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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에 근무하던 시절
▲ 마동욱 소방서에 근무하던 시절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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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 시험에 합격했다

두 사람은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여자 집안에서는 남자가 직장 없이 공부만 한다는 말을 듣고 반대가 심했다.

1985년 즈음, 변변한 직업이 없던 마동욱은 앞날이 걱정돼 장흥 고향으로 잠깐 내려갔다. 고향에서 쉬고 있던 한 친구가 마동욱에게 앞날을 걱정했다. 마동욱은 친구에게 소방관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친구는 마동욱 권유대로 소방관 시험에 응시했다.

마동욱도 그 시험을 보고 싶었지만 몸무게가 미달이었다. 신체검사 합격선이 57킬로그램이었는데 그는 52킬로밖에 나가지 않았다. 마동욱은 영등포시장으로 가서 3킬로그램 쇠말뚝 두 개를 샀다.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할 때 종아리에 그 쇠말뚝을 붕대로 감고 몸무게를 쟀다. 58킬로그램으로 합격하고는 시험장으로 갔다. 거기서 그 친구를 만났다.

"너무 창피했다. 하하하."

그 친구한테 화장실에서 그 말뚝을 보여 줬더니 친구가 폭소를 터뜨렸다.

시험은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1986년 10월에 서울중부소방서로 발령을 받았다. 이곳에서도 마동욱의 성실성은 동료, 상관들에게 인정받았다. 그이가 근무하는 날이면 화장실도 깨끗했다. 소방서 서장은 그런 마동욱을 눈여겨봤다.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간호사였던 애인과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채 1988년부터 동거하기 시작했다.

마동욱은 그때부터 사진에 취미가 붙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소방서 홍보는 전무했다. 그는 소방서 행사 때나, 화재 현장에서도 틈틈이 사진을 찍어 소방대원들의 활약상을 홍보했다.

서장은 그런 마동욱을 더욱 신뢰했다. 마동욱은 고향 근처로 내려가고 싶어 광주소방서로 발령 신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8년 광주로 내려왔다. 그는 광주에서 장흥을 오가며 고향 마을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경 마동욱을 신뢰했던 서장은 뇌출혈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마동욱은 의식이 없는 서장을 서장의 부인과 함께 한 달간 병수발을 했다. 마동욱은 소방서로 복귀를 했지만 그 다음해인 2월에 사표를 썼다. 나중에 완치돼 내려온 서장이 그 사실을 알고는 너무 아쉽다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간호사였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 마동욱 간호사였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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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욱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아내에게 말하고 서울 신림동 고시원에서 공부를 했다. 마지막으로 7급 교정직 시험을 봤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내 인생에서 공부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다시는 공부를 안 하겠다고 결심했다."

두 달 동안 사진 이론 공부를 하다

마동욱은 사진을 좀 더 공부하고 싶어 강남 현대사진학원에서 두 달 동안 사진 이론 공부를 했다. 충무로에서 모델 사진 찍어 주는 일을 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무슨 사진을 찍어도 고향 마을 사진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동욱은 1992년 4월 장흥군 장흥문화원에서 '내가 돌아본 고향 마을' 사진전을 처음 열었다. 고향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전시회를 이주일 동안 연장했다. 1992년 7월에는 부천구청 홍보관을 빌려서 서울과 경기도에 살고 있는 고향분들을 위해 두 번째 개인 사진전을 열었다.

"그때 연합뉴스에서 인터뷰를 해서 기사가 나갔다. 그 기사를 보고 여기 저기 인터뷰 요청이 와서 안 나온 신문이 없다. 전라도 장흥인데 경기도 장흥이라고, 여기는 여기대로 난리가 났다. 스타가 됐다. 자고 나면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사진은 팔리지 않았다. 홍보관을 빚내서 빌렸는데 쫄딱 망했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던 친구와 함께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대형스튜디오인 스타사진방을 동업으로 시작했다. 나름 이름도 알려지고 웨딩사진을 찍으면 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마동욱은 스튜디오 영업에 실패를 하고 다시 고향 장흥에 매달렸다. 

"사라지고 있는 농촌마을을 기록해 놓으면 언젠가는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사진 전시하면 향우들이 사진 사 줄 거다, 제 고향인데 왜 안 사 주겠냐, 열심히 찍었다."

이 아름다운 풍광이 물에 잠겼다
▲ 유치면 덕산리 이 아름다운 풍광이 물에 잠겼다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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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정부는 자연의 보고와 역사의 현장을 묻어 버리는 장흥군 유치면 탐진강 수몰 계획을 발표한다. 마동욱은 1998년 서울에 살던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귀촌한다. 그리고 수몰 지역 일대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수몰 소식을 들었을 때 자연의 보고 같은 청정 자연을 기록으로라도 남겨 후손에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경향신문에 나온 기사
▲ 사라질 내 고향 경향신문에 나온 기사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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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욱은 2미터짜리 사다리 세 개를 조립해 6미터 사다리를 만들어 차에 싣고 다니면서 마을 사진을 날마다 찍었다. 수몰 지역인 유치면이 현대사의 가장 아픈 사연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것을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며 알게 되었다.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빨치산들이 먼저 들어와 해방구가 되었던 곳이 유치면이었다. 낮에는 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번갈아 상주했다. 결국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마을 스무여 곳이 농가가 몇 채 안 남고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이 되었던 1953년 즈음,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치면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동욱은 유치면뿐만 아니라 고향의 모든 마을을 사진에 담았다. 백로와 왜가리가 한가로이 거닐고 수달이 헤엄치는 고향 탐진강변을 담았다.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있었다. 한마디로 생태계의 보고였다.

하류에는 천연기념물 258호인 무태장어가 살아 있고 송사리, 피라미, 칼납자루, 버들매치, 각시붕어 등 토종 물고기들이 남아 있는 청정지대였다.

마동욱은 마을 역사의 현장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탐진강 일대는 전봉준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동학혁명의 마지막 전투장인 장흥읍의 석대들 현장이다. 3천여 명의 농민군이 마지막으로 일본군들에게 사살되었던 곳이다.

마동욱은 장흥군 유치면 탐진댐 수몰지의 사진들을 모아 <아! 물에 잠길 내고향>(호영, 1997)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마을사진작가'라는 닉네임을 부여받았다.

사진만 찍고 먹고 살 수는 없어 분식점을 내다

사진만 찍고 먹고살 수는 없었다. 마동욱은 장흥군청 앞에 '빛 그리고 그림자'라는 분식점을 냈다. 식당 이름까지 지어 준 소설가 한승원 등 둘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빚을 내야 할 판이었는데 당시 주민등록 갱신을 할 때라 주민들 주민등록 사진을 찍어 조금 도움이 됐다.

얼마 뒤부터 수몰 공사가 시작됐다. 마동욱은 걸핏하면 수몰 지역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니 배달이 잘 될 리 없었다. 아내는 그런 마동욱에게 수없이 말했다.

"여보, 이젠 제발 정신을 차리고 배달이나 열심히 하면 안 될까? 당신은 어떻게 일 년에 한 번씩 큰 사고를 쳐."

그런 중에도 마동욱은 돈키호테 같은 계획을 실행한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북 화해 무드가 무르익어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기로 했다. 마동욱은 목포에서 런던까지 육로로 가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경의선 복원'과 '통일'을 기원하는 뜻으로 목포에서 임진각까지는 철로 길을 걸어서 가기로 했다. 예언가처럼 김대중 대통령이 경의선 복원을 이야기할 거라는 마동욱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철도청 관계자는, 며칠 뒤 김대중 대통령이 경의선을 복원한다는 말을 듣고 결국 마동욱이 철로 길을 가는 계획에 승인을 해준다.

마동욱은 2000년 가을부터 시인 이대흠과 한 달 동안 문산까지 걸었다. 중간 중간에 다른 언론사들이 합류할 때도 있었다.

"철도청에서 승인해 줄 때 철도 시간표만 주고 가라고 했다. 위험한 때도 있었다. 다섯 명이 좁은 터널을 걸어가는데 열차가 들어왔다. 기겁을 했다. 다행히 터널 안에 설치된 대피소로 피해 겨우 살았다. 알고 보니 기차 시간표에 나와 있지 않은 화물열차였다."

광주 MBC 방송팀이 합류해 방송도 나갔다. 그때부터 철도청에서는 구간마다 보선팀을 붙여 줘 안내를 했다. 찌는 듯한 폭염과 때때로 내리는 비 때문에 녹초가 되는 날이 이어졌다. 사타구니가 헤지고 발가락 여기저기에 물집들이 터지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울역을 들어서니까 환영 인파가 모여 있었다.

이들은 다시 임진각까지 철도 길을 걸었다.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경의선 철도가 복원됐지만 분단선을 넘어 신의주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 성과물이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글 이대흠·사진 마동욱, 다지리, 2000)라는 책이다.

마동욱과 이대흠을 기다리는 임진각
▲ 임진각 마동욱과 이대흠을 기다리는 임진각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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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에 도착하는 마동욱과 이대흠
▲ 임진각 임진각에 도착하는 마동욱과 이대흠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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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욱은 가고 싶다. 막힌 임진각에서
▲ 철마는 달리고 싶다 마동욱은 가고 싶다. 막힌 임진각에서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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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마동욱, #장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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