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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의회 구미경 의원
 대전광역시의회 구미경 의원
ⓒ 구미경 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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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경험이 축복이 될 때가 있다. 구미경(52‧비례대표) 대전광역시의회 의원도 그랬다. 그는 돌 무렵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됐다. 그러나 구 의원은 어려서부터 장애를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삶을 개척하는 원동력으로 받아들였다. 구 의원을 지난 8월29일 대전광역시 의회 구미경 의원실에서 만났다.

"장애가 있는 데다 집도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셔서 8살 때 길거리에 나 앉았거든요. 저는 10살 때부터 돈을 벌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머니를 돕고 싶었어요. 공부도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너는 장애가 있으니까 약대에 가서 약사를 하라고 이야기하셨거든요."

당시는 넝마나 폐지를 팔아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다. 구 의원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종이는 팔아봐야 돈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대동오거리 앞 철문점 뒷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어른 손가락 마디만 한 쇳조각을 발견한 구 의원은 무릎을 쳤다. 그때부터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새벽 4시면 망태기를 어깨에 메고 두 살 어린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쇳조각을 주워 다 판 돈을 모두 새마을금고에 저축했다. 어린 고사리손으로 번 돈은 가족들이 먹을 쌀이 됐다.

"어머니가 대전역 앞 중앙시장 한복집에서 바느질을 하셨거든요. 온종일 일을 하시면 한 대박도 안 되는 쌀을 겨우 사 갔고 오실 수 있었어요. 일곱 식구가 물에 쌀이랑 밀가루를 풀어 풀죽처럼 같이 끓여서 먹고 살았습니다."

반찬은 꿈도 못 꿨다. 김장할 돈도 없어 중앙시장 배추가게 주변에 떨어져 있는 껍데기를 주워 다가 소금에 절여 반찬으로 먹고 도시락 반찬도 싸서 다녔다고. 그나마 일거리가 없을 때는 굶어야 했다.

"어머니 얼굴빛이 어두우면 쌀을 못 사신 거예요. 그런 때 새마을금고에 가서 저축한 돈을 찾아서 어머니께 드리곤 했어요. 새벽마다 일해서 번 돈이라고 하니 눈물을 글썽이셨죠."

등록금도 못 내던 소녀, 약대에 가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는 친구 동생들을 과외해서 번 돈을 살림살이에 보탰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등록금을 내는 건 꿈도 못 꿨다. 그래도 학교는 다니고 싶었다. 몸도 불편한데 전문직을 가져야 제대로 살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학기 초가 되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집안 형편 이야기를 했어요. 등록금을 낼 수 없는데 학교는 꼭 다니고 싶다고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답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말없이 구 의원의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들은 기특하다며 칭찬하셨다. 실제로 구 의원은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문제집 살 돈이 없어 친구 문제집을 빌려다 지우개로 답을 모두 지운 뒤 다시 풀었다. 시험 기간에 밤을 며칠씩 새는 건 예사였다.

"우리 때는 등록금을 못 내면 교무실로 불려가 부장 선생님께 손바닥 맞고 그랬거든요. 담임선생님이 구미경은 장애도 있는데 집안 형편까지 어려우니 너무 혼내지 말라고 미리 부탁하셨던 것 같아요. 부장 선생님이 저에겐 심하게 대하진 않으셨거든요."

등록금을 못 내는 친구들은 현실을 불평하며 굉장히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책을 많이 읽었던 그는 좋은 글귀를 마음에 품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가난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다 뭐 이런 글귀를 어디선가 읽었어요. 맞아 가난이 죄가 아니지. 내가 부자 부모님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돈을 못 버는 것뿐이니까 부모님 잘못도 아니고. 어린 나이에도 좀 기특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피눈물 나는 노력 덕에 그는 바람대로 약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뒤늦게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에 좌절감을 느꼈다. 동성끼리 생활하는 중‧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남학생과 함께 생활하는 대학시절, 사람들과 활달하게 관계 맺는 자신을 남자들이 자꾸 피했다.

"제가 장애인이어서 혹시 자기들을 좋아할까 봐 미리 벽을 치는구나 느꼈어요."

구 의원은 자신보다 훨씬 장애가 심하지 않은 선배 언니가 남자 쪽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못 하는 것도 목격했다. 세상이 장애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또 한 번 체감했다. 같은 과 선배나 동기 모두 변호사, 의사, 한의사와 결혼을 하는데,  선배 장애인 언니만 고졸과 결혼을 했다. 현실은 냉혹했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남학생들과 4년 동안 말을 안 하고 살았어요. 처음으로 내 삶에 회의가 들었지요. 그렇게 내 문제만 바라보면 답이 없었을 텐데 다행히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렸어요. 사람의 삶을 깊이 파고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금강경, 반야심경 등 철학 서적들을 탐독했습니다."

남편과의 만남

구 의원은 대학생활을 통해 밝고 명랑했던 소녀에서 인생의 쓴맛을 아는 내성적이지만 성숙한 여성으로 탈바꿈했다. 이때 남편도 만났다. 매우 어려운 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앞 이 두 개가 없어 늘 입을 가리고 말하는 소심한 성격의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 앞 이가 부러졌는데 형편이 어려우니까 새 이를 만들어 넣지 못했어요. 영구처럼 돼버린 거죠. 원래 성격도 내성적인 데다 외모까지 그러니 엄청 힘들게 대학생활을 하더라고요."

동병상련이라고 그는 같은 과 친구였던 남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남편이 군대를 대전 근교로 가게 되면서 구 의원은 6개월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다.

"4학년 졸업할 무렵 남편이 제게 프러포즈를 했어요. 약국을 운영하면서 뒷바라지를 해줄 테니 한의대에 들어가라고 했지요. (웃음)"

졸업 후에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월급 약사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월급 약사 월급은 30만 원.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도 친정식구까지 도합 10명의 식솔을 건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렵게 지인들에게 500만 원을 빌려 지금의 구인약국을 인수했다.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18시간을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남편과 동생 세 명을 공부시켰다. 동생들이 결혼할 때 전세집도 해줬다. 그렇게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자신은 42살에 집을 장만했다. 이제 살 만하다 생각할 때 YWCA 활동가 김순영 국장이 약국을 찾아왔다.

"여성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 인식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했어요. 다른 지역은 여성 장애인 단체가 있는데 대전엔 아직 없었거든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도 대충 해결이 됐고 뭔가 사회적으로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던 때였다. 그래도 대표 자리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여성장애인연대(아래 여장연) 창립총회 때 이정순 평화여성회 공동대표(현 대전복지재단 이사장)가 대표를 하라고 권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느닷없이 대표직을 맡았지만 한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성격은 여장연 활동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처음 사용했던 사무실이 매우 협소했어요. 그래서 우리 집을 담보 잡아 1억 원을 보증금으로 넣었어요. 우리 친정어머니가 '너는 그래 그걸 언제나 뺄려고 1억 원을 겁도 없이 담보로 넣냐'고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엄마 그거 영원히 못 빼. 못 빼는 거야' 그랬어요.(웃음)"

120평 규모의 여장연 사무실은 그렇게 마련됐다. 원래 구 의원은 남 앞에 잘 나서지 않고 표현도 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장연 활동을 하면서 성격이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 동창회도 나가지 않던 구 의원이 후원을 위해서라면 어느 자리도 가리지 않고 나서게 됐다.

여성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도 힘을 쏟았다. 구 의원은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이 장애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제가 40대 초반이었을 때만 해도 목욕탕을 가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저를 쳐다보고 그랬어요. 특히 할머니들이 심했죠. 안 됐다. 얼굴은 이쁜데 어쩌다가 그렇게 말씀하시며 혀를 찼죠. 그런 관심이 사실은 부담스럽고 안 좋은 건데 그냥 못 본 척하면 좋은데 옛날에는 그랬어요."

시의원으로서의 포부

보완대체의사소통지원서비스 발전방향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보완대체의사소통지원서비스 발전방향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 구미경 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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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 대전시 의회 시의원이다. 지난 6대 지방선거에서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7월부터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구 의원은 대전시 예산이 투명하게 쓰이도록 잘 감시하겠다고 말했다.

"우선 저부터 청렴하게 생활해야겠죠? 다행히 저한테 별로 청탁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요. 잘 안 들어 준다고 소문이 나서요. (웃음)"

그는 여성장애인복지관과 특수학교 건립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특히 여성 복지관 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복지관은 많지만 여성 장애인 복지관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복지관을 사용하다 보면 장애인 입장에선 불편한 점이 많다고 했다. 건물을 짓고 운영을 하는 데서 장애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게 구의원의 주장이다.

"제가 비장애인들과 수영을 해봤는데 도저히 같이 할 수가 없어요. 장애인들이 속도가 워낙 느려 같이 하면 방해가 되거든요. 수영강사가 싫어하지요."

더구나 여성장애인들은 어려서부터 단절된 생활을 많이 해서 남성들과 함께 있으면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그의 롤모델은 양쪽 다리가 없는 미국의 모델이자 배우인 에이미 뮬린스다. 의족을 차고 수영복을 입은 그의 모습에 반했다는 그는 '몸이 삐뚫어져 있어도 예쁘다, '장애가 있어도 재밌다', '괜찮다', '행복하다', '즐겁다'. '장애는 조금 불편할 뿐이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인식이 유연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없어야 편견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냥 다리가 불편하니까 무거운 거 못 들겠네 그러면서 무거운 짐 들고 있으면 좀 들어주고 그렇게요. 우리 사회는 외모지상주의가 너무 강해요. 뚱뚱해도 장애인이고 너무 말라도 장애인이라니 소아마비를 앓아 엉덩이가 튀어나오고 한쪽 다리가 다른 한 쪽보다 얇은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누구 한 명이라도 여성 장애인들에게 예쁘다고 네가 최고라고 말해주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구미경 의원은?


보은에서 태어났다. 속리산 뒷골짜기로 열두살 무렵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돌 무렵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됐다.(지체 4급)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를 따라 일곱 살 무렵 대전으로 이사한 이후 대전에서 성장하고 학교를 다녔다. 1986년 충남대 약대를 졸업한 뒤 2년 후 서구 내동에 구인약국을 개업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약국일 밖에 몰랐던 구 의원은 2006년 대전여성장애인연대 대표를 맡게 된 인연으로 시민운동에 눈을 떴다. 여성장애인들의 대모 역할을 9년간 지속한 그는 2014년 제6대 지방선거에서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대전광역시의회 의원이 되었다.




태그:#대전광역시의회, #구미경의원, #대전여성장애인연대, #새천제6대지방선거비례대표, #여성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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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밥 대표이자 구술생애사 작가.호주아이오와콜롬바대학 겸임교수, (사)대전여민회 전 이사 전 여성부 위민넷 웹피디. 전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 전 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 여성권익상담센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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