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중세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콜마르(Colmar) 구시가의 골목길은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구시가의 중심인 생 마르탱 성당(Collégiale St-Martin)을 둘러보고, 살구 빛 석재가 곡선을 그리는 아치형 통로의 건물을 통과했다. 그곳에는 콜마르의 또 다른 골목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작은 마르샹 거리(Rue Des Marchands) 양 옆으로는 가게와 식당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많은 여행객들로 활기차 있었다.

이 마르샹 거리에서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콜마르에서 놓치면 안 되는 한 박물관이었다. 그 박물관은 바로 바르톨디 박물관(Musée Bartholdi). 관광도시 콜마르에는 유명 관광지마다 번호를 매겨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로 설명을 적어둔 안내판이 있는데, 마르샹 거리에도 콜마르 시의 공식 관광안내판이 서 있었다. 이 마르샹 거리의 관광 안내판에 자유의 여신상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바르톨디 박물관을 찾을 수 있었다. 바르톨디 박물관을 상징하는 작품이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콜마르의 위대한 건축가인 바르톨디의 작품들을 모은 박물관이다.
▲ 바르톨디 박물관. 프랑스 콜마르의 위대한 건축가인 바르톨디의 작품들을 모은 박물관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Frédéric Auguste Bartholdi)는 콜마르가 낳은 천재 조각가이자 건축가이고, 이 바르톨디의 대표작이 뉴욕 입구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다. 바르톨디는 콜마르의 부잣집에서 1834년에 막내로 태어났는데, 바르톨디가 태어나 살던 저택을 개조하여 1922년에 전시공간으로 박물관이 문을 열게 되었다.

이 바르톨디 박물관에 대한 콜마르 시민들의 자부심은 아주 대단하다. 그리고 이 박물관은 특히 프랑스 다른 대도시를 여행하면서 그의 조각상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의미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바르톨디 박물관은 콜마르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

박물관의 좁은 입구를 통과하니 박물관 건물 앞에 꽤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바르톨디가 어렸을 때 뛰어 놀던 저택의 정원이 이제 박물관 마당이 되어 있었다. 그 박물관 마당에 많은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햇빛은 위대한 예술가가 태어난 것이 수긍이 갈 정도로 풍부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각상의 세 사람은 정의, 애국, 노동을 표현하고 있다.
▲ 지구를 떠받치는 위대한 사람들. 조각상의 세 사람은 정의, 애국, 노동을 표현하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박물관 마당 중앙에서 구를 떠받치고 있는 청동조각상이 시선을 잡아 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 작품도 바르톨디가 남긴 멋진 조각 작품이다. 파리의 살롱에 전시되어 있던 이 작품의 제목은 '지구를 떠받치는 위대한 사람들'이다. 지구를 받들고 있는 세 사람의 조각상은 각각 저울, 칼과 방패, 망치를 가지고 있는데, 정의, 애국, 노동을 삼위일체로 표현하고 있다. 바르톨디 마음 속의 사상과 영혼을 한껏 머금은 훌륭한 작품이다.

나는 바르톨디 박물관 곳곳에 남아있는 그의 작품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해 노력했다. 박물관 내부뿐만 아니라 박물관 건물에도 바르톨디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는 르네상스 양식의 정문도 19세기 후반에 바르톨디가 직접 디자인한 구상작품이다.

박물관 정문의 기둥 위를 자세히 보면 3마리의 동물이 장식되어 있는데, 가운데 조각상은 양(羊)의 모습을 한 사람으로, 사람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동물은 사자의 모습을 한 천사로 표현되어 있다. 고개를 중앙으로 돌린 사자의 호위를 받으며 양이 익살맞은 표정으로 문 위에 걸터앉은 모습이 여행자를 웃음짓게 한다.

나는 박물관 데스크에서 입장권을 사면서 박물관 직원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바르톨디 작품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바르톨디의 명작 목록 같은 것이 있나요? 자유의 여신상은 알아요."
"여기 있어요. 이게 바르톨디의 명작을 간단하게 정리한 인쇄물이에요. 바르톨디 박물관뿐만 아니라 콜마르 시내에 있는 바르톨디의 작품들도 정리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 박물관이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았다가 오후에 다시 문을 연답니다. 점심 시간 전에 박물관 내부를 모두 보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꽤 큰 박물관인데 직원들 점심을 위해 점심시간에는 잠시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직원들의 근무여건을 우선 고려하는 참으로 프랑스다운 박물관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시간상으로는 오전시간에도 박물관 내부는 모두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직원은 한 작품 한 작품 차분히 감상하는 그들의 작품 감상시간을 기준으로 나에게 시간이 부족할지 모른다고 한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작품 감상을 시작했다.

나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서 나무 난간의 계단을 올라갔다. 박물관 내부는 그라운드 층을 포함하여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박물관 내부에는 19세기의 대표적인 구상 조각가 바르톨디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파리의 바르톨디 아틀리에에 있던 자유의 여신상 스케치와 조각상, 건축물 설계도, 그림, 판화 등이다.

모두 그가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남긴 유품들이다. 바르톨디가 죽은 후 그의 미망인이 1907년 이 저택을 콜마르 시에 기증하게 되었는데 바르톨디의 유작을 일반에게 공개해 달라고 유언하면서 일반인들도 그의 훌륭한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박물관의 초상화 방에는 온통 중국 청화백자가 장식되어 있다.
▲ 바르톨디 가문의 초상화 전시실. 박물관의 초상화 방에는 온통 중국 청화백자가 장식되어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박물관 1층에는 바르톨디 가문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는 방이 있는데 초상화보다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은 방의 천장과 벽면을 도배하다시피 장식하고 있는 중국의 청화백자들이다. 동양에 비해 도자기의 발달이 늦었던 서양인들은 이렇게 한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동양의 도자기를 사랑했다. 특히 바르톨디가 이토록 중국 도자기들을 모은 것은 동방의 문물을 사랑했던 그의 면모 때문이었다.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니 바르톨디는 이집트의 조각상들을 매우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바르톨디는 1855년에 친구들과 이집트를 여행한 이후 이집트의 문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주로 조각과 건축에 흥미를 가졌던 바르톨디는 이집트 여행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조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원래 회화를 전공했던 그는 이집트의 사막에 거대하게 들어선 스핑크스를 보면서 결국 조각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기념상 조각은 특이할 정도로 거대한 작품이 많다.

박물관 1층에는 바르톨디가 제작한 공공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매우 인상적인 전시실이 있었다. 그 중 프랑스 국민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은 바르톨디가 1880년에 제작한 '벨포르의 사자(Lion of Belfort)' 조각상이다. 바르톨디가 프랑스의 국민조각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뛰어난 조각상, '벨포르의 사자'를 통해서였다.

바르톨디는 이 벨포르의 사자를 통해 프랑스의 국민적인 건축가가 되었다.
▲ 벨포르 사자상. 바르톨디는 이 벨포르의 사자를 통해 프랑스의 국민적인 건축가가 되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이 작품은 바르톨디가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랑스의 패배에 자극을 받아 만든 작품이었다. 벨포르의 사자상은 프랑스군이 백일 넘는 전투를 통해 사수한 벨포르의 요새 아래에 세워진 조각상이다. 당시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이 프로이센 군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연전 연패하던 상황에서 벨포르 만이 항전을 통해 도시를 지켜냈다.

벨포르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바르톨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벨포르 사자상은 바르톨디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바르톨디의 벨포르 사자상은 프랑스인들에게 듬뿍 사랑을 받고 있다. 왜 프랑스인들은 벨포르의 사자를 그토록 좋아하고 있을까? 벨포르는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저항'과 '독립'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바르톨디가 조각한 벨포르의 수호동물, 사자는 프랑스 인들이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가치를 웅변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전시실에 전시된 여러 벨포르 사자상을 보니 그가 이 사자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느껴진다. 그가 만든 사자만도 수십 마리에 달하고 기단 위에 앉은 사자상만도 여러 점이다. 사자의 크기도 다양하고 사자의 얼굴표정도 서로 다르며, 사자의 자세도 모두 다르니 바르톨디가 벨포르의 사자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그대로 전해진다. 결국 바르톨디는 앞발을 들고 일어서는 자세의 사자를 벨포르의 사자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그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이 사자상이고 이제 이 사자상은 벨포르의 상징이 되었다.

바르톨디의 작품 중에는 거대한 조각상들이 많은데, 벨포르 사자상 옆에도 바르톨디가 조각한 '르 막티어 모덴느(Le Martyr Moderne)' 조각상이 사람들을 압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순교자라는 의미의 이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손이 묶인 채 괴로워하고 있다.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순교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고 있다.

부당한 압제에 견디는 프로메테우스의 고결한 신념을 형상화하고 있다.
▲ 순교자상. 부당한 압제에 견디는 프로메테우스의 고결한 신념을 형상화하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제우스가 반역자를 알려주면 쇠사슬을 풀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을 하였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이를 거절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참혹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있다. 바르톨디는 이 '순교자'를 통해 부당한 압제에 견디는 고결한 신념을 형상화하고 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표정과 그의 뒤틀린 근육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칼을 힘껏 치켜들고 말을 탄 채 질주하는 석상은 프랑스 민족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Vercingétorix)다. 그의 말발굽 아래에는 갈리아를 침공하다가 전사한 로마군의 시체가 누워있다. 이 동상은 옛 프랑스의 갈리아 부족과 로마군 간에 혈투가 벌어졌던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에 세워진 작품으로 이 역시 바르톨디의 작품역사에 명작으로 남아 있다.

민족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를 침공한 로마군을 무찌르고 있다.
▲ 베르킨게토릭스. 민족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를 침공한 로마군을 무찌르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의 한 부족장이었다. 기원전 52년 갈리아 부족을 모아 총 궐기에 들어간 베르킨게토릭스는 천연의 요새에서 항전하며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로마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는 결국 카이사르와의 끈질긴 공방전 끝에 패배하고 로마의 포로가 된 후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는 19세기 유럽에 몰아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바르톨디의 손 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에 대항한 민족의 영웅으로서 전투를 치르는 동상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바르톨디는 19세기의 복잡다단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프랑스의 시대사상을 반영한 조각상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대단히 정적인 우리나라의 동상을 보다가 역동적인 전투의 현장에 들어선 듯 한 베르킨게토릭스상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그들의 시대가 직접 느껴지는 것만 같다.

리용(Lyon) 시청사 앞 테로 광장(Place des Terreaux)에 있는 '바르톨디의 분수대'도 바르톨디의 작품이다. 커다란 바르톨디 분수대의 마차를 모는 인물상 아래에는 마치 마차에 몸이 박힌 듯한 4마리의 말이 지금 뛰쳐나가려는 듯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 말 한 마리의 머리 부분이 바르톨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리용 바르톨디 분수대의 마차를 모는 말머리 상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분수대의 마두상. 리용 바르톨디 분수대의 마차를 모는 말머리 상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바르톨디 박물관에 전시된 이 한 마리 말은 코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란 눈을 하고 있고, 말 머리에 드러난 핏줄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이 말은 무언가에 놀라 빨리 뛰쳐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이 역동적이다. 분수대의 4마리 말은 프랑스의 4대강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 말머리는 어떤 강을 상징하는지 궁금하다. 바르톨디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자신의 조국 프랑스를 사랑했던 그의 마음이 절절이 느껴진다.

이렇듯 콜마르는 물론이고 프랑스 다른 도시의 중심광장에서 품격 있는 분수나 역동적인 조각상을 만난다면 일단 바르톨디의 작품이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정도이다. 프랑스 인근 유럽국가나 미국에서도 프랑스의 위대한 조각가 바르톨디가 남긴 수많은 역작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바르톨디의 명작 가운데 정말 유명한 작품을 하나만 꼽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다.

바르톨디 박물관에는 이 자유의 여신상 전시실이 따로 있고, 자유의 여신상을 운반한 선박 모형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바르톨디는 1875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었는데, 잘 보이지도 않는 여신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최선을 다해 만들었고, 흘러내리는 옷자락, 여신의 섬세한 발가락까지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다. 잠시 프랑스에 서 있던 자유의 여신상은 1885년에 분해되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이송되어 뉴욕에서 다시 조립되었다. 미국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이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한 것이다.

바르톨디 박물관에 전시된 여러 자유의 여신상 습작을 보니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자유의 여신은 오른손에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빛'인 횃불을 들고 있고, 왼손에 미국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는데, 자유의 여신이 이 자세로 완성되기 위해 실로 다양한 자세를 구상해보고 엄청난 양의 습작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바르톨디가 자유의 여신상 제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 자유의 여신상 습작. 바르톨디가 자유의 여신상 제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박물관 전시관 안에 있는 여러 자유의 여신 습작은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도 다르고, 옷과 횃불의 모양도 다르고, 머리장식도 모두 다르다. 심지어 초기의 습작을 보면 횃불을 들고 있는 신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기까지 하다. 자유의 여신상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르톨디는 천재 조각가로 불리지만 이 천재는 다른 조각가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한 노력형 천재였던 것이다.

전시실을 한 칸 더 들어가니 인물 좋은 바르톨디의 초상화와 함께 바르톨디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의 얼굴이 바로 자유의 여신상의 여신 얼굴과 아주 닮아 있다. 이는 실제로 바르톨디 어머니의 얼굴이 '자유의 여신상' 얼굴의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모델이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바르톨디는 어머니를 닮은 모델을 구하게 되었고, 결국 어머니를 닮은 모델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마침내 어머니를 닮은 아내의 얼굴을 보고 자유의 여신상을 완성하였다.

바르톨디는 이 지구촌에서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가장 크게 만든 사람이다. '자유'를 여성에 비유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설계하고자 고심했던 그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여성,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자유의 여신상 설계를 했다. 바르톨디 어머니의 얼굴을 닮은 자유의 여신을 보고 수많은 미국의 이민자들이 꿈을 키우고 있으니 바르톨디의 어머니는 꿈에라도 이런 현실을 상상해 보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자유의 여신상 관람을 마지막으로 보람찬 바르톨디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콜마르 시내로 나섰다. 나는 박물관 안내 데스크에서 받은 바르톨디의 작품목록을 다시 꺼내 들었다. 나는 콜마르 시내를 더 돌아다니며 바르톨디의 작품을 찾아보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 느껴보기로 했다.

콜마르의 수많은 가게에는 자유의 여신상 장식들이 바르톨디의 유산으로 남아있었다. 이 자유의 여신상 기념품을 제외하고라도 콜마르 구시가를 여행하다 보면 바르톨디가 그의 고향에 남긴 아홉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시내 곳곳에 남은 바르톨디의 작품들을 숨바꼭질 하듯이 찾아 다녔다. 나는 콜마르 시내에서 품격 있는 분수대나 유명인의 조각상을 만난다면 필히 바르톨디의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드디어 쁘띠 베니스(Petite Venise) 옆의 작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서 바르톨디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바르톨디가 콜마르에 살던 1888년에 제작한 로젤만 분수(La Fontaine Roesselmann)이다.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에 방패를 잡은 장 로젤만(Jean Roesselmann)은 조용한 듯 하면서도 결의에 찬 모습으로 서 있다. 13세기 콜마르에서 짐승 가죽을 다듬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장 로젤만은 콜마르의 독립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와의 전투에서 콜마르 시민군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로젤만은 콜마르의 독립을 위해 콜마르 시민군을 이끌었던 영웅이다.
▲ 로젤만 상. 로젤만은 콜마르의 독립을 위해 콜마르 시민군을 이끌었던 영웅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로젤만은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용맹했던 그는 아직도 콜마르 인들에게 영웅으로 남아있다. 바르톨디는 고향의 영웅 로젤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로젤만 분수대를 조각한 것이다. 프랑스 프러시아 전쟁 당시 콜마르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가 싸웠던 바르톨디는 고향의 영웅인 로젤만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20세기의 전장을 경험한 바르톨디는 '자유'를 갈망했고 결국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자유의 여신상 건립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바르톨디가 고향의 선배에게 바친 작은 분수대는 오늘도 알자스의 햇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었다.

나는 또 걸었다. 나는 콜마르의 구시가를 걷다가 운하 옆 광장에 위치한 또 다른 분수대를 발견했다. 이번에 만난 분수대는 슈웬디 분수(La Fontaine Schwendi). 분수대 설명을 읽어보니 여지없이 바르톨디의 작품으로 1896년에 만들어졌다. 슈웬디 분수 위에 우뚝 서 있는 라자르 드 슈웬디(Lazare de Schwendi) 장군은 16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장군으로서 헝가리에서 터키군의 공격을 막은 장군이다.

슈웬디 장군이 헝가리에서 가져온 포도나무 가지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 슈웬디 분수. 슈웬디 장군이 헝가리에서 가져온 포도나무 가지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이 슈웬디 장군이 콜마르 인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그가 치른 전투가 위대했다기보다 그가 가져온 포도가 콜마르의 역사를 바꿨기 때문이다. 슈웬디 장군이 번쩍 쳐들고 있는 오른손을 자세히 보면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데 손에 들려있는 것은 바로 포도나무 가지이다.

이 동상은 슈웬디 장군이 터키군과 전투를 치르던 헝가리 지역의 포도나무 종자를 콜마르로 들여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그 후 콜마르는 오랜 기간 동안 와인의 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바르톨디가 세운 조각상들은 하나하나가 이렇게 모두 콜마르의 다양한 스토리 텔링을 담고 있었다.

나는 계속 바르톨디의 작품을 숨바꼭질 하듯이 찾아 나서다가 구시가의 한 레스토랑에서 다리를 쉬며 콜마르의 와인을 마셨다. 나는 오늘 바르톨디의 작품을 보며 콜마르의 역사를 배우고 콜마르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르톨디가 그의 인생역정을 통해 갈구했던 '자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음미해 보게 되었다. '자유'란 무엇인가?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 편이 있습니다.



태그:#프랑스, #프랑스 여행, #콜마르, #바르톨디, #자유의 여신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