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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앙상해지는 계절이다. TV를 틀면 채널을 막론하고 쏟아지는 참기 어려운 소식, 그 속에서 비참하고 무력해져만 가는 게 오직 나뿐일까. 작은 촛불 하나 들고 분노며 무력감을 다스려보지만, 돌아보면 내 촛불은 아직도 작고 밝혀야 할 어둠은 너무나 짙다. 1960년 4월로부터 56년이, 1987년 6월로부터는 29년이 흐르는 동안 나와 나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촛불은 왜 횃불이 되지 못했을까. 어린 아이가 장년이 되고 또 청년이 될 이 시간 동안 우리는 대체 얼마나 많은 과오를 지난 세월에 남겨온 걸까.

이제 앙상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고 메마른 계절을 건너야 할 때다. 여기, 계절의 초입에서 읽어보면 좋을 소설 3권을 가려 뽑았다. 미국 문학에서 손꼽히는 이야기꾼 애드거 앨런 포의 탁월한 단편부터 짐승 같은 감각으로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성석제의 소설집, 이야기에 이야기를 더해가며 가난한 사람들에 전쟁과 비이성의 시대를 넘어설 힘을 준 청년 이야기꾼까지. 부디 이들의 소설로부터 춥고 메마른 계절을 가로지르는 동안 먼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성석제,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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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책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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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데뷔 20년을 맞은 중견작가 성석제의 소설집이 출간됐다. 최근 4년 동안 집필한 소설을 모은 <믜리도 괴리도 업시>와 함께 출간된 <첫사랑>은 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한 직후 쓴 소설 8편을 모은 것이다. 소설가 인생 20년을 돌아보며 그 중에서도 초기작을 고른 것인데 <믜리도 괴리도 업시>와 비교해 보면 성석제라는 작가의 성장, 나아가 그 글의 장점과 단점을 선명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실린 소설들은 첫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와 두번째 소설집 <조동관 약전>에 실린 글 가운데 성석제 스스로 내세울 만한 작품을 따로 추린 것이다. 이미 나온 작품집에서 굳이 작품 몇 개를 골라 다시 책으로 출판하는 수고를 했고, 새로 쓴 소설은 단 한 편도 실리지 않아 그리 새로울 건 없다. 다만 성석제가 스스로 고른 초기작이기에 그의 팬을 자처하는 독자에겐 제법 흥미를 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노태훈씨는 성석제를 가리켜 '의심할 여지 없는 프로 소설가이고 이야기에 한해서는 맹수에 가깝다'고 했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성석제는 이야기의 참신한 형식과 흥미를 자극하는 구도, 설정 등을 통해 어찌되었든 독자에게 글을 읽히는 데 있어 최고 수준의 작가다. 그를 아는 독자 가운데 그의 소설이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불과 4.5초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를 30여 페이지에 걸쳐 쓴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나 문단마다 반복되는 경두라는 이름이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두>, 오랫동안 벙어리인 줄 알고 지낸 여자의 편지를 대필한 남자가 술회하는 이야기 <유랑> 등 소설마다 전개방식과 분위기가 각양각색이다.

그럼에도 그 초기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상을 들자면, 표리부동한 인간이 주요하게 등장하고 결말에 이르러 대단하게 보였던 인물이 실상은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을 비범하게 그려내고 점차 그 안팎의 온도차를 대비시켜 조금씩 균열을 내다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내는 방식이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데, 그와 같은 특징이 독자 일반에게 조금씩은 내재해 있으리란 점에서 더 매력적으로 읽힌다.

다만 특이한 구성과 참신한 형식이 많은 데 비해 이야기가 빚어내는 인상이나 주제의식이 강하지 못하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그의 초창기 소설은 쉽고 빠르게 읽히는 대신 그만큼 빠르게 휘발돼, 이야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도 남지 않게 된다.

어디선가 아이 하나가 빨간 비옷을 입고 달려간다. 어디선가 세상에 나서 서른일곱 해 지난 육체가 벌레 먹은 밤송이처럼 떨어져내린다. 아이가 멈추어 서서 "아빠아" 하고 외친다. 그 뒤를 지쳐 보이는 한 여인이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온다. 비가 가늘어지고 이윽고 그친다. 여인은 우산을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디선가 하늘 한 귀퉁이가 열리고 그 아래의 세상에 손수건만한 넓이의 햇살을 내려보낸다. 새 한 마리가 깃을 털며 날아오를 차비를 한다. 포르르 난다. - <새가 되었네> 중에서

애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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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고양이(外) 책 표지
ⓒ 홍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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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하고 가난한 삶,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 스스로도 불과 마흔의 나이에 혼수상태의 행려병자 신세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애드거 앨런 포는 미국문학, 나아가 세계문학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이름으로 남았다.

포는 공포, 비참, 우울, 괴기스러움이 뒤섞인 특유의 분위기로 단편소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대표작 <검은 고양이>에 이르러 추리·탐정소설의 신기원을 이뤘으며, 이후 이어진 많은 작품을 통해 판타지의 초석을 쌓았다고까지 이야기된다. 타고난 재능과 불굴의 노력으로 한발짝 한발짝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나아간 포의 소설을 읽는 건 그와 다른 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겐 축복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사적 아픔과 시대사적 혼돈을 반영했다고 일컬어지는 그의 작품은 때로 귀족적이고 반민주적인 흔적들이 읽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성취 가운데 하나로 보는 편이 보다 적절할 듯싶다.

홍신문화사 세계명작 고전묶음인 홍신드림북스 52번째 책인 <검은 고양이 外>엔 포의 대표작 <검은 고양이>를 비롯해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어셔가의 몰락> 등 걸출한 작품이 대거 수록돼 있다. 오래되고 투박한 문고본이지만 의외로 훌륭한 판본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드림북스 시리즈 가운데서도 인상적인 책으로 기억한다.

이 책 한 권이면 도스토예프스키와 코난 도일, 아르튀르 랭보 등 다양한 문인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은 포의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근사하지 않은가!

심술이라는 기분에 대해 철학은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 영혼이 살아있다는 확신 못지않게 이러한 감정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원초적 충동 중 하나임을 확실히 믿고 있다. 즉, 심술은 환원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 감정 중 하나로써 인류의 성격에 일정한 방향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열하고 어리석은 짓을 수도 없이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우리는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나서도 그것이 규칙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하려는 성향을 보이곤 할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 <검은 고양이> 중에서

라픽 샤미, <1001개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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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1개의 거짓말 책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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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나 독일로 이주,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한 라픽 샤미의 소설이다. 청소년기까지를 시리아에서 보낸 영향으로 샤미의 소설에선 그 특유의 다문화성이 짙게 자리하고 있는데, 주로 이슬람 세계와 서구 유럽의 특성이 신비롭게 혼재된 작품이 주를 이룬다.

헤르만 헤세상을 수상한 <1001개의 거짓말>도 그와 같은 작품. 아라비아의 오랜 이야기 <천일야화>를 모티브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펼쳐나간다. 인도에서 온 서커스단을 도와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거듭하는 주인공 사딕과 그가 이야기 속에서 재현해낸 1001명의 마을사람들. 소설 속 모르가나 사람들은 사딕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난과 전쟁의 위험도 모두 잊고 열렬한 환호를 보낸다.

작가는 아이들의 순수함이 살아있는 땅으로 아라비아의 한가운데 모르가나를 골랐다는데, 순수함이란 곧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말하는 듯도 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1001개의 이야기, 사딕의 입에서 그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려나오는 동안 독자는 모르가나에서 서커스를 보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001개의 이야기가 담긴 라픽 사미의 이 소설은 실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거듭되면 될수록 내용이 진실인지 여부는 점점 덜 중요해진다. 오히려 그와 같은 거짓이 읽는 이에게 풍성한 기운을 심어주니,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 알고 싶은 이가 있다면, 거짓으로 출발해 희망을 심는데 성공한 라픽 샤미의 이 책을 열어보는 건 어떨까?

"이곳이 바로 세계이다. 당신은 그저 눈을 열고, 귀를 열고, 입을 열고, 그리고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모르가나가 보일 것이다. 아라비아의 한가운데 자리한 모르가나는 수많은 예언자, 정복자, 대상들, 거지들을 낳은 곳이면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곳, 행복과 증오와 전쟁과 고독과 고통과 음모와 수만 가지 비루한 일상의 모습들이 한꺼번에 녹아드는 곳이 바로 모르가나이다. 다른 곳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르가나의 심장엔 아직도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아이들의 순박함이, 그 순수함이 변치 않고 살아 있는 곳, 그곳이 모르가나이다."
- 라픽 샤미(디 차이트 인터뷰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첫사랑 / 문학동네 / 성석제 지음 / 2016. 10. / 12000원>
<검은 고양이(外) / 홍신문화사 / 애드거 앨런 포 지음 / 이해윤 옮김 / 1997. 07. / 4000원>
<1001개의 거짓말 / 문학동네 / 라픽 샤미 지음 / 유혜자 옮김 / 2002. 04. / 12000원>



첫사랑

성석제 지음, 문학동네(2016)


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문학동네(2002)


검은고양이 외

에드거 앨런 포 지음, 대일출판사(1996)


태그:#첫사랑, #검은 고양이, #1001개의 거짓말, #김성호의 독서만세,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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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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