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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km, 채 50리도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차로 달리면 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 둘레의 성 안에 별별 게 다 있습니다. 국보도 있고, 보물도 있고, 유적들도 있고 600년 역사를 품은 사연들도 수두룩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수도 족히 수백만 명은 넘을 겁니다.

우리나라 성인들 중 이곳을 한 번도 둘러보지 않았거나,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든 보고, 어떻게든 듣고, 어떻게든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보고 제대로 새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온전히 다 둘러본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겁니다. 이것저것, 이곳저곳을 봤다 하더라도 제대로 봐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 역시 많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18.6km는 한양도성 길이이고, 600년 서울 역사를 품고 있는 이곳은 한양도성입니다.

역사로 살피고 고고학으로 새긴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 지은이 신희권 / 펴낸 곳 북촌 / 2016년 12월 20일 / 값 23,000원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 지은이 신희권 / 펴낸 곳 북촌 / 2016년 12월 20일 / 값 23,000원
ⓒ 북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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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지은이 신희권, 펴낸 곳 북촌)에서는 그 둘레가 18.6km인 한양도성을 역사로 들여다보며 고고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이 품고 있는 국보나 보물, 온갖 문화재에 스며있는 역사를 낱낱이 살피는 답사기입니다. 육백 년 역사에 새겨진 흔적이나 사연까지를 고고학이라는 프리즘으로 더듬어가며 이야깃거리로 기록하고 있는 고적 해설서입니다.

한양도성을 밟아 새기는 여정은 전체 6구간, 백악구간, 낙산구간, 흥인지문구간, 남산구간, 숭례문구간, 인왕산구간으로 나뉩니다. 조선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한양도성을 더듬어 나가는 여정은 창의문에서 시작됩니다. 

고색창연한 문화재, 전설이 돼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전해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흔적들을 타박타박한 발걸음으로 꾹꾹 챙겼습니다. 하나의 유적이 만들어진 배경, 그 유적이 무너진 사건, 무너졌던 유적이 복원되거나 재 건립되는 우여곡절 속 역사들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습니다. 

한양도성은 태조 이성계 대에서 시작됩니다. 조선을 그려 낸 이념적 배경은 유교였고, 조선 내내 흐르던 국가적 유지 또한 성리학이었습니다. 이런 성리학의 벼리(維) 중 하나는 음양오행이었고, 음양오해에 견준 인·의·예·지·신이었습니다.  

한양도성을 에두르고 있는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 숭례문을 한양도성(서울) 4대문이라고 합니다. 4대문 중 3개의 대문 이름은 모두 석자인데 유독 '흥인지문'만은 넉자로 돼 있습니다. 세상에 이유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다투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4대문 중 한 대문의 이름이라면 더더욱 그럴 겁니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풍수지리상 흥인문이 자리한 곳과 주변 지대가 도성의 붓·서·남에 비해 유난히 낮기 때문에 가라앉은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하여 '흥인지문'이라 부른 것이다. -131쪽-   

그랬습니다. 형세에서 모라라는 것은 이름으로 채웠습니다. 이름을 멋지게 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고, 부르기 좋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풍수지리에 따른 보사(補瀉),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모자라는 것은 이름으로라도 보태 채우려는 지극하고도 간절한 태평성세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고종 대에는 도성 중앙에 위치한 종루의 이름에다 '신信'을 넣어 '보신각普信閣'이라 함으로써, 오상의 이미를 완전히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의 조선을 세우며 추구하였던 유교의 대표덕목 '인의예지신'을 구한말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4쪽-

한양도성은 조선 어느 한 임금 대에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닙니다. 배경과 밑그림으로 스며있는 인·의·예·지·신, 이 오상을 채우는 데만 500년쯤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인·의·예·지'까지는 일찌감치 4대문 이름으로 채워졌지만 마지막 '신'은 고종 대에 이르러 '보신각' 이름으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문양으로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인·의·예·지·신, 이 오상은 500년에 걸려서라도 채우거나 완성해야 할 만큼 중요한 조선 정치의 벼리이자 한양도성에 담긴 조선의 가치였습니다. 

한양도성은 조선이 건국 초기에 엄청난 인력을 동원하여 축조한 국가시설이다. 한양도성 축조에서 중요한 점은 동원된 인력 외에도 이른바 '공사 실명제'를 채택하여 구간별 책임자와 감독자의 성명·군명·자호 등을 성벽에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114쪽-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며 살피고, 도성 안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더듬다 보면 어느새 감탄하게 하는 위세, 휘황찬란한 외양을 유지하며 위풍당당하게 남아있는 문화재들도 수두룩하지만 속살을 훔쳐보듯 살피고 헤아려야만 읽을 수 있는 흔적들도 결코 성글지 않습니다.   

성을 쌓는데 소요된 돌멩이 하나, 그 돌멩이에 각인돼 있는 어떤 글씨, 빗물에 씻기고 바람에 뭉그러져 조금은 흐릿해진 글씨 하나에서 도성을 건립할 당시의 정책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근래 어떤 대형사고가 일어났을 때, 정부에서 대단한 정책인양 발표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공사실명제' 이였습니다. 하지만 '공사실명제'는 600년 전, 한양도성을 축조하던 그 시기에 이미 현장에서 행해지던 당연한 정책 중 하나였습니다.  

자리에 앉아 600년 서울 들여다보는 천리안

창의문에서 출발해 다시금 창의문에 다다르는 한양도성 여정 18.6Km, 성곽에 드리운 흔적과 도성이 품고 있는 모든 문화유적들을 일일이 탐방하며 하나하나 새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기회는 바람으로만 그쳐야 할 아쉬움일 겁니다. 또한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탐방은 눈으로는 보되 다 보지 못하고, 눈으로는 보되 스며있는 뜻까지는 새기지 못하는 아쉬운 탐방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의 역사는 길고, 조선을 지나 일제 강점기를 견디며 오늘날까지 흐르고 있는 한양도성이 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가치와 흔적들은 언뜻 생각하거나 대충 둘러보기엔 너무 깊습니다.

이 책,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은 직접 둘러보지 않고도 한양도성을 따라 흐르는 육백 년 서울 역사를 구석구석 살필 수 있는 천리안이 돼줄 겁니다. 고고학을 전공한 저자가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설명이 한양도성에 스며있는 역사적 향기와 음란한 음모까지를 두루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숙명통이 돼 줄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 지은이 신희권 / 펴낸 곳 북촌 / 2016년 12월 20일 / 값 23,000원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신희권 지음, 북촌(2016)


태그:#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신희권, #북촌, #흥인지문, #보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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