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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산, ▲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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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산을 ▲로 표시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산을 세모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많은 산들은 정상 꼭지점에 닿을수록 뾰족한 암석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물론 아래로 내려올수록 산이 평지와 사방으로 맞닿으며 펑퍼짐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산의 높이는 해발(海拔), 즉 바다 수면에 맞춰 "백두산 2744m" 식으로 나타낸다.

위로 올라갈수록 산이 가파르고 단단한 암벽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비와 바람 때문이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각이 뒤집힌 빙하기 이래 줄기차게 쏟아지고 몰아쳐댄 폭풍우는 흙들을 낮은 곳으로 쓸어내렸다. 돌들도 물길에 휩쓸려 저지대로 밀려갔다.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라는 이육사의 '광야'도 그러한 자연의 변화를 반영한 표현이다.

산은 일반적으로 정상 쪽으로 갈수록 뾰족해진다

웬만큼 흙들이 씻겨내려가면 거대한 바위들만 남는다. 가장 무겁고 큰 거대 암석은 여기저기서 산봉우리가 되고, 그보다 작은 바위들은 굴러내려 곳곳에 쌓이고 박혀 산비탈을 만든다. 세월이 흘러 그 틈틈마다 흙이 쌓이면 이윽고 나무와 풀들이 자라난다. 산보다 낮은 곳은 들판이 되고, 그보다 더 낮은 곳은 물이 스며들고 흘러 강을 이룬다. 강은 가장 낮은 바다로 이어지고, 지구 모든 바다의 수면은 높이가 같으므로 산마다 '해발 몇 미터'라는 값이 생겨난다.

1과 2가 닮은꼴일까, 2와 3이 닮은꼴일까
 1과 2가 닮은꼴일까, 2와 3이 닮은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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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의 임진왜란 유적 천생산성은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격언을 되새기게 해준다. 산의 정상부가 뾰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천생산은 생긴 모습이 ▲와 전혀 닿지 않는다. 천생산에 올라보지 못한 이들도 그 점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도록 실물 사진을 살펴보자.
 
'위의 세 사진 중 1과 2가 닮은꼴일까, 2와 3이 닮은꼴일까?' 하고 물으면 대체로 1과 2쪽을 선택할 것이다. 1과 2는 둘 다 ▲꼴이지만 3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은 경상남도 합천군의 임진왜란 유적지 악견산이고, 2와 3은 천생산이다. 닮은꼴인 1과 2는 정작 다른 산을 찍은 사진이지만, 모습이 전혀 딴판인 2와 3은 한 산을 촬영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천생산은 정상이 들판처럼 평평하다

공격하는 왜군 입장에서는 한없이 가파른 암벽 위 난공불락의 산성인 반면, 아군으로서는 넓고 평평한 고지대에서 적을 내려다보는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주둔지는 그야말로 최고의 요새이다. 천생산성이 바로 그런 곳이다. 곽재우 장군은 천생산성의 이 장점에 각별히 주목했다.

따라서 천생산성을 답사하는 역사 여행자는 3의 실물을 볼 수 있는 산길을 걸어야 한다. 3은 못 보고 2만 눈에 담으면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 주둔한 까닭을 헤아려 볼 수 없다. 천생산성을 1과 2처럼 봉우리가 뾰족한 산 위에 있다고만 여기고 하산해서는 '98% 부족한' 답사에 멈추고 만다.

천생산성의 원경(장천면 신장리 입구에서 본 모습), 중경(올라가던 중간쯤에서 볼 수 있는 모습), 근경(오른쪽 아래에 있는 천룡사에서 생겨난 소리들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오른쪽 약간 높은 지점으로 올라 바라본 천생산성의 전경)
 천생산성의 원경(장천면 신장리 입구에서 본 모습), 중경(올라가던 중간쯤에서 볼 수 있는 모습), 근경(오른쪽 아래에 있는 천룡사에서 생겨난 소리들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오른쪽 약간 높은 지점으로 올라 바라본 천생산성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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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산성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그 지형이 전혀 다르다. 원경은 그저 보통의 산처럼 ▲로 보인다(위 세 사진 중 '원'). 그런데 실제 답사를 해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정상부가 가로로 평평한 일직선을 이루고 있어 놀라게 된다('근'). 문제는 천생산이, 그런 '두 얼굴'을 모든 답사자들에게 한결같이 노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천생산은 특정 산길을 걸어 온 답사자에게만 자신의 온몸을 보여준다. 

산 정상부에 올라간 뒤에는 천생산성을 볼 수 없다. 정상부에 오른 사람이 보는 것은 천생산성 그 자체가 아니라 천생산성의 일부 성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천생산성을 답사하는 것은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이 그 감촉만으로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단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천생산성 답사의 핵심은 수평으로 이어지는 1km 성곽을 보는 것

천생산성 답사자는 반드시 가로로 1km, 그것도 수평으로 이어지는 (아래 사진 같은) 성곽을 보아야 한다. 등산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면 1km가 넘는 성곽 전체를, 임진왜란 때의 왜군과 같은 심정으로 쳐다보고, 또 느껴야 한다. 절벽 위에, 거대 바위 틈틈에 돌을 메워넣어 성곽을 이어낸 독특한 축성법의 전모를 눈에 담아야 한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천생산성. 평지처럼 보이는 정상부 아래에 가로로 그은 실선처럼 보이는 흰 띠가 산성이다.
 천생산성. 평지처럼 보이는 정상부 아래에 가로로 그은 실선처럼 보이는 흰 띠가 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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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 산42-2번지 외 11필'에 있는 천생산성(경상북도 기념물 12호)은 '둘레가 1㎞를 넘으며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돌로 이어 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 형식을 띠고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천생산성에 대한 설명이다. 누리집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하지만 이는 수긍하기 어려운 해설이다.

<삼국사기>는 혁거세왕이 재위 21년(기원전 37)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 불렀다'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혁거세왕과 관련해서는 유일한 축성 기사이다. <삼국사기>를 전적으로 믿는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혁거세왕이 경주에서 상당히 먼 구미까지 점령하여 천생산성을 쌓았다면 이는 대단한 정복 사업이다.

김부식은 '국정' 국사 교과서인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으로 쓰는 데 골몰했다. 그 결과가 신라의 건국 시점을 기원전으로 잡고, 삼국 중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다는 식으로 나타났다. 그런 김부식이, 혁거세왕의 천생산성 축성과 같은 대업적이 사실이라면 기록에 남기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문화재청도 박혁거세가 천생산성을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천생산성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간파한 왜군은 포위한 채 시간을 끌었다. 곽재우 장군은 산성 북쪽 끝 돌출 절벽 위에 검은 말을 세워놓고서 말등에 하얀 쌀을 부어 마치 물로 말을 씻는 양했다. 말을 목욕시킬 만큼 물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왜군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사진에 아주 자그마하게 사람들이 보이는 절벽 위가 바로 곽재우 장군이 말을 세웠던 미덕암이다.
 천생산성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간파한 왜군은 포위한 채 시간을 끌었다. 곽재우 장군은 산성 북쪽 끝 돌출 절벽 위에 검은 말을 세워놓고서 말등에 하얀 쌀을 부어 마치 물로 말을 씻는 양했다. 말을 목욕시킬 만큼 물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왜군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사진에 아주 자그마하게 사람들이 보이는 절벽 위가 바로 곽재우 장군이 말을 세웠던 미덕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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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천생산성을 쌓은 이가 혁거세왕?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에는 '전한다'가 한 번 더 나온다. 천생산성은 '곽재우(1552∼1617) 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운 곳으로 임진왜란 때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물을 끊자, 곽재우는 성벽 끝에 흑마를 세우고 엉덩이에 쌀알을 붙여 말을 씻는 시늉을 했다. 이 쌀알이 빛에 반사되어 물방울로 보이자 왜적이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혁거세왕의 최초 축성 운운과 달리 곽재우 장군의 기발한 속임수 전략은 실제 상황일 개연성이 높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성격이 다른 설화라 할 만하다.

임진왜란 당시 구미 일원에 몰려온 일본군은 천생산성에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저 산성에서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오?" 하고 묻는 일본군에게 현지의 촌로가 "우물이 하나뿐인 곳이니 물이 제일 귀하다오." 하고 대답한 것이 화근이었다. 일본군은 산을 포위한 채 시간만 끌었다. 험악한 산성을 죽기살기로 공격할 것 없이 조선군이 저절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작전이었다.

게다가 일본군들은 산 둘레 곳곳에 연못을 팠다. 산성 아래에 스며들어 있는 물들을 고스란히 뽑아버리겠다는 의도였다. 물은 본래 노자가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악) 故幾於道(고이어도)', 즉 "(물은)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니, 그런 까닭에 거의 도에 가깝다."라고 말한 것처럼 낮은 곳으로 스며드는 속성을 가졌다. 따라서 일본군들의 연못 파기 작전은 천생산성의 식수를 더욱 마르게 만드는 데에 효험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 탓인지, 지금도 천생산 둘레에는 크고 작은 연못들이 매우 많다.)

곽재우 장군은 왜군들의 눈에 잘 띄는 산성 북쪽 끝 돌출 절벽 위에 검은 말을 세워놓고 말등에 하얀 쌀을 부었다. 물로 말을 씻는 척한 것이었다. 흑마를 세운 것은 흘러내리는 쌀의 하얀 빛깔이 말의 검은 색과 대조를 이루어 왜적들의 눈에 잘 보이게 하려는 조치였고, 쌀을 말등에 줄줄 부은 것은 말을 목욕시킬 만큼 물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속임수였다. 왜군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곽재우 장군의 기발한 지혜가 적들을 통쾌하게 기만한 순간이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흑마가 서 있었던 바위에 미덕암(米德岩, 쌀 덕을 본 바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남 의령 충익사 '곽재우 장군 유적지' 안내에는 제외된 천생산성

경남 의령 충익사(곽재우 사당) 기념관의 게시물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에는 천생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경남 의령 충익사(곽재우 사당) 기념관의 게시물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에는 천생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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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남 의령 충익사 기념관의 게시물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에는 천생산성이 빠져 있다. 대구 망우공원, (대구 달성군) 현풍 예연서원, 신도비, (경남) 창녕 화왕산성, 망우정, 기강 전적지, (경남) 의령 충익사, 현고수(북을 걸어놓고 두드리며 처음 의병을 모은 나무), 생가, 벽화산성, 정남진 전적지만 표시되어 있을 뿐, 천생산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추측하자면,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나타낸 게시물이기 때문에 빠졌거나, 아니면 천생산성은 큰 싸움이 벌어진 격전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된 듯하다. 후자라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승리(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고 갈파한 <손자병법>의 명언을 참고할 일이다. 천생산성에서 곽재우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격퇴했다. 이야말로 대단한 쾌승이다. 천생산성은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 중에서도 '가장 좋은 승리'의 모범을 보여준 뜻깊은 전승지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천생산성 미덕암 위, 곽재우 장군이 흑마를 세워두었을 법한 자리에 검은 말 동상을 세워두면 좋을 것이다. 아득한 산 아래에서, 임진왜란 때의 왜군처럼, 천생산 정상부를 쳐다보며 '저게 뭘까?' 하고 서로에게 묻고 답하는 재미, 이른바 '스토리텔링'은 그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흑마를 배경으로 찍은 기념 사진들 또한 천생산성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입소문'의 몫을 감당해줄 터이다.

거대 바위들 사이에 돌을 쌓아 성곽을 구축한 기법을 잘 보여주는 천생산성
 거대 바위들 사이에 돌을 쌓아 성곽을 구축한 기법을 잘 보여주는 천생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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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은 곽재우 장군이 흑마를 세워둔 채 왜적들을 속였다는 성벽 끝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 형식, 즉 험준한 암벽 사이를 돌로 이어 쌓은 모습도 보고 싶게 한다. 하지만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 산42-2번지는 천생산 정상 의 주소일 뿐, 천생산성의 전모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지침은 못 된다.

천생산은 해발 407m에 지나지 않는다.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천생산성은) 석벽(石壁, 암석 절벽)이 반을 넘고 천연으로 된 험한 곳'이라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사면에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 성이 되었다. 하늘(天)이 만든(生) 것 같다고 해서 천생(天生)산성이라 부른다.'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표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어째서 천생산을 '하늘이 만든 산'으로 여겼을까

언중(言衆, 그 말을 사용하는 대중)이 오랜 세월을 두고 이 산을 천생산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천생산이라는 이름이 사회성을 얻은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이 산을 '하늘이 만든 산'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함부로 첫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실제로 천생산의 동쪽과 북쪽, 즉 천평면 신장리 방면은 온통 수직의 절벽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석벽이 반을 넘는다'는 표현 그대로, 동쪽과 북쪽 비탈을 걸어 천생산성으로 올라갈 마음은 애당초 먹지 않아야 한다.

천생산 동쪽의 가파르고 거친 비탈과 그 아래 낙동강이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풍경. 이 사진을 보면, 보통의 일반인은 이쪽으로 천생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을 버릴 것이다. 천생산의 북쪽도 가파르기는 동족과 마찬가지이다. 북쪽의 미덕암 일원은 천생산 중에서도 가장 험한 절벽을 보여준다. 미덕암 앞 안내판도 미덕암 일원을 '천생산 중에서도 천연으로 깎은 듯이 험준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내판은 곽재우 장군이 백마를 세워 두었다고 잘못 안내하고 있다.)
 천생산 동쪽의 가파르고 거친 비탈과 그 아래 낙동강이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풍경. 이 사진을 보면, 보통의 일반인은 이쪽으로 천생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을 버릴 것이다. 천생산의 북쪽도 가파르기는 동족과 마찬가지이다. 북쪽의 미덕암 일원은 천생산 중에서도 가장 험한 절벽을 보여준다. 미덕암 앞 안내판도 미덕암 일원을 '천생산 중에서도 천연으로 깎은 듯이 험준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내판은 곽재우 장군이 백마를 세워 두었다고 잘못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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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천생산성 답사는 북쪽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천생산성의 1km 수평 성곽을 확인할 수 있고, 산 정상부의 평평한 모습도 볼 수 있다. 남쪽에서 차를 이용하여 청룡사(구미시 천생산길 200)에 접근하면 성곽 바로 아래에 닿기 때문에 전쟁터로서의 산성을 답사하는 의의가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1km 수평 성곽도, 정상부의 평평한 지형도 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는 최고의 출발점은 장천면 신장2길 272, 마을 끝집 옆 빈터이자 천생산 첫 들머리이다. 물론 천생산 북쪽 천길 석벽을 오를 수는 없으므로 산자락을 타고 남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왼쪽의 산비탈과 오른쪽의 황무지 사이로 길은 줄곧 이어진다.

이윽고 길이 산 안으로 들어선다. 논밭이라고는 주위에 한뼘도 없는데 뜬금없이 연못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일본군들이 산성 아래에 고여 있는 지하수를 뽑아내려고 연못을 팠다더니 이게 바로 그 중의 하나로구나! 연못가에 서서 한참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놀랍게도 세모꼴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천생산 정상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천생산성의 참모습을 정확하게 바라볼 지점 꼭 찾아야

천생산성은 아무렇게나 올라서는 역사 답사가 되지 않는 유적지이다. 천생산성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산 정상부 지형이 평탄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
 천생산성은 아무렇게나 올라서는 역사 답사가 되지 않는 유적지이다. 천생산성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산 정상부 지형이 평탄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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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이마다 다르지만 20분가량 더 올라가면 천생산성 정상부가 완벽하게 평평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조망 지점이 나타난다. 답사 출발 이전에 사진으로 보았던 장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감동이 정말 '밀물처럼' 밀려온다. 임진왜란 당시 산을 둘러쌌던 왜적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면서 아군들이 느껴던 희열도 이보다는 못했으리라!

가로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성곽 1km가 너무나 생생하게 보인다. 천생산성은 엄청난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정상부는 들판처럼 평평하다는 놀라운 사실이 눈으로 완벽하게 확인된다. 이제 성 안으로 들어가 산성 동쪽과 북쪽의 천연 절벽을 확인하고, 주로 서쪽 비탈을 따라가며 쌓여있는 성곽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곽재우 장군이 흑마를 세웠던 미덕암에 올라보면 천생산성 답사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동쪽 절벽 위에 서서 멀리 북쪽 끝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미덕암 위에 올라 제 나름의 멋진 자세를 뽐내고 있다. 그래! 이 찬 날씨에 이곳까지 올라 저렇게 천연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저들이야말로 의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성내 평지를 걸어 미덕암을 향해 나아간다.

천생산성은 성곽이 높을 까닭이 없다. 성곽 아래가 온통 절벽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의 동쪽과 북쪽은 천길 낭떠러지인 탓에 아예 성곽을 수축할 필요도 없었다.
 천생산성은 성곽이 높을 까닭이 없다. 성곽 아래가 온통 절벽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의 동쪽과 북쪽은 천길 낭떠러지인 탓에 아예 성곽을 수축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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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산성 답사로 
천생산성은 여정을 잘 잡아야 제대로 된 답사를 할 수 있는 역사 유적이다.
(1) 출발 지점 : 구미시 장천면 신장2길 272 (산의 북쪽 지점)
(2) 출발점에서 오른쪽으로, 산비탈과 버려진 농토 사이로 나 있는, 산의 서쪽 비탈을 타고 이어지는 등산로를 걷는다. 연못과 묘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보면 천생산성의 정상부가 반쯤 수평으로 느껴지고, 가로로 이어진 산성 성곽이 희끗희끗하게 보여 '저게 절벽인가? 성곽인가?' 가늠이 잘 안 된다. 묘소를 지나 왼쪽으로 간다. 등산객들이 매달아놓은 표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3) 고개에 닿는다. 왼쪽으로 가면 산성, 직진하면 천룡사로 간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이정표에 없는 오른쪽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20미터가량만 가서 뒤돌아보라. 천생산성의 정상부가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다. 사진을 찍는다.
(4) 되돌아서 길을 따라 걸으면 산성 입구에 닿는다. 동쪽과 서쪽,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동쪽으로 가야 한다. 서쪽으로 가면, 올라오면서 쳐다볼 때 희끗희끗한 수평 실선으로 보였던 복원된 성곽을 볼 수 있지만 미덕암에 다녀온 후 내려오면서 보는 데 견줘 성곽 실감이 떨어진다. 미덕암에서부터 이곳까지 성곽이 내리막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산하면서 보아야 아찔한 느낌이 강렬하다.
(5) 조금 올라가면 동쪽으로 낭떠러지가 펼쳐진 풍경을 보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표현을 떠올린다. 여기서부터 북쪽을 향해 미덕암까지 걸으면서 천생산성의 내부가 아주 평평하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한다.
(6) 동쪽 낭떠러지 위를 따라 걷다가 중간쯤 가면 북쪽에 툭 튀어나온 절벽이 보인다. 미덕암이다. 미덕암 사진은 이곳에서 찍어야 실감이 난다.
(7) 길 가운데 바위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곽재우 부대가 깃발을 꽂기 위해 판 것이다.
(8) 산불 감시 초소, 천생산성 유래비, 제단이 나타난다.
(9) 초소 앞에 세워져 있는 '천생산성에 대하여' 라는 안내판의 내용을 읽는다.
(10) 미덕암에 올라 아득한 절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바라본다. 이곳에 서려 있는 흑마와 쌀 이야기를 떠 올려본다.
(11) 초소 뒤편으로 가면 깃발 구멍이 많이 나 있다.
(12) 산 서편을 감고 있는 성곽 위를 천천히 걸으며 답사한다. 암석과 암석 사이에 돌을 쌓아 성곽을 1km나 이은 독특한 축성술을 잘 감상해야 한다.
(13) 천생산성의 전경을 잘 볼 수 있었던 (3)으로 돌아와 다시 전경을 감상한다. 실제 답사를 한 후 보는 풍경이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14) 산길로서는 아주 평이하여 전혀 위험하지 않지만 그래도 천천히 걸어서 하산한다.       

미덕암 입구 제단 뒤에 세워져 있는 천생산성 유래비
 미덕암 입구 제단 뒤에 세워져 있는 천생산성 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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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산성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바위에 동그랗게 판 구멍들. 곽재우 부대가 깃발을 꽂느라 판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천생산성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바위에 동그랗게 판 구멍들. 곽재우 부대가 깃발을 꽂느라 판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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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595년 8월 5일자에 실려 있는 천생산성 관련 기록(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
천생산성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풍경. 천생산성의 동쪽과 북쪽에는 이런 성곽이 없다. 천혜의 엄청난 절벽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천생산성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풍경. 천생산성의 동쪽과 북쪽에는 이런 성곽이 없다. 천혜의 엄청난 절벽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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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병이 아무리 정예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서 양식을 얻지 못하면 깊이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중략) 민간의 곡식을 모두 관창(官倉)에 납입할 수 없으니, 적을 만나 매우 급하게 되면 반드시 적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만일 곳곳에 산성을 설치하여 병화(兵禍)를 피하는 곳으로 삼아 민심으로 하여금 미리 믿는 바가 있게 하면, 위급할 적에 자연 자기들이 소유한 것을 가지고 산성에 들어가서 보전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참으로 오늘날의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전조(前朝) 5백 년 동안 적변이 있을 적마다 사신을 나누어 보내어 백성을 독려하여 산성에 들어가 보전하게 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은 민력(民力)이 궁핍하고 인심이 흩어졌으므로 산성을 축조하는 역사(役事)를 갑자기 거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형세가 어렵다고 하여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입니다.

(경상)우도(右道) 성주의 용기산성(龍起山城)과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과 단성(丹城)의 동성산성(東城山城)은 이미 수축하였으니, 각기 그곳에 창고를 설치하여 그 안에 먼저 관곡을 저장해서 꼭 지킬 땅으로 정하고, 산 밑에 사는 근처의 거주민들과 미리 약속하여 흩어져 떠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들어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한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밖의 경내에 형세가 편리한 곳에도 모두 이 방법에 따라 조치해야 할 것이나, 이는 일을 담당한 신하가 몸소 두루 답사하여 마음을 다해서 시행하는 데 달렸을 뿐이므로 조정에서 지시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구는 도내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좌우를 견제할 수 있으니, 이곳에는 더욱이 중진(重鎭)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달성산성(達城山城)이 읍내에서 5리쯤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 형세가 매우 좋고 물력도 꽤 넉넉하니, 편의에 따라 산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전일 의금부(義禁府)의 죄인을 사면하여 남방에 성을 쌓도록 하였습니다마는, 성은 크고 민력이 부족하면 다른 죄인을 더 보내고 그래도 부족하면 혹 유정(惟政)이 거느린 승군(僧軍)으로 돕게 한다면 날짜를 정하여 성취할 수는 없겠지만, 편의에 따라 점차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포루(砲樓)가 성을 지키는 데에 가장 절실한 것인데, 도관찰사(都觀察使)도 평양에 있을 적에 일찍이 그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시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이 있는 모든 곳에 포루를 설치해야 하겠습니다만, 화약을 대대적으로 준비한 뒤에야 적을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북 구미) 선산의 금오산성 및 (경북 구미) 인동의 천생산성도 형세를 살펴 아울러 요리하여 큰 진(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중략)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천생산성 유래비 비문
 천생산성 유래비 비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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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천생산성, #곽재우, #임진왜란, #배설, #금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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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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