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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한 국가를 이끌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고 될 자격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난 2012년 '공사 구분 못하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 자격 없다'는 기사를 썼다.

박씨의 집권을 막는데 하나의 돌이라도 올리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공사 의식이 전혀 없는 박씨가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난 1979년의 10.26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노무현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함께 일하던 '직장동료' 임영태 선생이 이달 초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 태양이 비껴간 나라 멕시코·쿠바를 가다>를 펴냈다. 임선생은 이 책을 쓰면서 멕시코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며 이렇게 적었다. 

"(멕시코의) 검찰과 경찰, 행정책임자들은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밝히려 노력하기보다는 꼬리자르기에 급급했다. 우리나라 세월호 사건에서 박근혜정부와 국가권력이 보여준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멕시코 사회를 보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우리도 멕시코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나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서야 국민도 덜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어디나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서야 국민도 덜 고통스럽다. 오늘의 암울한 우리의 자화상을 보면서 지난 1주일간 임영태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 멕시코와 쿠바를 다녀온 후 이 두 나라를 보는 시각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우선, 멕시코의 역사가 깊고 내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방대한 고대문명과 문화유적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스텍․마야 문명 외에도 톨텍, 올멕, 테오티우아칸, 팔랑퀘 등 여러 문명이 남긴 수많은 유물과 유적들을 직접 대면하고 방대한 규모에 상당히 놀랐다.     

다음, 쿠바의 경우,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개방되고 활력이 넘치는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부족하지만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경직되지 않고 사람들의 사고가 유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나라 모두 사람들이 낙천적이고 외부인에 대해 개방적이고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행은 막연했던 생각을 분명하게 해주고 편견을 깨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최순실 게이트, 멕시코 뒤쫓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저자 임영태 선생
 저자 임영태 선생
ⓒ 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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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나라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점과 지양해야 할 점이 있다면?
"멕시코의 경우 개방성과 친절함, 사고의 유연성, 사람들의 낙천성 등이 배울 점이라고는 생각했다. 반면, 멕시코는 OECD 국가로서 우리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자랑하지만 치안이 불안하고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 정치권력과 경제적인 부패, 관료․경찰과 마피아의 유착, 노동․교육을 둘러싼 심각한 사회적 마찰이 있다. 특히 국가권력과 정치권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함과 무책임성을 보여주고 있다.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최순실 게이트, 민주주의의 후퇴 등을 보면서 마치 우리가 멕시코의 뒤를 쫓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바는 멕시코와 달리 치안이  매우 안정돼 있다. 도시든 농촌이든 밤에도 큰 걱정 없이 외부인이 다닐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치안을 자랑한다. 또한 쿠바는 어려운 경제여건에도 불구하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견고히 지키고 있다. 사교육과 비싼 대학등록금에 등골이 휘어지는 한국인의 처지에서는 가장 부러운 점이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도 거의 없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문화적 혜택을 거의 공짜로 고루 누리고 있다. 하지만 쿠바의 경우, 경제가 낙후되고 산업이 발전하지 않아서 사회적 인프라와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다. 관광개방, 의료수출, 협동농장의 해체와 협동조합의 조직,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 미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지만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 여행 중 가장 추억에 남는 일과 가장 괴로웠던 일은?
"쿠바의 앙꼰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지낸 일이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출과 일몰 광경도 좋았다. 멕시코 툴룸의 마야유적지에서 본 대서양의 파도와 쿠바 아바나의 말레꼰 해변에서 만난 풍경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쿠바에서 무리한 여정으로 몸살이 나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때가 우리들의 여행 여정 중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그때는 랑고스타(바닷가재)도, 뽀요(닭)요리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멕시코와 쿠바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순박하고 친절했다. 여행준비가 부족했던 우리들은 그들의 친절과 도움 덕분에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행 중 에피소드로 남을 약간의 불미스런 일도 있었다. 멕시코시티에서 택시기사에게 사기성 부당요금을 뜯기고 쿠바에서 역시 택시요금과 숙소 문제로 약간의 농락을 당한 것이 그것이다." 

- 그동안 주로 연구하고 쓰신 책이 주로 한국현대사에 대한 책인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좀 특이한 것 같다. 멕시코와 쿠바를 다녀와서 이 책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 동기는?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여행기를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흔히 하는 말로 돈을 들여 여행을 했으면 남기는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왕에 쓰는 여행기라면 신변잡기식의 그렇고 그런 여행기보다는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내용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멕시코 혁명과 쿠바 혁명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지식이 있었고 글도 쓴 적이 있어서 익숙했다. 그래서 막연하게 생각했던 멕시코와 쿠바 사회를 직접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점과 더불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의 과제를 연관시켜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쿠바는 혁명의 최대 성과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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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와 쿠바에서 보았던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는 무엇이었나?
"우리는 멕시코시티의 혁명기념관 앞에서 440일 넘게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교원노조원들을 만났다. 멕시코에는 160만 명을 거느린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노조인 전국교원노조(SNTE)가 있고, 노선이 달라 여기서 떨어져 나온 30만 명의 전국교육공무원협회(CNTE)가 있다. 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CNTE였다.

지역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멕시코 니에토 정부의 일괄적인 교육개혁에 반발한 것이다. 사실 멕시코의 교육개혁은 모든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었다. 멕시코혁명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교원들도 하나의 중요한 정치세력이 됐고, 그 과정에서 교사들의 임용권을 정부가 아니라 SNTE가 갖게 됐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이 SNTE가 썩어도 너무 썩어버렸다. 대통령도 모른다는 교사수, 월급만 받아먹는 유령교사의 존재, 위원장의 장기집권과 지독한 부패, 교육능력도 갖추지 못한 교사들의 존재와 재교육, 평가제도의 미비, 교원의 대물림, 돈 먹는 하마처럼 예산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사라지는 교육 현실 등 너무나 심각한 문제들이 많았던 것이다.

원래 혁명의 대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공교육을 통해 전국민의 무료 교육과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의 학습과 교육, 국가권력이 아니라 자율적인 교사조직에 의한 교원의 충원과 재교육 등을 만든다는 취지였지만 결국 SNTE가 부패한 권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멕시코혁명은 그림자로만 남게 되었다.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 투쟁은 성공하면서 새로운 사회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반미국가가 되었고 소련에 밀착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쿠바에 위기가 닥쳤다. 사회주의 국제분업 관계에 따라 담배와 설탕을 팔아서 대부분의 공산품과 에너지를 해외에서 들여오던 쿠바로서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식량위기, 에너지 위기와 함께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심각한 사회적 동요, 체제위기로까지 발전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자연재해까지 겹쳐 시름이 깊어진 쿠바를 무너뜨리려는 미국의 압박과 봉쇄는 더욱 거세졌다. 미국은 쿠바와 거래하는 모든 기업들에 불이익을 주면서 심지어 의약품까지 통제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쿠바는 군사비를 줄이고 관광개방과 의료수출, 반정부 인사의 방출 등을 통해 숨통을 틔우고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의 상징인 집단농장을 해체하고 대신 작은 단위의 협동조합을 구성하여 대처했다. 농업도 비료와 기계,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생태농업으로 전환했고,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하면서도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는 협동조합 체제를 통한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쿠바는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쿠바 혁명의 최대 성과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무제한에 가까운 문화적 향유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쿠바는 미국의 봉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과거 쿠바 혁명의 흔적은 희미한 그림자로만 남게 될는지 모른다. 우리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쿠바의 전조를 보았다. 과연 쿠바가 혁명이 성취한 버리지 않아야 할 것들, 이를테면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문화적 향유 등을 지켜내면서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지 기대를 갖고 지켜볼 일이다.

우리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쫓는 사람들처럼 이제는 낡은 시대의 것이 되었지만 그 옛날 혁명의 잔해, 그림자를 쫓아서 멕시코와 쿠바를 떠돌았다. 그 여정에서 만난 실상들, 느낀 감상, 그리고 인간다움을 향한 갈망을 담은 것이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태양이 비껴간 나라 멕시코․쿠바를 가다)라는 책이다."  

"물질에 앞서 사람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 앞으로 멕시코와 쿠바를 방문 할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준다면?
"일단 편견을 버리고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멕시코의 경우, 치안이 불안하고 사회적으로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배울 점도 많다. 문화유산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방대하다. 경제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의 힘도 상당하다는 이야기다.

쿠바의 경우, 경제적으로는 우리보다 많이 뒤지지만 느낄 수 있는 점이 많다. 사회주의의 단점도 남아 있지만 장점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질에 앞서 사람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산골에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풍경도 많이 만났다. 나에게는 즐거운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어디를 가든 있는 그대로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고 배우려는 마음가짐, 사람에 대한 겸손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여행을 가기 전에 그 나라에 대한 공부는 필수이다. 우리는 기본 상식은 있었지만 꼼꼼한 준비가 부족했다. 이를테면 쿠바에 한류 붐, 특히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인기배우나 아이돌의 브로마이드나 사진 같은 것이라도 갖고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소박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과의 소통을 생각하면서 작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해서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 멕시코와 쿠바를 방문하고 가장 부러웠던 점과 아쉬웠던 점은?
"스쳐가는 여행객의 눈으로 봤을 때 멕시코와 쿠바 사람들은 매우 낙천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친절했다.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어디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멕시코나 쿠바보다 훨씬 앞서지만 삶의 만족도는 오히려 반대이다.

특히 우리가 쿠바에서 만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했지만 자신의 삶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물질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짓밟고라도 올라서야 한다는 잘못된 경쟁의식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우리처럼 쫓기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또 하나는 의료이다. 우리가 묵었던 까사(민박집) 주인 딸은 어려서부터 심장병을 앓아서 큰 수술을 하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수술은 물론이고 치료에서도 돈을 한 푼도 내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비용을 국가가 다 부담하는 것이다. 의료, 교육, 문화생활의 혜택이 가장 부러웠다. 

아쉬웠던 점은 공항이나 은행에서 일처리가 너무 느려서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괴로웠다. 부족한 물자나 사회적 인프라 문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이런 문제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요구가 합치되는 접점을 찾는 삶을 살 수 있다면"

- 책에서 쿠바의 청년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고 했는데 어떤 희망을 보았는지?
"아바나 대학에서 역사철학을 공부한다는 청년을 만났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사회적 책임의식이 매우 높았다. 그는 아바나 대학과 쿠바 사회에 대해 우리들에게 친절하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자신의 생각도 비교적 명쾌하게 표현했다. 역사의식도 잘 정리돼 있었다. 특히, 그가 체 게바라의 도시인 산타클라라에서 가서 교사를 하겠다고 말하면서, 돈 보다는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쿠바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특히 교육과 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청년도 그런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과거 한때 어두운 '국가주의'나 '애국심' 따위가 강조, 강요된 적이 있다. 그 청년의 사명의식도 언뜻 보면 그런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내 느낌으로는 그런 것보다는 우리말로 '반듯한' 청년의 이미지가 강했다.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요구가 합치되는 접점을 찾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 역사가의 입장에서 멕시코와 쿠바가 '태양이 비껴간 나라'가 된 것은 불가피했다고 보는가?
"멕시코와 쿠바는 지리적으로도 적도 위에 위치하고 있어 태양이 비껴간 나라이기도 하다. 두 나라 모두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을 치렀다. 모든 혁명이 반드시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혁명이란 한 국가, 사회에 불가피하게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의의는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멕시코혁명도 쿠바혁명도 필연적인 측면이 있었고,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겪었다. 진보적인 이념처럼 혁명도 내거는 기치나 대의는 대부분 정당하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가 반드시 대의에 걸맞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을 인정하더라도 멕시코혁명과 쿠바혁명은 많은 의미 있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제 혁명이 만들어낸 많은 것들이 그림자로만 남아 있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쿠바는 아직도 혁명이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멕시코는 거의 잔해만 남아있는 형국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이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걸 부정할 때 수구꼴통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손질하고 보수하고 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국가나 사회, 역사에서도 그게 쉽지가 않다. 그냥 안주하기 쉽다. 그래서 정체되고 낙후하고, 또... 그렇게 되기 십상이다.

멕시코는 혁명 후 제도혁명당이 70년 동안 단독집권하면서 견제장치가 고장 났고 그 바람에 고인물이 되어 썩기 시작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쿠바 또한 공산당이 50년 이상 단독으로 장기집권하고 있다. 내부적인 혁신과 함께 사회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경쟁상태가 필요하지만 그런 제도가 없다. 이제 미국의 봉쇄가 사라진 조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지 지켜볼 일이다.

아무리 강성하고 화려했던 제국들도 석양을 맞이하는 것처럼 역사에서 부침을 필연이다. 혁명의 태양이 비껴가면서 그 흔적이 희미한 그림자로 남는 것은 역사에서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어느 수준의 무상교육은 가능하다"

- 책을 읽으면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우리나라도 못하는 무상교육을 쿠바는 어떻게 가능하게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쿠바는 어떻게 무상교육의 꿈을 이루었다고 보나?
"쿠바 혁명의 가장 큰 대의와 목표가 무상교육, 무상의료, 복지, 문화생활 등이었고, 혁명지도자들은 그걸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쿠바가 무상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은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쿠바는 일인당 GNP가 우리나라의 30퍼센트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열악한 재정 상태에서도 교육과 의료 등에 우선적으로 배분하고 있다. 쿠바는 과거 바티스타 정권 시절에 병영이나 경찰서 건물 등을 학교 교사로 활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무상교육을 실현했다.

물론 이러한 무상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사적 소유가 억제되고 토지와 중요산업이 국유화되어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배분과 계획경제가 주도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산성이 떨어지고 경제 발전이 떨어지면서 사회주의 전체가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강화되더라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라는 쿠바혁명의 성과물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쿠바처럼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어느 수준의 무상교육은 가능하다. 영국을 비롯해 유럽 국가들이 그런 경우 아닌가?"

- 멕시코혁명의 대의를 오늘 멕시코에서 볼 수 있었나? 없었다면 지금 멕시코 혁명의 대의는 어디로 갔다고 보나?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멕시코혁명은 러시아혁명과 함께 20세기 최대의 사회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멕시코혁명은 단순한 정치혁명을 넘어서 토지개혁과 석유산업 등 중요산업의 국유화, 공교육 제도의 정비, 진보적인 노동․사회복지 제도 등을 성취한 사회혁명이었다.

멕시코 혁명은 처음 자유주의 정치혁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자유를 넘어서 당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였던 토지문제와 교육, 복지 등 사회전반의 문제를 둘러싼 계급과 세력간의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숱한 민중이 희생되고 고통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오늘날의 멕시코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결국 멕시코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과도 다르고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과도 다른 제3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

이렇게 성취한 멕시코 혁명의 결과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위정자들에 의해 희석되고 사라지게 된다. 1968년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600여명이 희생되는데 지식인들은 이때 혁명의 첫 번째 죽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1994년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는데 이를 반대하며 사파티스타 혁명군이 봉기했다. 마르코스가 이끄는 이들은 멕시코혁명에서 토지혁명을 대변하는 인물인 사파타의 정신을 재현하고자 했다. 멕시코혁명을 통해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대농장주와 대자본에 집중되었고 농민과 노동자, 빈민들은 혁명 이전의 비참한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혁명의 두 번째 죽음이었다.

NAFTA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멕시코가 급속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혁명의 대의는 사라지고 혁명은 희미한 그림자만 남게 되었다. 제도혁명당의 70년에 걸친 장기집권으로 부패가 만연하고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빈부격차가 심각해지고 그 와중에 마약조직이 기승을 부리면서 치안도 엉망이 되었다. 부와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고 사회적 갈등이 증가하는 가운데 멕시코는 또 다시 100년 전의 혁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멕시코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 오늘날 멕시코가 이렇게 망가진 원인과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평가하나?
"멕시코가 이렇게 된 데 가장 큰 책임은 정치적 집권세력에게 있다고 여겨진다. 멕시코혁명 과정에 참여한 모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한 제도혁명당(PRI)은 70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면서 고인물이 되어 썩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혁명당의 부패와 장기집권을 청산하고 2000년에 새로이 권력을 장악한 국민행동당(PAN)은 12년 동안 집권하면서 제도혁명당 보다 더 못한 행태를 보이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임으로써 그나마 흔적으로만 남아 있던 혁명의 잔해들까지 치워버렸으며 부패의 정도가 그 이전보다 못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다시 권력은 제도혁명당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처럼 멕시코 정치를 책임진 정당들은 멕시코혁명의 대의인 민중을 위한 정치와는 거리가 먼 무책임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2014년에 국가권력인 경찰의 하청을 받은 마약조직이 43명의 대학생들을 납치, 살해했는데도 국가와 정치권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책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데만 급급했다. 검찰과 경찰, 행정책임자들은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밝히려 노력하기보다는 꼬리자르기에 급급했다.

우리나라 세월호 사건에서 박근혜정부와 국가권력이 보여준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멕시코 사회를 보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우리도 멕시코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나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서야 국민도 덜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 귀국 도중 짧게나마 미국을 방문했는데 외지인으로서 잠깐 본 미국의 음과 양에 대해 느낀 점이 있을 것 같은데?
"겨우 며칠 그것도 미국의 한 귀퉁이 로스엔젤레스(LA)에 잠깐 스쳐지나오면서 미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것은 건방지다고 생각된다. 다만, 멕시코, 쿠바, 미국을 보면서 비교되는 점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내가 본 광경만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멕시코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를 보지 못했다. 그 대신 길거리에서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쿠바에서는 알코올에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다만 그냥 돈을 달라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알코올에 취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 화려한 할리우드 거리에서도 많이 만났다. 친구 얘기로는 밤이 되면 다운타운이 노숙자의 천국이 된다고 한다.

외양이 화려하고 잘 정비된 거리와 건물들, 세련된 옷을 입고 영양 상태가 좋은 미국 사람들. 구도시의 역사성과 잘 정비된 신도시를 함께 간직하고 역사유물이 많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멕시코. 낡고 오래된 건물이 많고 거리 정비도 안 돼 있고 물자도 부족하지만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약간은 들떠 있는 듯 보이는 쿠바사람들. 이런 생각이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이것만으로도 세 나라의 현재 모습을 한 측면이지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임영태 선생은 1959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거창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문제에 눈 떴고, 청년 시절에는 민주화・노동운동에 관계했다.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와 관련한 집필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사)현대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포괄적 과거사 정리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하며 공식 보고서 발간 작업을 총괄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역사・인문・사회 교양서를 쓰는 것에 관심이 많다. 멕시코・쿠바의 역사와 사회문제를 여행기와 결합한 이번 책에 이어 동북아시아 역사와 평화문제를 여행기와 결합한 책을 구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내일을여는책, 2016), 『스토리 세계사 1~10』(21세기북스, 2014), 『두 개의 한국 현대사』(2014, 생각의길),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2013, 유리창),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2013, 유리창), 『대한민국사 1945~2008』(2008, 들녘),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2002, 푸른나무>,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공저, 2002, 푸른나무), 『북한 50년사 1, 2』(1999, 들녘), 『대한민국 50년사 1, 2』(1998, 들녘),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사』(공저, 1988, 조국) 등이 있다.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 - 태양이 비껴간 나라 멕시코.쿠바를 가다

임영태 지음, 들녘(2016)


태그:#임영태, #김성수, #쿠바, #멕시코, #진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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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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