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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국가는 재해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왔다. 댐의 건설로 농업 용수의 부족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재난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으며, 농약과 백신의 개발로 곤충과 전염병에 대한 저항 능력도 커졌다. 생태계의 멸종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특정 생물의 성쇠는 더 이상 인간의 골칫거리조차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가뭄, 우박, 폭우, 곤충과 새의 습격, 전염병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난다면, 현재의 발전된 대처 능력으로도 큰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하물며 과거라면 더 피해가 심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말, 조선에서 이 모든 재해가 한꺼번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17세기 '소빙하기' 조선에선 어떤 일이 있었을까?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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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태양의 흑점 운동에 생긴 변화로 인해 태양 에너지가 지구에 덜 전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구 평균 온도가 내려가고, 동아시아를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이상기후와 재해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를 빙하기에 빗대어 '소빙하기'라고 한다.

광주교육대학교 김덕진 교수의 저서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는 이러한 소빙하기 시절 조선에서 있었던 최악의 기근인 경신대기근을 다룬 책이다. 경신대기근은 현종 11년인 1670년 경술년과 현종 12년인 1671년 기해년에 있었던 두 해에 걸친 대기근이다.

17세기 말 조선의 국왕은 예송논쟁으로도 유명한 현종이었다. 조정에서는 서인과 남인이 국왕의 정통성을 두고 벌인 제1차 예송논쟁의 결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다만 후기처럼 서인의 독주가 이루어지던 시기는 아니었고 서인이 권력을 잡되 정승 허목과 판서 김좌명 등이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현종의 즉위 이후부터 크고 작은 재난이 있었으나,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1670년 봄부터 이상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봄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가뭄이 든 것이다. 씨를 뿌려야 하는데도 물이 없으니 앞으로 농사 지을 일이 막막했다. 조선같은 농본주의 국가에선 위험한 일이었다. 물론 물이 부족한 것 자체로는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동시에 거대한 우박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박이 너무 커서 사람이 맞아 죽고 농작물도 짓이겨질 정도였다. 가뭄과 우박이 동시에 떨어지는 재해에 현종은 위기감을 느끼고 기우제를 지낸다.

그러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또 비가 미친 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남부 지방에서 홍수가 터지면서 사람들이 떠내려갔을 뿐 아니라 수확기도 한참 남은 농작물들이 땅에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종은 이번엔 날이 맑기를 바라며 기청제를 지낸다. 비가 좀 오라고 제사를 지냈더니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서 다시 맑기를 비는 황당한 판국이었다.

이러한 기우제와 기청제는 근대의 시각으로 보면 비합리적이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국왕의 부덕함이 재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당시의 재이론에 따르면 합당한 것이었다. 또, 당시의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극복하기엔 너무나도 큰 재해가 동시에 일어났다.

기청제 이후에는 곤충과 새와 관련한 재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곤충들이 갑자기 논밭을 습격하여 쌀 한 톨도 남겨놓지 않고 곡물을 먹어치우는가 하면, 참새가 천만마리씩 날아다니면서 밭에 앉았다.

농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를 먹일 것마저 부족해지던 상황에 소 전염병인 우역이 돌면서 소까지 죽어버렸다. 소가 죽는다는 것은 굉장히 끔찍한 타격이었다. 앞으로 재해가 잠잠해져도 농사를 지을 소 자체가 없어졌으니 원활한 복구가 불가능해질 것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결과, 사람을 잡아먹는 재앙이 시작되었다.

진휼소 열었으나 고위 관료도 죽고 종친도 구걸하러 다녀

더 이상 일반적인 방책으로 재해를 막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달은 조선 조정은 진휼청을 설치하고 한양 인근에서 식량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방은 수령의 축소 보고 및 잦은 재해로 끔찍한 상황이었다. 경상도 인구의 20%가 기아상태를 겪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에 지방 사람들이 한양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진휼소가 미어터지기 시작했다. 영양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니 전염병이 더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망할 판이니 비상 군사 시설인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식량까지 풀어서 먹였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었다.

왕실의 종친도 쌀을 구걸하러 다녀야 할 판이었다. 진휼을 담당한 관리들마저 죽어버렸다. 한양엔 시체를 치울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말 말그대로 대재해였다. 이 재해로 최소 수십만, 크게는 백만의 인구가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이 책은 단순히 조선에 있었던 재해에만 주목하지 않았다. 재해를 겪는 것도, 대처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조선 관료들의 정책에도 주목한 것이다. 당시 김좌명을 비롯한 실무파 관료들은 실제 진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주요 시설의 식량 이동과 분배를 맡아 대처에 주력했다. 조금이라도 식량을 더 확보하기 위해 도성의 군사가 줄어들었고, 신분과 관직의 매매가 실시되었다. 청나라 쌀이라도 구해보자는 말이 나왔지만 운송과 정치적 문제를 이유로 기각되기도 했다.

재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회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공명첩이 발행된 탓에 신분 질서가 흔들렸고, 지방의 인구 구조가 크게 변형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현종의 리더십이 위기를 겪는다. 서인들 일부가 왕의 부덕을 탓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십만 명이 죽고 기근이 진정되자 현종은 제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이 책은 2008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출판기획안 공모 당선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단순히 재해에 집중해서 글을 읽어도 워낙 끔찍한 일들이 극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집중해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재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움직임에 집중해서 읽으면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도 있는, 참 좋은 책이다.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 우리가 몰랐던 17세기의 또 다른 역사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2008)


태그:#대기근, #경신 대기근, #조선, #현종, #재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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