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아니, 데모하고 싶어도 먹고 살려고 데모 못 하는데. 좌파 놈들은 어디서 돈이 나서 그렇게 먹고 사느냐. 그 돈 대주는 놈들 뿌리를 끊어야 하는데…."

10월 26일 오전 10시 30분께 서울 동작구 초입, 박정희 전 대통령의 37주기 추도식이 열리는 국립현충원 묘역으로 향하는 중형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누군가의 한 마디가 불쑥 귀에 박혔다.

감색 정장을 차려입은 앞자리 노인이 진지한 얼굴로 건너편에 있는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추도식이 시작하는 오전 11시 전에 도착하려는 이들로 버스가 만원이 될 때까지도 두 노인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노인이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그 대목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저기 저, 장사를 지내려면 지내지. 아니 무슨 이유로 부검을 못 허게 해서 장사 안 지내고 버티고…." 

 박정희 전 대통령 37주기 추도식장의 모습.
 박정희 전 대통령 37주기 추도식장의 모습.
ⓒ 모진수

관련사진보기


버스에서 내려 추도식장으로 들어서자 박 전 대통령 묘역 주변에 늘어선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민족중흥회'와 '대한민국 박사모' '근혜동산'을 비롯한 각종 단체 회원들이 천막 아래서 모금 활동 및 음료·자료집 제공 등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자료집에는 오는 11월 열린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 99주기(박 전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에 출생) 관련 행사에 대한 홍보물도 포함돼 있었다. 표지에는 '임금이나 성인이 태어난 날'을 뜻하는 '탄신'은 물론 세계 평화와 인류 구원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자료집과 함께 나누어준 행사 홍보물.
 자료집과 함께 나누어준 행사 홍보물.
ⓒ 모진수

관련사진보기


곳곳에서 들려오는 야당 비난

추도식 시작을 앞두고 묘역 앞은 곧 참석자들로 가득 찼다. 미리 준비해 둔 의자가 모자라 뒤편에 서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두운 양복을 입고 자리한 대부분이 중·장년층이었고, 20, 30대는 물론 심지어 40대로 보이는 이들조차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식장 뒤편을 일찌감치 '사수'하고 있던, 휘황찬란한 군복 차림의 무리는 마치 예비군 훈련장을 방불케 했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와 월남전참전자회 등 군 관련단체에 소속된 회원들이었다. 악수와 거수경례로 인사를 나누며 삼삼오오 모여든 그들의 앞을 지날 때마다 이따금씩 "문재인 그 XX" "안철수는 안 돼" 등의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장 뒷편에 모여 있던 군 관련 단체 회원들의 모습.
 식장 뒷편에 모여 있던 군 관련 단체 회원들의 모습.
ⓒ 모진수

관련사진보기


'박정희 정신'과 '북한 위협' 만 강조한 추도식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경례로 시작된 추도식 내내 강조된 것은 '북한의 위협'과 위기 극복을 위한 '박정희 정신'이었다.

식사를 맡은 함명수 추도위원장은 "오늘날 우리의 안보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서 지난날 각하께서 결단하셨던 월남 파병을 떠올려본다"라면서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사드 배치를 포함한 한미방위조약의 유지 및 강화를 주문했다.

김진영 성우회장은 "대부분 아시아 지도자들이 각하의 선견지명적인 (근대화) 전략을 연구해 도입하고자 했다"라며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필리핀의 마르코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등을 예로 들었다. 모두 장기간의 개발독재를 주도해 역사적 논란을 불러온 인물들이지만, 그러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후행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 사회는 이제 자기 실패를 남의 탓이라 하고 사회와 국가 탓이라고 우겨대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식이 진행될수록 추도사는 강도를 높여가는 것 같았다. "민주주의가 과잉으로 치달았다"는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의 추도사가 이어지자 참석자들이 앉아 있던 곳곳에서는 "옳소"나 "당연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등의 동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대뜸 "에이, 좌파 놈들"이라면서 한탄하는 참석자도 있었다. 식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몇몇 관계자가 틈틈이 팔을 휘저으며 박수를 치지 말라고 안내했지만, 그럼에도 산발적인 박수 소리는 자꾸 이어지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묵념하고 있는 추도식 참석자들.
 묵념하고 있는 추도식 참석자들.
ⓒ 모진수

관련사진보기


이후 박 전 대통령의 육성 듣기와 추도가 낭송, 조총 발사 및 묵념 등으로 추도식이 마무리되자, 본격적인 헌화와 분향 행렬이 이어졌다.

개인과 깃발을 든 단체 인원이 박 전 대통령의 묘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몰려들면서 병목 현상이 잠시 빚어졌다. 묘역을 찾은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몰려든 지지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마치 '팬 미팅'을 연상케 했다. 이인제 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나갈 때도 줄을 서 있던 이들은 연예인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악수를 청했다.

 추도식에 참석한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
 추도식에 참석한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
ⓒ 모진수

관련사진보기


'최순실' 찾아볼 수 없었던 추도식장

식장 일대는 박근혜 대통령을 위한 대화합의 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으로 벌어진 최근의 논란은 추도식에서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름 석 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은 최순실씨의 국정 개입에 대해 묻자 웃으며 검지를 입에 갖다 대고는 "그런 얘기는 여기서 할 필요 없다"라면서 오히려 면박을 줬다. 각종 집회 때마다 등장해 유명세를 치르는 이른바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는 이미 취재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근처에서 한 회원이 휴대전화를 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내가 다 영상 찍어 놨어, (언론)보도 똑바로 안 하면 내가 죽일 거야!"    

주 대표가 "대통령과 친분이 있으신 분이 연설문 보는 게 죄가 되느냐" "오히려 주적인 북한에 물어보는 과거의 대통령 비서관들을 언론은 왜 다루지 않느냐"는 식으로 성토하기 시작하자 주변에 몰려든 회원들은 일제히 "맞습니다" "옳소"라면서 동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야권 인사에 대한 비난도 이어졌다. '역적'이라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그분이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게..."

헌화와 분향이 막바지로 치닫고, 묘역 주변 천막들이 철수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몇몇 단체와 지부 회원들은 새벽부터 먼 거리를 달려온 듯, 관광버스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식사 시간을 갖기도 했다. 특히 추도식장에서부터 붉은 조끼로 시선을 끌었던 '대한민국 박사모가족'은 아예 박 전 대통령의 운구차가 전시돼 있는 곳 근처에 자리를 잡고 커다랗게 단체 모임과 점심식사를 했다.

이희철 중앙회 회장이 따로 마련된 연단에 올라 "그분이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게끔 우리가 대통령을 사랑하고 아껴주셔야 한다"라면서 "회원님들, 다 그렇게 생각하시죠?"라고 묻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앞서 묘역에 있던 윤상현 의원은 이 자리에도 찾아와 회원들을 격려하며 무려 "대통령 윤상현"까지 포함한 환호를 듣고 자리를 떴다. 이렇게 '일치단결'한 뒤, 차례로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는 회원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추도식이 끝난 뒤 별도 모임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박사모가족 중앙회.
 추도식이 끝난 뒤 별도 모임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박사모가족 중앙회.
ⓒ 모진수

관련사진보기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현충원을 벗어나는 길, 25일 밤 모든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했던 '핵폭탄급' 소식들이 머릿속을 다시 채웠다. 그러나 오전 몇 시간 동안 두 눈으로 목격한 장면은 어젯밤의 그 뉴스들과 하나도 겹쳐지지 않고 자꾸만 얼기설기 엉켰다.

단 하루를 사이에 두고 마치 다른 세계를 찾은 것 같았다. 어제도 꿈인 것 같았고, 오늘도 꿈인 것 같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한 참석자들의 모습은 참담을 넘어선 느낌을 가져다줬다.

혹여나 한 마음에 돌아본 이 자리에서는 그 어떠한 변화의 기운도, 의심의 여지도 감지되지 않았다. 문득 추도식장에서 '간밤에 뉴스 보고 어떠셨냐'는 질문에 답해준 노인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주먹을 쥐고 "민족중흥"이라고 외친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내 어깨도 두드려주면서 말했다.  

"담담해야지, 이 사람아. 흔들리면 안 돼, 뭉치면 사는 겨."

견고하기만 한 '통곡의 벽' 앞에서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추도식장에서 나누어준 자료집.
 추도식장에서 나누어준 자료집.
ⓒ 모진수

관련사진보기




댓글2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