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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현상은 실제로 DNA라는 유전자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유전자들은 우리 세포 내의 세포핵 속에 꼭꼭 잘 숨어 있다가, 세포의 분리라는 방법으로 자기를 증식해 나가거나, 암수의 결합을 통하여 또는 외부의 충격으로 인하여 변해 나간다. 그 변화의 과정은 무작위적(random)으로 발생하고, 그 가운데 적자생존이나 또는 인위적 이유(예: 유전공학) 등으로 새로운 생명체로 진화 또는 변화해 나간다."(27쪽)

박웅서의 <창조주 하나님과 과학>(성안당)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찰스 다윈이 고안한 무신론적 자연 발전 이론이 '진화론'인데, 그것과 '진화 현상'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죠.
박웅서의 〈창조주 하나님과 과학〉
▲ 책겉표지 박웅서의 〈창조주 하나님과 과학〉
ⓒ 성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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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밥상에 오르는 쌀도 1970년대 한국농업기술 연구원의 과학자들이 DNA를 개량하여 만든 볍씨로 추수한 것이고, 후지 사과도 일본사람들이 DNA를 변이시켜 만든 새로운 종자라고 하죠. 그것들이 '진화 현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크리스천들 사이에 '젊은 지구론'을 신봉하는 이들, 이른바 지구 창조를 6천년 혹은 1만 년으로 믿고 있는 이들은, 아직까지도 하나님께서 그 6천년 혹은 1만 년 전에 만드신 쌀을 그대로 먹고 있다는 것과 같은 꼴이라고 지적하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화의 과정을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 생명체의 발전을 도모하고 통제하는 하나님의 섭리마저 부정하는 고집이라고 비판하죠.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진화론은 무엇일까요? 그는 진화론을 한 마디로 '무신론'(無神論)으로 간주합니다. 이 세상과 만물이 과학적인 증명도 없이 자연의 변화와 진화가 모두 무작위적 변이와 적자생존에 의해 여기까지 왔다고 우기는 꼴이라는 이유 때문이죠.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그런 '신념'으로 가득 차 있는 비과학적 고집은 무신론적 진화론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부정해야 하는 것은 진화론이다. 그러나 진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종자개량을 한 사과를 먹고 나서 이것은 사과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진화 현상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활용하시는 눈앞에서 발생하고 있는 진실의 일부다. 진화 현상을 진화론과 혼동하는 교인은 자신의 무지 때문에 기독교가 과학을 적대시하는 비과학적 종교라는 누명을 초래하고, 과학을 사랑하고 그리고 과학을 전문으로 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229쪽)

지극히 공감가는 이야기이지 않나요? 그래서 웃기지만 충분히 그럴듯한 것도 상상해 볼 수 있겠죠? 이른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경작하라고 하면서 건넨 씨앗들이 지금까지도 그대로라면 어떻게 그 많은 박테리아나 항생물질에 대해 인간이 내성을 길러왔겠느냐는 점이죠. 그것은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창1:30)를 먹을거리로 삼게 했지만 홍수 이후엔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창9:3)고 말한 것과 통하는 부분이죠.

물론 이 책은 그런 종교와 과학의 관계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원죄와 자각'이라든지 '구원과 예수님의 요구' 등 다양한 종교적 고민들을 '합리적 사고방식으로'으로 풀어보고자 노력한 글들도 담겨 있죠. 그런 내용들을 하나의 수상집(隨想集)처럼 쓴 게 이 책이죠.

그 중에서도 내가 깊이 들여다 보게 된 부분이 있었죠. 이른바 '이슬람'과 관련된 게 그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습관이라고 말한 점도 그렇고, 그들에게는 '자카트'(Zakat) 제도와 '이자 금지 제도' 같은 독특한 '사회보장제도'가 있다고 하는 게 놀라웠습니다.

"모든 신자는 자신의 소득의 2.5%를 무조건 모스크에 헌납하여야 하는데, 이 금액은 모스크의 건설이나 그 운영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액을 불우한 공동체 구성원에게 나누어 주는 자금이다."(270쪽)

자카트(Zakat)이라고 불리는 이슬람의 헌금 제도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 자금의 배분 역할을 지방 자치단체나 거기서 지정한 사람이 맡는다고 하죠. 그만큼 종교와 국가의 합작으로 만들어가는 사회보장제도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이 1300년 이상 유지되어 왔기에 전 세계 무슬림들을 이슬람교라는 뿌리에서 이탈치 않도록 했다고 평가하죠. 더욱이 이 제도는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더 자비로운 사회 운영체제라고, 설명하죠.

그런데 어떤가요?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신약성경과 제자들과 바울의 가르침에는 이자 금지 명령이 없는 게 사실이죠.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자를 금하셨을 것으로 추측은 하죠. 다만 중세 유럽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자 금지 규범을 실행했다고 하죠.

하지만 르네상스의 유럽경제 속에서 다시금 이자 제도는 살아났고, 메디치 가(家)의 은행설립은 로마의 교황을 3명이나 탄생시킬 정도로 세속적 탐욕과 맞물렸고, 가톨릭교회는 자연스레 자본주의 제도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방편이 되고 말았다고 하죠. 그 뒤에 태동된 프로테스탄트는 과연 그 길에서 벗어났을까요?

왜 그가 그런 무슬림의 좋은 내용들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그게 정확한 사실인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무슬림을 떠받들기 위함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과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도록 하는 방편일 따름이죠.

이 책이 진정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바는 종교와 과학, 다시 말해 기독교와 과학의 입장과 자세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비논리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러니 과학자는 종교적 주장을 비합리적 주장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를 위해 기독교인들도 품어야 할 자세가 있겠죠. '진화 현상'을 '진화론'으로 오해하는 데서 하루 속히 탈피하는 게 그것이지 않을까요?


창조주 하나님과 과학

박웅서 지음, 성안당(2016)


태그:#창조주, #진화 현상, #진화론, #젊은 지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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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기억력보다 흐릿한 잉크가 오래 남는 법이죠. 일상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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