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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김정민으로 태어난 한경진씨는 어머니가 셋이다.

그가 태어나고 두 해가 지났을 때, 마을과 가까운 큰 저수지에서 고기를 낚다 아버지가 탄 배가 뒤집혔다. 아버지는 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에겐 누나가 둘이 있었고 형이 하나 있었다. 먹고 살 방편을 찾기 위해 어머니는 큰 누나와 형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다. 경진씨와 작은 누나는 읍내에 있는 외삼촌 댁에 맡겨졌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외삼촌 댁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젊어 과부가 된 딸의 자식 둘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들 밑에 딸려 있었다. 그로부터 한 해가 지나갈 무렵 외삼촌댁으로 굿하러 온 점쟁이가 경진씨를 입양 보내라 했다. 모두에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외할머니는 믿었다.

아버지가 탄 배가 뒤집어졌다. 아버지는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버지가 탄 배가 뒤집어졌다. 아버지는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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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부대 맞벌이 부부에게 입양되다

명절 때나 겨우 얼굴을 비치는 어머니에게 연락할 길은 없었다. 어머니도 알지 못한 채 경진씨는 점쟁이가 연결해 준 경기도 송탄(지금의 평택)의 어느 집으로 입양 보내졌다. 경진씨 나이 네 살이었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김정민으로 태어났던 그가 경기도 송탄으로 와서 한경진이 되었다. 부안에 있는 그의 호적은 그대로 남겨졌다.

양부모는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는 맞벌이 부부였다. 어머니는 부대 병원에서 청소를 했고 아버지는 비행장에서 일했다. 둘에게 낳은 자식이 없었고 오래 전 고아원에서 입양한 딸이 하나 있었다. 경진씨가 갔을 때 누나는 중학생이었다. 네 살이었던 경진씨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다. 송탄의 양부모와 누나 그리고 함께 살던 할머니와 삼촌을 너무 당연하게 피를 나눈 가족으로 알고 지냈다.

그가 다섯 살 때, 부안 어머니가 외삼촌과 함께 택시를 타고 송탄으로 왔다. 한 손에 콜라를 들고 그를 불렀지만 사람들이 낯설었던 그는 콜라만 빼앗고는 도망을 쳐버렸다. 어머니를 만난 양어머니는 눈물을 쏟으면서 간곡하게 호소했다. 잘 키우겠다고, 정말 잘 키워서 성인이 되면 그 때 모든 사실을 알리고 당신에게 보내겠다고. 같은 자리에 마주 않은 두 어머니는 서로 다른 눈물을 쏟아냈다.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눈물과 아들을 찾으려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양어머니의 호소와 눈물이 통했는지 여전히 삶을 아득하게 만드는 지독한 가난이 힘겨웠는지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정민씨를 경진씨로 양어머니 품에 남겨두고 발길을 돌렸다. 경진씨가 어머니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십 오년 후인 스무 살 때였다.

경진씨는 맞벌이하는 양부모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아버지는 말이 없고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부안 어머니에게 약속했던 그대로 경진씨를 잘 키우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그 덕에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그랬다.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경진씨를 불렀다. 집에 큰 일이 생겼으니 어서 가보라고 했다. 한 달 전 자궁암으로 입원한 어머니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직감이 왔다. 바닥에서 요동치는 마음을 달래며 달려갔다. 도착한 집 대문에 상중(喪中)을 알리는 조등(弔燈)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성인이 될 때까지 경진씨를 잘 키우겠다는 부안 어머니와의 약속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다.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 슬픔이 컸다. 크고 깊어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일 년 후 아버지가 재혼했다. 경진씨 입양을 주선했던 무당할머니가 이번에는 아버지 중매를 섰다. 나중에 안 사실은 새어머니에게 결혼을 하면 경진씨를 부안 생모에게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성사 된 결혼이었다. 불행의 전조였다. 집에 들어오기 전 새어머니가 집에 몇 번 방문을 했다. 그 땐 달콤한 케이크도 사오고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젊고 예뻐서 싫지는 않았다.

전 남편으로부터 낳은 아들과 함께 집에 들어 온 새어머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무서운 사람으로 변했다. 집을 나가 살 테니 방을 얻어 달라는 누나와 아버지 명의로 되어있는 물려받은 땅의 일부를 삼촌에게 돌려주고 싶은 할머니의 요구를 새어머니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병원비를 핑계로 거절했다. 셋은 매일 싸웠지만 아버지는 방관했다. 대학생이던 누나와 할머니는 따로 방을 얻어 나갔고 삼촌도 변두리 월세 방으로 쫓겨나듯 나가야 했다.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잠깐 사이 일곱이 살던 큰 집에 넷이 남았다.

경진씨는 삼촌이 쓰던 외딴 방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생활하게 되었다. 혼자 잠을 자는 것도 항상 어른들과 함께 같은 이불을 썼던 열두 살 경진씨에겐 두려운 일이었다. 삼촌 방에서는 실내에 있는 화장실을 쓰지 못하고 바깥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밤엔 무서워 밖에 나가지 못하고 그릇 같은 곳에 소변을 봤다. 새어머니에겐 폭력을 행사할 만한 충분한 이유였다.

처음에는 머리를 때리다가 뺨을 후려치게 되었고, 일찍 출근한 아버지가 없는 사이 아침잠을 깨울 때는 발로 머리를 찼다.

새어머니의 폭력,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새어머니의 폭력은 갈수록 횟수가 잦아졌고 수위가 높아졌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두려움 때문에 발걸음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새어머니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동네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서 퇴근하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그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심한 추궁이 뒤따랐다. 아버지는 경진씨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늦게 들어 온 사실만을 심하게 나무랐다. 새어머니가 들어오고 경진씨와 아버지와의 사이도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며칠 후 또 아버지 퇴근시간을 놓치는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의 추궁과 어머니의 폭력이 두려워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날 경진씨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생애 첫 가출이었다.

트럭 밑에서 잠을 잤다. 무서워서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낮 시간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밥을 챙겨 먹고 나왔다. 그러다 밤이 되면 다시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장차 닥칠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당장 폭력이 없는 홀가분함이 마음속에서 오락가락했다.

낮에 거리를 배회하다 집을 뛰쳐나온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다 파출소에 잡혀갔다. 집을 나와 이틀 만인지 삼일 만인지 기억이 희미하다. 부모님 손에 끌려 집에 들어서자 새어머니는 따귀를 올려붙였고 아버지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폭력을 휘두르며 던진 새어머니의 말이었다.

"야! 너 말이야. 너를 낳은 니네 엄마 살아 있으니까 이제 그만 엄마 찾아가서 살아라."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화가 나서 하는 말로 생각했다. 하지만 폭력이 멈추고 저녁을 먹고 앉은 방 안에서 진지하게 새어머니는 다시 그 말을 꺼냈다. 무당할머니가 새어머니의 결혼 조건으로 경진씨를 생모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생모도 경진씨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생모 찾아가 살라 했다.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새어머니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았다. 지금껏 친아버지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그 순간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가출이 일상화 되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음 붙일 데가 없었다. 거리에만 서면 무겁고 두렵기만 했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루 이틀로만 그쳤던 가출이 한번 시작되면 일주일을 넘기기 시작했다. 집으로 끌려 들어가면 다시 폭력이 되풀이 되고 다시 가출을 일삼는 게 반복되었다. 아버지는 가끔 만나는 경진씨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그마나 남아있던 양아들에 대한 정을 내비치곤 했다.

그러는 와중에 새어머니가 임신을 했고 딸을 낳았다. 아버지에게 평생의 한이었던 자기 자식이었다. 그것도 끔찍하게 예쁘고 귀한 딸이었다.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따라 교회까지 따라 나서게 된 것도 그 딸을 얻고 난 후였다. 아버지가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해 경진씨에겐 집에 더 이상 정을 붙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경진씨는 집에 있는 시간이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열아홉, 양아버지가 죽고 양어머니와의 인연이 끝났다. 다음 해 십 오년 만에 생모와 만났다.
 열아홉, 양아버지가 죽고 양어머니와의 인연이 끝났다. 다음 해 십 오년 만에 생모와 만났다.
ⓒ 한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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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한 어느 날 무작정 버스를 타고 가다 내린 곳이 수원역이었다. 지하도에서 박카스 통을 놓고 앵벌이를 하던 또래 아이를 알게 되었다. 구걸을 하고 잠은 역 대합실에 잤다.

한 날 체형이 뚱뚱하고 몸에 문신을 한 젊은 형이 잠을 깨워 돈 벌고 싶으면 따라오라고 했다. 도착한 곳은 용인이었다. 군청 앞에서 구둣방을 하던 형이었다. 군청에서 구두를 찍어 오는 찍새가 되었다.

오래 있진 못했다. 군청에 들어가서 찍어 온 구두가 다 비슷한 모양새라 어디 사무실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 때마다 형에게 맞았다. 구두 굽을 갈 때 쓰는 나무로도 맞고 슬리퍼로도 맞았다. 수원역으로 도망을 쳤다가 이번에는 다른 어른에게 잡혀갔다.

사당동에 있는 가정집이었다. 집 대문간에 '00일보 사랑의 집' 이라는 간판이 달린 집이었다. 방마다 아이들이 가득했다. 거실까지 칼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온몸에 문신을 한 형들이 아이들을 관리했다.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신문을 들고 나가 좌석버스를 타고 신문을 팔았다.

일간지는 이백 원, 스포츠 신문은 오백 원이었다. 저녁 석간신문까지 팔아야 구천 원 입금액을 맞추고 돈을 남길 수 있었다. 많을 때는 이천 원, 적을 때는 천 원을 벌었다. 입금액을 못 맞추면 돈을 채워 넣어야 했다.

말썽을 피우거나 말을 안 듣는 아이들에겐 자비 없는 폭력이 뒤따랐다. 아이를 집어 올려 방바닥에 내던지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누구도 무서워서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속버스 터미널 상가 후미진 곳 신문팔이들이 모이는 아지트에서 한 아이와 주먹질을 하며 싸웠다. 신문도 팔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그날 맞춰야 할 입금액은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싸우고 나서 친해진 그 아이가 자기를 따라오라 했다. 영등포로 데려간 그 아이가 슈퍼에 들어가 이백 원짜리 초콜릿 세 개를 사가지고 나오더니 가까운 호프집에 들어가서는 이천 원을 벌어서 나왔다. 신기하고 놀라웠다.

하루를 꼬박 신문을 팔아야 벌 수 있는 돈을 잠깐 사이에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곤 그 날부터 사랑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경진씨는 그 길로 껌팔이에 나섰다. 주로 남자 손님과 함께 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가 '누나 초콜릿 하나만 팔아주세요'라고 조르면 대개는 오백 원이나 천 원짜리를 쥐여주었다. 

괜찮은 돈벌이였다. 밥은 식당에서 따뜻하게 먹고, 잠은 24시간 사우나에서 편하게 잤다. 옷은 남대문시장 아동복 가게에서 사 입고 입던 옷은 버렸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던 어느 날 늦은 밤까지 껌을 팔다 경찰에게 잡혀 파출소로 끌려갔다. 인적사항을 묻는 질문에 고아라고 대답했더니 시립아동보호소로 보냈다. 그 곳에서 다시 묻는 같은 질문에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송탄에서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올라왔고 집으로 함께 내려갔다.

내내 가출상태였다가 육학년을 십오일 다니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경진씨를 대하는 새어머니의 태도가 순해졌다. 그도 마음을 새로 잡고 학교를 충실히 다녔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시간이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나이는 한 살 많지만 한 학년 아래인 초등학교 육학년 혼혈아와 싸움이 벌어졌다.

미군부대 술집에서 일 하는 아이 엄마가 경진씨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집과 학교를 물었다. 덜컥 겁을 집어먹은 경진씨는 과거 새어머니의 폭력이 떠올랐고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학교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경진씨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퇴학이 되었다.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까지 거리와 유흥업소를 떠돌았다.
 십대에서 이십대 초반까지 거리와 유흥업소를 떠돌았다.
ⓒ 한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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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거리생활

거리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껌팔이를 할 수 없을 만큼 키가 커버렸을 때 다른 작은 아이들에게 구역을 나눠주고 구역을 지켜주는 대가로 돈을 상납 받았다. 그러다 파출소에 잡혀가고 아동보호소에 인계되기를 여러 차례 겪다가 갱생원에까지 가게 되었다.

갱생원은 아파트처럼 생긴 여러 동의 건물 안에 어린 아이들부터 노숙자에 치매 걸린 노인들까지 두루 끌려와 사는 집단 수용시설이었다. 종교재단이 운영했지만 관리자와 먼저 들어 온 형들의 구타가 매일 벌어졌다. 팬티도 다 찢어진 걸 입어야했고 잔뜩 눌린 칫솔을 썼다. 하루 종일 봉투를 접는 일은 이미 세상을 많이 알아 버린 열네 살 소년이 하기에는 너무 따분했다. 감옥과 다름 없는 갱생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갱생원에 들어간 지 삼 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몇 명이서 돌을 넣은 자루로 담벼락을 쳐서 며칠 만에 금이 가게 해 놓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쳤던 돌자루에 담벼락이 무너졌다. 무작정 큰길로 뛰어가 버스를 탔다. 서울로 가야 했다. 가서 자유로운 거리의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양아버지가 죽었을 때 경진씨 나이 열아홉 이었다. 껌팔이는 열일곱에 그만 두고 서울에서 레스토랑에 잠깐 있다 친구의 권유로 송탄으로 내려와 룸살롱 웨이터로 근무할 때였다. 같은 송탄에 살아도 새어머니가 있는 집과는 연락을 끊고 살았다. 밖에 나가서는 싸움도 많이 하고 돈도 뺏으며 살았지만 새어머니를 떠올리면 경진씨는 숨이 멎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동네 후배가 업소로 찾아와 아버지 소식을 알렸다. 집으로 달려갔지만 새어머니가 앞을 막아섰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느냐는 한 마디 말에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도 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업소로 돌아왔다.

보름쯤 지난 후 새어머니는 업소로 찾아와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빚을 장황하게 늘어놓다 보험금 수령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 달라 했다. 왜 그의 도장이어야 하는 지 어떤 보험인지 묻지도 않고 도장을 찍어줬다. 도장이 찍힌 서류를 서둘러 챙기고 업소 문을 나간 새어머니는 그 후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새어머니와의 인연은 그게 끝이었다.

양아버지 죽음을 알렸던 후배가 얼마 후 다시 업소 문을 열었다. 생모인 부안어머니가 경진씨를 찾는다는 소식과 함께 전화번호를 가지고 왔다. 양어머니는 죽고 새어머니와는 인연이 악연으로 끝난 후였지만 전화선을 타고 오는 목소리로는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송탄으로 누나 둘과 함께 찾아 왔다.

직접 마주쳤지만 여전히 그를 낳은 어머니와 그와 피를 나눈 누나들 모습이 현실 같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울고 또 울었다. 철석같이 잘 사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 땐 너무 가난해서 낳은 자식처럼 키우겠다는 양어머니의 진심어린 설득에 굴복했노라 말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키워내지 못한 막내아들에 미안해서 울고 양어머니의 죽음과 새어머니의 폭력을 알지 못하고 막지 못해서 울었다.

경진씨가 송탄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스물세 살 무렵이었다. IMF 가 터지자 룸살롱은 폭풍을 맞았다. 하루 이십만 원은 기본으로 찍던 수입이 하루 이만 원으로 줄어들었다. 친구 따라 전라도 광주에 있는 호텔룸살롱으로 갔지만 수입은 마찬가지였다. 택시 자격증을 따서 택시 회사에 들어갔다. 운전을 좋아해서 택시운전사가 꿈이었다.

택시 일은 그러나 꿈처럼 되지 않았다. 택시 밖에선 훤히 보이던 길도 택시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잘 익혀두었다고 생각했던 길은 묻지 않고 손님들은 전혀 모르는 동네와 아파트 이름을 대며 가자했다. 생각처럼 돈도 되지 않았다. 육 개월 만에 그만 두었다.

광주가 경진씨에게 특별한 이유가 하나 있다. 업소생활을 할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목포에서 가출한 열일곱 소녀였다. 그에겐 너무 예쁜. 아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동거를 시작했다.

앵벌이 찍새 껌팔이를 거쳐 룸살롱 웨이터로 일했다.
 앵벌이 찍새 껌팔이를 거쳐 룸살롱 웨이터로 일했다.
ⓒ 한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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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건축 일에 뛰어든 경진씨

경진씨가 건축 일에 뛰어든 건 스무 살에 새로 찾은 가족이 있어 가능했다. 매형이 하는 작은 건설회사에 들어가 일을 거들라는 어머니의 권유가 있었다. 매형은 큰 건설회사 임원 출신이 하는 종합건설사의 하청 일을 주로 맡아 했다. 경진씨는 현장에서 자재와 공종별 인건비를 정리하고 결산하는 일을 했다.

적정 이익을 보장할 수 없는 최저낙찰제 방식의 건설현장에서 하청업체의 생존은 자재와 인건비 절감만이 답이었다. 경진씨가 하는 일은 매형 회사의 생존이 걸려 있었다. 복잡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민감했고 그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3년을 일했다. 일하는 동안 작은 건설회사들이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어 일억 원은 받아야 조금이라도 이익이 날 수 있는 공사를 최저낙찰제로 경쟁을 붙이면 육천 칠천에도 짓겠다는 업체가 붙는다. 큰 회사는 이걸 무기로 정보를 흘리고 그 중 가장 만만한 업체에 공사를 준다.

이미 쥐어짜고 남은 돈으로 공사를 맡은 업체는 이 현장에서 돈을 받아 저 현장 인건비를 주는 식으로 위험한 줄타기를 한다. 그러다 한 발만 헛디디면 헛방에 덜어져 버린다. 하청을 끝으로 이미 상당한 이익을 챙긴 큰 건설회사에 떨어지는 불이익은 미미하다.

하청구조의 가장 말단에서 위태롭게 줄을 타야 했던 경진씨는 스스로 줄에서 내려와 버렸다. 차라리 몸을 써서 일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내와 함께 서울 이문동에 반 지하 방을 얻고 철근 일을 따라나섰다. 전철도 안 다니는 시간에 일어나 새벽거리로 나서 버스를 타고 현장을 다녔다. 매형 회사 일을 하면서 목수, 콘크리트 타설, 전기, 설비 등 건축 관련 분야별 일을 다 알았지만 그 중 철근 일이 가장 편해 보였다. 이십대 후반이었다.

철근 일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휘청거리는 기다란 철근을 몇 묶음씩 어깨에 들고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뛰어 다니다 보면 온 몸에 쇠가 박히는 아픔이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매형 밑에서도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았지만 일당 쟁이 철근공의 수입이 더 많았다. 그래서 좋았고 스트레스 없는 육체노동이라서 더 좋았다.

문제라면 임금체불이었다. 돈이 정기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한두 달 밀리는 건 예사였고 석 달을 넘어갈 때도 많았다. 명목임금은 삼백만 원 가까이 되었지만 체불 때문에 살림은 허덕였다. 둘만 살다 첫 아들이 태어나고 양육비가 한참 필요하던 시기였다.

첫 오야지 밑에서 4, 5년을 버티며 일을 하다가 팀을 짜서 '빵뛰기'에 나섰다. 일당을 받는 게 아니라 평당 단가를 책정해서 일한 물량에 따라 돈을 지급 받는 방식이었다. 시간에 맞게 일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정해진 물량을 채우면 되는 방식이라 몸이 혹사당한다는 생각에 앞서 돈이 먼저 눈에 보였다. 여름 한낮에는 달구어진 건물 안 콘크리트와 기름칠 된 거푸집에서 나오는 복사열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었다.

한 달에 500-600만 원을 벌었다. 현장이 주로 지방에 있어 숙소와 생활비를 빼고 아내에게는 사오백만 원을 보내줬다. 적지 않은 돈이었고 다른 일로는 벌 수 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계속 집 밖을 떠돌아야 했다. 집에 들어가면 아들은 경진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엄마 뒤에 숨었다. 그 때마다 마음이 찌르는 듯 아팠다.

병원 분만실에서 아들의 탯줄을 직접 자를 때 경진씨 삶에 처음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엄마 뒤에 숨어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품에 안겨 재롱을 떨었고 돈 벌러 나서는 문 앞에선 가지 말라고 악을 쓰며 울었다.

올해 9살인 그 아들이 그런데 머리에 문제가 있다. ADHD 판정을 받았다. 전두엽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분노조절 장애가 있어 학교에서 종종 전화가 걸려오고 모르는 학부모가 없다. 아내는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직 아들에 매달려 있다. 게다가 지금은 늦둥이로 낳아 8개월 된 딸도 있다. 어떻게든 외지를 떠돌지 않으면서 철근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했다.

게다가 현장도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한 때 중국 노동자들이 철근 일에 몰려들어 일당이 한동안 오르지 못하고 정체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물밀 듯 밀려와서 싼 일당으로 현장을 덮어가고 있었다. '빵뛰기'도 단가는 그대로인데 공사물량은 많아지는 현상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십대 후반에 철근공이 되어 아직도 철근공이다. 그리고 계속 철근공으로 늙어가고 싶다.
 이십대 후반에 철근공이 되어 아직도 철근공이다. 그리고 계속 철근공으로 늙어가고 싶다.
ⓒ 한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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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은 철근 일을 하는 색다른 팀을 현장에서 보았다. 똑같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의 일 하는 모습이나 표정에서 그동안 보아왔던 노가다 하는 사람들과는 결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노동조합 팀이라며 자랑을 했다. 건설사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체불도 없고, 근무시간도 정확하다는 것 등을 말하고 있었지만 경진씨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은 조합 팀은 한 지역에서만 일을 하고 다른 지역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중학교 중퇴 학력에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의 이력이라곤 앵벌이, 껌팔이, 유흥업소 삐끼에 룸살롱 웨이터였던 경진씨는 노동조합이라고 하면 그저 유력 방송사에서 말하는 떼쓰고, 데모만 하는 빨갱이들이 떠올랐다. 경진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진짜 간첩으로 믿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딱 하나 타지를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 하나가 경진씨 귀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경진씨로서는 아이와 가족들이 무엇보다 소중했고 그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어떤 것도 감수할 그런 마음이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까지 하면서 경진씨는 건설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조합 철근팀에 합류했다. 5년 전 일이다. 당시 서른여섯이었다.

2017년 경진씨는 지금 일당 20만 원을 받고 원하던 대로 타지를 떠돌지 않고 매달 350만 원에서 400만 원 정도를 아내에게 갖다 준다. 건설사를 상대로 권리를 찾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자존감도 생겼다.

이렇게 숨김없이 자신의 지나 온 삶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매일 닥치는 하루 하루의 삶을 경진씨 자신의 삶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간첩이었다는 말을 헛웃음으로 넘길 만큼은 세상을 알고 있다. 

그는 일 년 전 선거를 통해 지부 분회장에 당선되었고 지부에서 가장 나이 어린 분회장이 되었다.

'빵뛰기'로 객지를 떠돌면서 밤낮없이 일만 할 때는 생각도 사치였던 삶이 현실이 되었다. 노가다나 하던 자신이 노동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항상 옆에 가까이 두고 싶었던 가족들이 있어 가능했다. 그리고 처음 경진씨를 세상 속으로 내보냈던 지금의 어머니가 있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헤어졌다 지독하게 힘든 시절 구원의 손을 내밀었던 바로 그 어머니가 말이다.

철근공 한경진씨는 지금 부안군 상서면에서 태어난 김정민으로 다시 살고 있고 철근공 김정민으로 늙어갈 생각이다. 그리고...

13년 만에 올린 결혼식
 13년 만에 올린 결혼식
ⓒ 한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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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7일 김정민씨는 아내와 동거를 시작하고 13년 만에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거기 말썽꾸러기 아들과 늦둥이 딸이 행복한 걸음을 함께 해주었음은 물론이다.


태그:#건설노동자, #노가다,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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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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