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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맞벌이를 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맞벌이를 하는 많은 부부들이 그렇듯, 그녀도 많은 시간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듣게 됐다고 한다. 한 아이가 울면서 '엄마' 하고 소리치자, 그녀의 아이가 이렇게 질문했다는 것이다.

"왜 우는데 엄마를 찾아? 울 때는 할머니 찾는 거 아니야?"

왜 미안한 것은 항상 '엄마'일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녀는 '아쉬움과 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를 들은 우리는 그녀의 감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그녀가 느낀 '아쉬움과 미안함'은 죄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죄의식은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가 있는데, 그녀가 이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가 "울 때는 할머니를 찾는 거 아니야?"라고 질문했을 때, 거기에는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없다. 단지 아이는 자신에게 익숙한 돌봄의 주체는 '할머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번째로 아이가 '할머니'를 언급했을 때, 거기서 언급되지 않은 대상은 '엄마'뿐만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또 다른 한 쪽인 '아빠'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빠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쉬움과 미안함'을 느낄까? 개인적인 경험을 비춰보면 나는 지금껏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식의 말을 하는 아빠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대부분은 '엄마'에게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가 잘못 성장할까 걱정하거나, 혹은 자신의 소득이 더 많았다면 아내가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이야기하곤 했다.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왜 아빠들의 반응은 이렇게 달랐을까?

절대 자연적이지 않은 '모성'

이 같은 결과는 '돌봄'은 근본적으로 여성의 일이라는 생각, 여성은 본능적으로 돌봄에 능하며 아이는 여성이 돌볼 때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즉, 뿌리깊은 '모성에 대한 신화'가 원인인 것이다.

사회가 변해 여성이 가사와 돌봄 이외에도 많은 일을 하고있음에도, 이 뿌리 깊은 모성의 신화는 여전히 그대로다. 현재도 대부분의 '돌봄'을 주제로한 담론과 출판물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남성의 자리는 없다. 제도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이는 다를 바가 없는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법률은 '모성 보호와 여성 고용을 촉진'할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일과 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사람은 결국 여성인 것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회에 만연한 '모성의 신화'는 사실일까. 모성은 탈역사적인 개념이며 자연적인 것일까. 이 같은 인식을 정면으로 반박한 책이 아드리엔느 리치의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이다. 그녀는 모성의 신화를 가능하게한 '가정적인 것'과 '공적·정치적인 것'의 분리가 인간 역사에서 최근에 나타난 현상임을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공장이 생산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전, 가정은 세상의 일부였으며 노동의 중심지이자 생계의 단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여성과 남성, 그리고 이들의 아이들은 곡식을 재배하거나 옷감을 짜며 생겨를 이어왔다. 리치에 따르면 이 당시 여성이 자녀를 돌보는 일만을 하는 경우는 극소수 뿐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이 변화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공장이 생산의 중요한 거점으로 부상하고, 가내생산이 공장생산과의 효율성 경쟁에서 밀리면서 많은 수의 여성들이 공장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즉각 가부장제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졌다. 남성들에 비해 임금이 싼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의 지위를 위험하게 했으며, 남성이 여성의 임금에 의존해 살 가능성을 열어놨다. 여기에 이론적으로 봤을 때, 여성이 더 이상 결혼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렸다.

또한 가부장제가 위기를 맞은 것과 더불어 공장 노동의 방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공장은 단순한 노동력 보다는 복잡한 생산 설비를 다룰 숙련된 노동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돌봄과 교육에는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제시된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돌봄 노동을 개인적인 것, 각 가정의 일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가 맞닿아 모성의 신화는 탄생한다. 아동과 여성의 노동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가정이야말로 여성이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역'이라는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 같은 목소리를 관철시키는 방식은 모성을 도덕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즉 여성은 돌봄에 전념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의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들어진 모성의 결과 : 돌봄 노동 불평등

그렇다면 모성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은 정반대로 뒤집히고 만다. 모성이 자연적인 것이기에 여성이 돌봄 노동을 전담하게 된 것이 아니다. 거꾸로 모성에 대한 규범이 관철되고, 여성이 돌봄을 전담하는 시간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익숙해진 것이다. 즉 모성은 역사적인 것이며 탈자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성은 규범을 통해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집 밖으로 나서기 이전, 우리가 최초로 만나는 '여성과 남성'은 모두 가정에 존재한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오로지 '엄마'의 돌봄을 받거나 혹은 다른 여성(할머니·이모 등)의 돌봄만을 받거나 혹은 엄마와 아빠가 모두 일을 함에도 돌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엄마만이 지는 환경 속에서 자라난다면, 이 아이들은 자라서 돌봄을 누구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더 익숙해질까. 이 아이들은 돌봄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일이라는 '모성의 신화'를 학습하게 되지 않을까.

이 같은 상황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첫 번째로 돌봄 노동의 심각한 불평등 현상을 초래한다. 올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국민인식조사'를 살펴보자. 이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이하의 아이를 가진 20~40대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여성은 평일 2.48시간을, 주말에는 4.21시간을 돌봄 노동에 사용했다.

하지만 남성은 불과 평일 0.96시간, 주말 2.13시간 만을 돌봄 노동에 사용했다. 똑같이 일을 함에도 돌봄 노동의 시간은 두 배가 넘게 차이가 난 것이다. 직장을 가지지 않은 여성의 경우, 평일 4.21시간, 주말에는 5.02시간을 사용해 격차가 더 크게 나타났다.

다시 말해 돌봄 노동의 편중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 이 같은 결과가 거꾸로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을 강화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돌봄 노동 젠더화의 또다른 부작용 : 폭력적인 남성성

돌봄 노동의 젠더화가 초래하는 부작용이 단지 돌봄의 불균형뿐일까. 나는 사회에 만연한 모성의 신화는, 최근 문제가 되고있는 '폭력적인 남성성'을 재생산 하는 것과도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 특히나 어린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감정 노동이다.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은 매우 취약한 대상에게 엄청난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다. 동시에 그 대상은 쉽게 소통할 수 없는 대상이며 그렇다고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는 대상이다. 또한 그 대상은 돌보는 사람이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을 가지는 것을 무척이나 어렵게 한다.

그런데 이 같은 돌봄 노동에는 조건이 없다. 누군가가 그런 돌봄을 한다고 아이들로부터 댓가를 받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같은 보상을 해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물론 돌봄 노동의 성격상 이 같은 결과는 불가피하며,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물론 그렇다고 돌봄이 중노동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무조건적인 노동이 젠더화됐을 때다. 가령 어려서부터 무조건적인 감정 노동이 여성의 일로 인식되는 환경에서 자라나는 것. 그리하여 여성이 조건 없이 누군가를 물리적·감정적으로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더 나아가 이러한 노동이 여성의 천성과 부합하며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말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과 이별 폭력을 예로 들어보자(혹은 다른 종류의 젠더 폭력에도 대부분 적용이 가능하다). 많은 수의 데이트 폭력과 이별 폭력의 가해 남성들은, 상대 여성이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이 확실해질 때 발생한다. 가해 남성이 이 상황에서 폭력을 휘두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방이 나를 감정적으로 돌보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억울하다는 것이다(물론 이 억울함을 폭력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을 조건없이 돌보고 사랑해야할 이유는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감정적인 교류가 없다면, 그리하여 애정이 일방적이 된다면 그 관계가 지속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심지어 이러한 감정적 교류가 자로 잰듯한 것도 아니어서, 내가 아무리 상대방을 사랑해도 그 애정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애정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왜 여성이 누군가를 충분히 돌보거나 사랑하지 않았을 때, 말하자면 감정적 노동을 하지 않았을 때, 그것은 폭력의 대상이 될 정도로 나쁜 일이 될까. 어쩌면 그런 일의 원인 중 하나는, 가해 남성이 일평생 조건 없는 감정 노동을 하는 여성상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해답은 돌봄 노동의 탈젠더화

우리 사회의 돌봄 노동 편중화 현상은 여러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공공 보육을 확충하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돌봄 노동이 근본적으로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 이런 방식은 결국 '여성의 부담을 줄여주자'라는 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는 돌봄 노동에 대한 개념 전환, 돌봄이 당연히 여성의 일이 아니며 남성 또한 돌봄 노동의 주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식의 돌봄 노동의 탈젠더화는 노동의 쏠림 현상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사회의 많은 젠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울 때는 할머니를 찾는 그 아이에게 엄마는 '내가 울 때 그곳에 없었던 사람'으로 인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에게 엄마는 '내가 입을 옷을 사오는 사람'이나 '내가 사는 집을 마련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만약 그 아이가 더 자라난 다면 그 아이에게 엄마는 '사무실에서 동료 직원들과 일 하는 사람' '회사 하나를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돌봄 노동이 젠더화되고 모성의 신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이 아이는 곧장 이런 생각을 철회하고 '왜 우리 엄마는 돌보는 엄마가 아니었는가'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이들이 이런 식의 갈등과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돌보는 아빠'도 '일하는 엄마'도 평범하며 익숙한 환경을 만들고, 그리하여 돌봄과 감정 노동에는 성별이 없다는 인식과 함께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돌봄이 탈젠더화된 시기에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회에서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


태그:#여성, #모성, #돌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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