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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배우가 억만장자와 결혼했다고? 어떻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책을 읽는다면 실망할 것이다. 억만장자와 결혼에 이르는 비법이라도 나와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끝까지 읽는다면, 한 마디로 낚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런 비법이 나와 있다고 해도 억만장자와 결혼할 확률, 8백만 분의 1이라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아주 유쾌한 해학과 조롱으로 독자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해제를 쓴 목수정 작가는 '미용실에 앉아 여성잡지를 보듯 가볍게 넘기면' 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부담 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아메리카노 한 잔과 반으로 가른 플레인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넣어 조금 여유롭게 먹을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책을 요약했다고 할 수 있는 해제와 오드레 베르농의 한국어판 서문만 보는 데는 뜨거운 커피가 다 식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지만은 않다. 사회 불균형과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뭔가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책은 명색이 <경제서>다.

<그래서 나는 억만장자와 결혼했다> 겉표지.
 <그래서 나는 억만장자와 결혼했다> 겉표지.
ⓒ 한빛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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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 작가는 해제 머리글에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가장 애교스런 경제서'라고 썼다. 마르크스와 계급, 투쟁, 선동 등의 단어가 거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그런 단어들마저 애교스럽게 보이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저자 오드레 베르농은 프랑스 여배우다. 저자는 1980년생으로 2009년 원맨쇼로는 처음으로 경제 문제를 다룬 <억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의 대본을 쓰고 공연을 시작했다. 특유의 예리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비판이 담긴 이 극은 프랑스 인기 원맨쇼로 현재까지도 절찬 공연 중이라고 한다. 그녀는 "현대 사회에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려면 최소 10억 달러(한화 약 1조 원)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녀는 (자신의 원맨쇼에서) 어떤 억만장자와 결혼했을까? 책표지에 따르면 포브스 억만장자 순위 1826명 중 33위의 남자라고 한다.

세계 부자 순위 33위, 205억 달러를 갖고 있는 슈퍼리치는 누굴까? <그래서 나는 억만장자와 결혼했다>부록에 실려 있는 '2016년 <포브스> 선정 억만장자 순위 TOP 50에 따르면, 바로 알리바바의 최고경영자 마원이다. 마원이 누군가? "어머니가 중요합니까? 아내가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내에 대한 생각이 남다름을 드러낸 명언을 쏟아냈던 그가 아니던가?

"어머니는 나의 1/3 인생을 책임지지만, 아내는 나의 2/3 인생을 책임진다. 어머니가 나를 낳았을 때 고통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아버지는 응당 어머니에게 잘해야 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나는 응당 아내에게 잘해야 한다. 나는 어머니가 낳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한테 잘 해주는 것은 응당한 일이지만, 아내는 장모님이 낳으셨기 때문에 아내가 나한테 잘 해주는 건 응당한 일이 아니다."

이 사람 참 탐난다. 그런데 어딘지 이상하다. 50살의 마원은 이미 결혼했고, 이혼했다는 소식도 없다. 아무리 탐낼만한 남자라 해도 이미 물 건너간 마원과 결혼했다고? 그 문제는 오드레 베르농에게 직접 따지시라. 저자는 사실 누구와 결혼하느냐보다 왜 결혼하느냐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저자는 자본주의식 결혼식 청첩장을 돌리며, 이른바 슈퍼리치들의 위선을 까발린다. 그 중에서도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런 버핏은 오드레 베르농에겐 가장 볼썽사나운 부자임이 틀림없다.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으로 전 세계 70억 중에 세 번째로 부자인 워런은 부자답지 않게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기업의 내재 가치와 성장률로만 투자하는 가치 투자의 창시자이며, 지금까지 한 집에서만 살고, 차도 바꾸지 않고, 자신이 죽으면 전 재산을 빌 게이츠가 운영하는 구호 재단에 기부할 거라고 밝혔다.

오드레 베르농은 이 부분이 가장 이해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워런은 스포츠 삼아서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요지는 이렇다.

"인생의 목표가 돈이 아니었다면 가난한 사람을 그렇게 착취하지 말았어야지."-p.37.

이 책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조류독감(AI)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가운데, 없는 사람은 눈물 흘리지만, 가진 자들은 어떻게든 이익을 챙기고 있을 거란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계란과 라면 등 줄줄이 인상되는 소비자 물가만 놓고 봐도 경제 위기에 이익 챙기는 것은 거대 유통기업, '재벌' 밖에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경제 위기의 원인은 부자들에게 있다고 진단한다. 목수정이 이 책의 진짜 제목을 '억만장자를 무너뜨리는 법'이라고 한 이유다.

도둑질을 이윤 창출이라고 우기고, 불법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슈퍼리치들의 위선을 까발리는 이 책은 연말 답답한 속을 풀어줄 청량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싫어한다면서 억만장자와의 결혼을 꿈꾼다고 비웃지 마시라. 그것은 투항이 아니라 투쟁이니까.

"부자보다 돈을 더 많이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이 아닌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빈곤의 저주가 있다."-오스카 와일드. -p.5.


그래서 나는 억만장자와 결혼했다

오드레 베르농 지음, 유정애 옮김, 목수정, 한빛비즈(2016)


태그:#오드레 베르농, #목수정, #슈퍼리치, #워런 버핏, #억만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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