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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 끝에 내가 살던 집이 보인다. 팔순의 엄마는 차창 밖에 눈을 떼지 못한다. 엄마와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 옛집에 들러보자는 제안에 엄마가 흔쾌히 동의했다. 고향과 같은 이 집을 떠난 지 25년이 지났다. 하지만 개발이 안 된 덕에 옛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이 동네에서 '문방구 집 딸'로 불렸다.

우리 식구는 내가 네 살이 되던 해 문방구 집으로 이사했다. 1층엔 가게와 방이 있었다. 1층엔 미닫이문으로 나뉜 방이 두 개 있었다. 말이 좋아 방이 두 개지 엄청 좁아서 실은 방 하나 크기밖에 안 됐다.

진열장 안쪽엔 수돗가가 들어 있었다. 빨래나 설거지를 하다가 물건을 팔 수 있는 구조. 2층에는 부엌과 방이 두 개 그리고 화장실이 있었다. 우리는 처음엔 그 집의 1층만 사용하고 2층은 세를 놨다. 돈이 모자랐기 때문에. 물론 3~4년 뒤엔 돈을 모아서 2층까지 사용하게 됐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좁은 공간을 부엌으로 사용했다.

전 주인은 1층 방에 만화방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엄마는 만화책까지 그대로 인계받았다. 그래서 1층 방은 낮에 만화방이었고 밤엔 우리 식구가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부모님과 고등학교 1학년인 큰언니, 중학교 1학년인 작은언니, 초등학교 6학년인 오빠 그리고 네 살인 나까지 여섯 식구가 그 좁은 공간에서 복작거리며 문방구도 하고 만화방도 하고 생활까지 해야 했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녔고 엄마가 문방구와 만화방을 책임졌다.

온 가족이 달라붙었던 문방구 일

영화 <미나문방구> 중 한 장면.
 영화 <미나문방구> 중 한 장면.
ⓒ 별의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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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처음엔 물건값을 몰랐다. 그래서 한동안은 손님이 찾아오면 반가워하긴커녕 무서워서 숨어버렸다고 한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처음엔 의아했지만, 문방구 파는 품목이 많은 걸 생각하고는 이해가 됐다.

문방구에는 가족들이 도와야 할 일이 많았다. 시간 날 때 틈틈이 갱지를 세어둬야 했다. 연습장이 나오기 전엔 갱지를 사서 썼다. 문방구에선 갱지를 박스로 사서는 40~50장씩 묶음으로 팔았다.

갱지를 쌓아놓고 검지 손톱으로 동글동글 돌리면 갱지가 부채 펴지듯 펴졌다. 펼쳐진 종이를 "둘, 넷, 여섯" 이렇게 세어 한 번은 가로로 길게 다음번엔 세로로 길게 열십(十)자 모양으로 쌓아뒀다. 매일 저녁이면 엄마가 돈주머니 돈을 방바닥에 모두 쏟아냈다. 그러면 내가 백 원짜리 동전, 십 원짜리 동전, 오십 원 동전을 따로 모아 10층 탑을 쌓았다. 엄마는 지폐를 세고 내가 쌓아 놓은 동전 탑이 몇 개인지 헤아려 하루 매상을 계산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팔다 남은 카드를 종류별로 세어서 반품해야 했다. 카드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우리 4남매가 그날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참해야 했다. 그날 빠진 사람은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 엄마는 해마다 겨울이 오면 벌어 놓은 돈으로 연탄 100장을 사고 쌀을 사뒀다. 그러고는 겨울 방학 보낼 준비를 마쳤다고 든든해 했다. 사실 문방구라는 게 방학 때는 개점휴업 상태다.

신학기가 되기 전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남대문 시장으로 물건을 하러 다녔다. 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을 지나 힐튼호텔을 지나면 엄청 높은 건물이 보였다. 그 빌딩이 버스 창문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층수를 세기 시작했다. 세는 층이 높아지면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빌딩 끝을 바라보며 셌다. 하지만 이내 내 눈은 세던 층의 위치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내려야 할 정류장이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버스에서 내렸다.

문구 도매점에서 엄마는 가방 두 개에 물건을 가득 샀다. 엄마는 가방 손잡이에 손수건을 대고 들었다. 내 작은 손도 가방 손잡이 한쪽을 들었다. 한참을 걷고는 손을 바꿔 들어야 했다. 계단을 오를 때 손이 아파서 한 번은 쉬어야 했다. 언젠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왜 우리 집은 배달 안 시켜?"
"배달시키려면 물건도 많이 한꺼번에 시켜야 하고 안 좋은 물건을 보내."

지금 생각 같아서는 택시라도 타고 오면 좋았을 텐데. 한 번도 택시를 탄 적은 없었다. 문방구를 다 채울 물건을 그 키 작은 엄마는 두 손과 두 팔로 가방에 담아 옮겼다.

"엄마 없이도 살 수 있어?"... 내 대답은

미국에 사는 엄마 친구는 엄마에게 돈 벌러 오라고 권했다.
 미국에 사는 엄마 친구는 엄마에게 돈 벌러 오라고 권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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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를 시작하고 2~3년 됐을 때 미국에 사는 엄마 친구가 재봉기술이 있는 엄마에게 미국으로 돈 벌러 오라고 했다. 1970년대 그 시절엔 왜 그리 돈 벌러 집을 나가는 엄마들이 많았을까? 집 나간 엄마들은 월급날만 되면 동네에 찾아왔다. 남편 무서워 집에는 못 가고 문방구 앞에 나타나면 엄마가 그 집 아이를 불러왔다. 전봇대 뒤에서 눈물의 상봉을 했다.

삶이 힘겨웠던 엄마도 친구 말에 마음이 동해서 아버지 몰래 미국에 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 다른 자식들은 걱정이 안 되는데 학교에도 안 들어간 나만 걱정이 됐단다. 엄마가 내게 물었다.

"정민이는 엄마 없어도 살 수 있어?"
"응. 텔레비전만 두고 나가면 돼."

참 철 없는 대답이었다. 엄마는 내 손에 이순신 장군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쥐여 줬다. 엄마 없다고 울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사 먹으라고. 그걸 받고 좋아했다. 그런데 중학생 오빠가 엄마의 계획을 눈치채고 "엄마 때문에 공부가 안 된다"고 했단다. 엄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막내만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그렇게 문방구를 떠나지 못했다.

얼마 뒤, 아버지가 잘 다니던 회사에서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고 하셨다. 엄마는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아침 출근 때 아버지가 탈 차가 집 앞에 와서 대기했다. 몇 달인가 며칠을 그렇게 출근을 하셨다. 곧이어 그 회사는 망한다. 석유파동 때문에 망했다는데 엄마 말로는 아버지가 고향 은사님께 사기당한 거라고 했다.

"까딱 잘못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아빠의 하루 일과는 '화투로 운수 점치기'였다.
 아빠의 하루 일과는 '화투로 운수 점치기'였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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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을 다 날린 아버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일이라고는 가겟방에 앉아서 화투로 운수 떼기였다. 학교 다녀온 나는 아버지 옆에서 화투 가지고 재미있게 놀았다. 어느 날 아버지와 나를 보는 엄마의 눈빛을 봤다. 엄마가 원한 내 모습이 이건 아닐 거란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그날 이후 난 더 이상 화투 가지고 놀지 않았다. 얼마 뒤 아버지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일자리를 찾으러 나섰다. 엄마 덕분에 별 탈없이 그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차창 넘어 문방구를 보고 있는 엄마가 퇴직금 날린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는 정말 아버지 정신이 어찌 될 줄 알았어. 너희 아버지가 성격이 긍정적이니까 털고 일어났지. 까딱 잘못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아버지와 나의 화투놀이를 지켜본 엄마의 눈빛이 무엇이었는지 알겠다. 부침 많았던 그 시절 식구들이 안 굶고 살았던 건 아버지의 방황에 화 한 번 안내고 문방구를 묵묵히 지켜준 엄마 덕분이었다. 여든다섯 엄마는 문방구 간판도 유리 문도 없는 옛집을 눈에 꼭꼭 담는다. 잊지 않으려는 듯.


태그:#부모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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