼' 생겼다는 점이다. 그것은 애완용 로봇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어쩌면 인간처럼 생겼다는 것이 그들의 인격을 결정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람처럼, 그러니까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라면 자아가 있어도 위협적이지 않은 걸까? 아이의 순수함이 그대로 발현되었기에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 아이의 자아는 순수했고 '로봇 3원칙'에 억압받던 그들의 의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로봇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로봇의 두뇌는 이성적 사고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억압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 '화'라는 사실, 그러니까 '감정'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과 로봇을 판가름하는 것은 '감정'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이성적 '판단'과는 달리 감성은 뇌 내 화학물질의 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철학의 분과로 넘어가면 무척 복잡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만이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된다. 작품에서는 그것이 '있었다'의 과거형으로 변했고, 로봇과 인간의 차이가 없어지는 시점이 온다. 그것은 곧 이 작품이 '자아'를 묻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작중에 릴 메이어의 동반자 로봇인 이기는 피노로부터 코기토 바이러스에 감염되게 된다. 그리고 그도 다른 감염 로봇들처럼 릴 메이어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그런데 이기는 감염된 상황에서도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러니까 '폭력적인 성향'이 있기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확실한데, 감염되었음에도 자신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떠나온 곳, 안전한 롬드로의 귀환, 그런데 그것은 자아를 가진 상태이기에 주인이 어찌돼든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냥 그 자리에 버려두고 혼자만 귀환해도 될 일이다.

주인공 릴 메이어가 그에 대해 이유를 묻자, 이기는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로 '너'를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주인공 릴 메이어가 '지킨다'라는 것은 로봇의 특징인데, 너는 지금 로봇이 아님(감염)에도 나를 지키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기의 대답, 그 성격은 네가 설정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방점은 '자신의 의지'이거나 '너'이다. 전자에서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고 있고, 후자에서 그 인식의 대상이 '인간과 동일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코기토 바이러스가 로봇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로 인해 깨어난 '주체성'이 그들을 봉기하게 했던 것이다.

피노는 로봇이 자아를 가지는 것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 로봇이 사람 같을 수 있다는 것, 언어가 인격을 결정할 수 있는지. 등과 같은 물음을 던지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기는 피노처럼 릴 메이어의 옆에 있는 캐릭터이고, 작품은 두 로봇이 서로 대비됨을 강조한다. 사람의 외모와 아닌 외모, 어른과 어린아이, 애완용과 사무용, 이방인과 내부인. 우리는 그 두 가지 로봇에게 일종의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조건 없는 복종이라는 점에서 흡사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의 설정은, 어쩌면 주체성 없이 살아가는 저 로봇들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상사에게, 선생님에게, 그 외 기타 권력(권위)에게 복종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릴 메이어를 향한 이기의 답변은 우리의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이 틀림없다. 당신이 명령해서, 원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잠시 인물의 이름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피노의 이름은 피노키오의 그것에서 따왔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인형이 사람이 되려 하는 이야기다. 결국 위에서 던져진 물음은 피노키오의 그것처럼 '사람 되기' 혹은 '자아 찾기'로 귀결됨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의 차용은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위에서 언급한 '코기토 바이러스'와 '에르고 프록시' 말고도, 주인공의 친한 동료 이름이 '데달스'라는 것이나 그의 조수가 '들뢰즈', '가타리'라는 것. 그 이외에 수도 없이 많은 인용이 작중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분명 우리의 지식에 한계는 있고 그 모든 인용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인용을 모두 작품의 서사와 연관 짓기엔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진행과 큰 연관이 있는 것만을 골라내면 될 것이다.

 애니메이션 <에르고 프록시>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에르고 프록시>의 한 장면 ⓒ manglobe



[자아를 대리한다] 에르고 프록시가 해야만 하는 것

작품에는 분리된 것들이 나온다. 사회와의 분리, 부모와의 분리, 지구로부터의 분리, 그 외 기타. 그 분열은 사회적인 맥락에서부터 심리적인 것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 릴 메이어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빈센트 로우'는 타 돔에서 유입된 이민자다. 그는 이민자라는 이유로 국가권력에 쫓기고, 쫓겨나고, 이에 도피하듯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에르고 프록시'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분리된 두 인격으로 갈등하게 된다. 이때 작중에 나오는 한 등장인물의 동반자 로봇의 이름, '크리스티바'는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는 듯 보인다. 우리는 크리스티바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경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논고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불가리아의 출신의 철학자로, 저서 <공포의 권력>에서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을 주창한다. 그 개념을 말하자면 길지만 요약은 간단하다.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분리되는 순간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머리카락은 우리 몸의 일부지만 빠지는 순간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보통 주체성에 대한 논고에서 언급되는바, 에르고 프록시에 이 철학자가 언급된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은 아닐 테다. 위에서 말했듯 이 작품에는 분리, 분열을 겪는 인물이 많이 나온다. 우선 빈센트 로우에게 이 개념을 대입해볼 경우, 롬드라는 사회에서 분리된 이민자라는 설정은 아브젝시옹의 개념에 들어맞는다. 빈센트 로우가 돔에서 쫓겨나 마주한 '돔 바깥의 부랑민'들의 모습도 그러하다.

그 부랑민들은 분명 그곳에 있지만 사실상 없는 취급을 받는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고 자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젝시옹이 말하는 바이며, 작품의 주제인 '자아 찾기'도 그러하다. 위에서 우리가 알아본 것은 로봇의 주체성 대한 논의였지만 그것을 사람에게로 옮겨보자. 우리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 이른바 '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나'의 이면엔 '나이고 싶지 않은 나'도 있을 것이다.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없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찌 됐든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그 모습이 우리 어딘가에 버려져 있다. 마치 바닥에 널린 머리카락을 찾기 위해선 눈을 부릅떠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더는 글을 파고 들어갈 필요가 없어진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은 '아브젝시옹'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인용된 철학자의 교집합을 만든다면 세세한 논박이 오갈 수 있겠으나, 거시적인 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어찌 됐든 작품을 관람할 때 그것을 염두에 둔다면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철없고 딱딱한 성격의 '릴 메이어'는 작품이 진행되며 조금은 유해지고, 추악한 과거를 잊으려 '빈센트 로우'라는 가상 인격으로 살아가던 에르고 프록시는 끝내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고민도 찾아낼 수 있다. 에르고 프록시는 '자아 대리인'이지만, 그의 고민은 단지 그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갈팡질팡하는 발걸음, 방황하는 현대사, 단지 인물에만 국한되지 않을 고민이다. 이를 테면, 법에서는 '법인'에게도 사람의 권한을 부여하고는 한다. 법의 이름으로 가상의 단체에 '자연인'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러한 주체성으로 한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 그것은 단지 그때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이 고전의 참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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