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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 경북 구미 금오산 전경 (오른쪽 사진) 금오산 정상 턱밑 절벽 위에서 내려다 본 구미시 전경. 사진 하단 가운데의 표지판에는 '위험'이 쓰여 있다.
 (왼쪽 사진) 경북 구미 금오산 전경 (오른쪽 사진) 금오산 정상 턱밑 절벽 위에서 내려다 본 구미시 전경. 사진 하단 가운데의 표지판에는 '위험'이 쓰여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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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금오산(金烏山, 976m)의 본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다. 이 산은 1970년 우리나라 공원 중 처음으로 '도립공원' 지정을 받았다. 하지만 금오산의 유명세는 도립공원 지정보다 아도(阿道)화상 덕분에 얻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금오산에는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의 전설이 짙게 서려 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태양 안에 살고 있는 발(足) 셋(三) 달린 금까마귀(烏)를 해의 핵으로 여기고 숭배했다. 하루는 아도화상이 금(金)빛 까마귀(烏)가 대본산(山) 위의 저녁놀 속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삼족오(三足烏)를 보고 놀란 아도화상은 "저 산이 바로 태양의 정기를 받은 금오산(金烏山)이로다!" 하고 찬탄했다. 그 이후 대본산이 금오산으로 바뀌었다.

금오산 이름을 지은 아도화상의 초상. 그는 도리사(신라 땅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 아래의 모례네 집에 머물면서 포교를 시작했는데 그때 마신 우물이 지금도 모례정(문화재자료 296호,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978)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모례정 옆에는 신라불교초전(初傳)기념관이 있고, 위의 초상은 그 건물 안에 걸려 있는 것을 촬영한 사진이다.
 금오산 이름을 지은 아도화상의 초상. 그는 도리사(신라 땅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 아래의 모례네 집에 머물면서 포교를 시작했는데 그때 마신 우물이 지금도 모례정(문화재자료 296호,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978)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모례정 옆에는 신라불교초전(初傳)기념관이 있고, 위의 초상은 그 건물 안에 걸려 있는 것을 촬영한 사진이다.
ⓒ 신라불교초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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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에는 길재를 기려 세워진 채미정(기념물 55호), 마애보살 입상(보물 490호), 금오산성(기념물 67호)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대혜폭포, 도선굴, 약사암 등 뛰어난 볼거리들도 산재한다. 대혜(大惠)폭포는 '물을 구미 일원 평야로 흘려보내 많은 농민들에게 큰(大) 은혜(惠)를 준다' 하여 얻은 이름이고, 도선굴은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선구자 도선스님이 도를 깨친 굴'이라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 물론 도선굴은 조선을 거부한 고려 충신 길재의 은신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선굴이 임진왜란 유적지라는 사실은 뜻밖에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구미 시지>는 1592년 4월 28일 상주가 함락되고 순변사 이일이 도주해 버렸을 때 '선산부사 정경달(丁景達)은 잠시 몸을 피했다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관군과 군민들을 모아, 지략을 겸비한 허설(許說), 김유일(金惟一)로 하여금 금오산에 진을 치고 종일 적과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면서 '(정경달이) 도선굴에 의병을 집결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뒤이어 이준(李埈), 이항복(李恒福), 정유길(鄭惟吉)이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니 10월 15일 선산의병은 상주 죽현으로 옮겨 진지를 구축하고 지형과 지세를 가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과 크게 싸웠다, (중략) 이듬해 2월초에는 창석(蒼石) 형제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무등곡에서 적을 섬멸하고 4월에 금오산 도선굴로 돌아왔다'라는 기사도 싣고 있다.

도선굴은 임진왜란 당시 선산의병의 의병소(의병 본부)였던 것이다. (선산부사, 선산의병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1978년 선산군 구미읍이 구미시로 승격하고, 1995년 구미시 선산읍이 되지만 그 이전까지는 선산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의병들이 모여 싸움을 준비했던 도선굴

도선굴(왼쪽 사진)으로 가는 절벽 길의 풍경(오른쪽 사진)
 도선굴(왼쪽 사진)으로 가는 절벽 길의 풍경(오른쪽 사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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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은 걸어서 접근해야 그 향기를 제대로 맡을 수 있는 곳이다. 산이 본래 원경부터 먼저 본 후에 입산을 해야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의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는 땅이지만, 금오산은 대혜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들어낸 맑고 잔잔한 호수를 거느리고 있어 특히 그러하다. 산 발밑까지 이어지는 호숫가 물빛 길을 걷는 천연의 호사를 어찌 놓칠 것인가.

물이 끝나는 지점에 서 있는 박희광(朴喜光, 1901-1970) 선생 동상도 차를 타고 가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다. 그는 친일파 처단과 무장 투쟁에 앞장선 것이 죄가 되어 20년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낸 애국 독립지사로, '해방 조국 금오산의 삼족오를 내가 지키겠노라' 하는 듯한 눈빛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금오산에 와서 이같은 독립지사를 아니 만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박희광 동상을 지나고, 다시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인상적인 숲길을 걸어 조금 올라가면 채미정이 나타난다. 저 높은 대혜폭포에서부터 세차게 떨어져 흘러내린 계곡수의 처렁처렁한 물소리가 채미정을 온통 휩싸고 돈다.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노라면, '길재 선생의 대쪽 같은 절의(節義)는 긴 세월의 마모도 전혀 겪지 않나 보다' 싶은 생각이 저절로 일어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매표소를 지나면 금오산성사적비가 나오고, 다시 조금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에 한 글자의 크기가 가로, 세로 각각 1m나 되게 새겨진 '金烏洞壑(금오동학)' 네 글자가 나타난다. 금오동학 앞 안내판은 그 네 글자가 '금오산은 깊고 그윽한 절경'이라고 해설한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 중종 때 명필 황기로(黃耆老)로, 이율곡의 동생 이우의 장인이다. 그는 중국에서 '왕희지 다음 가는 명필'로 알려졌다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금오산성사적비가 나오고, 다시 조금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에 한 글자의 크기가 가로, 세로 각각 1m나 되게 새겨진 '金烏洞壑(금오동학)' 네 글자가 나타난다. 금오동학 앞 안내판은 그 네 글자가 '금오산은 깊고 그윽한 절경'이라고 해설한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 중종 때 명필 황기로(黃耆老)로, 이율곡의 동생 이우의 장인이다. 그는 중국에서 '왕희지 다음 가는 명필'로 알려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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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을 가로질러 걸쳐져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금오산성 사적비'가 나타난다. 검은 돌 뒷면에 금오산성의 역사를 기록해둔 비석이다. <구미 시지>는 이 비석을 '1595년(선조 28)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 배설(裵楔)이 금오산성 중수(重修, 손질하여 고침)에 착공, 이듬해 완공을 보았으며, 도체부(都體府, 전쟁 중 군대 최고위 직책인 도체찰사의 근무지)의 전략 본영(本營, 군대 본부)으로서 왜군의 북진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때 산성 안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아홉 우물과 일곱 연못)이 마련되었고, 그 후 몇 차례 가축(加築, 더 지어짐)된 사적(史蹟, 역사의 자취)을 기록한 비(碑)'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수'가 눈길을 끈다. 금오산성이 1595년에 처음 축성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현지 안내판도 '(금오산성은) 금오산 정상부와 계곡에 이중으로 축조한 산성이다. 규모는 외성이 약 3700m, 내성이 약 27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지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 3m, 험준한 절벽 위는 1m 정도이며, 고려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왼쪽 사진) 금오산성의 대혜문 지붕이 보이고, 멀리 대혜폭포가 자그맣게 조망되는 풍경. 케이불카를 타면 볼 수 있다. (오른쪽) 여름철 비 온 위듸 대혜폭포)
 (왼쪽 사진) 금오산성의 대혜문 지붕이 보이고, 멀리 대혜폭포가 자그맣게 조망되는 풍경. 케이불카를 타면 볼 수 있다. (오른쪽) 여름철 비 온 위듸 대혜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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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은 이어 '고려 말기 왜구의 침입 때 주변 지역의 백성들이 이 성에 들어와 지켰'으며, '그 후 1410년(조선 태종 10)에 나라에서 크게 고쳐 쌓았고, 왜란·호란 직후와 1868년(고종 5)에 계속해서 고쳐 쌓았다'라고 금오산성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안내판은 '성내에는 고종 때 대원군의 지시로 세운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金烏山城重修訟功碑)가 있는데 이것은 산성과 건물을 중수한 후 세운 기념비로, 백성의 생업 종사 및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라는 문장으로 해설을 마친다.

고려 때 처음 축성한 이후 조선 태종,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대원군 시절에 계속 고쳐지고, 또 더 지어진 것은 그만큼 금오산성이 국방 전략상 대단한 요지였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기사가 증언해준다.

태종, 선조, 인조, 대원군 때 계속 수리한 국방 요지

당시 나라의 군사 관계 일은 비변사에서 논의 후 정했는데, 영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원익, 우찬성 최황, 지중추부사 유근, 동지중추부사 윤선각, 부제학 이정형, 우부승지 윤담무, 집의 유대정, 헌납 우준민, 수찬 정경세, 주서 정곡, 봉교 오백령, 홍문 저작 홍경신, 검열 성이문으로 구성된 비변사는 1595년(선조 28) 8월 5일 선조에게 건의한다.

"선산의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형세에 맞게 요리하여 큰 진으로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선산부사 이윤직은 오졸한 서생이어서 큰일을 초창(初創, 처음 만듦)하고 경영하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윤직이 맡을 수 없다면 (진주목사, 경상 우수사를 역임하고 지금 밀양부사로 있는) 배설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해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경상도에 머물고 있는 도체찰사가 현지의 사정을 잘 아니 도체찰사에게 맡기시지요."

(사진, 왼쪽) 금오산성 대혜문 (가운데) 대혜문 뒤 왼쪽으로 대혜폭포, 오른쪽으로 도선굴이 보이는 풍경 (오른쪽) 대혜폭포와 도선굴이 크게 보이는 풍경
 (사진, 왼쪽) 금오산성 대혜문 (가운데) 대혜문 뒤 왼쪽으로 대혜폭포, 오른쪽으로 도선굴이 보이는 풍경 (오른쪽) 대혜폭포와 도선굴이 크게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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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시지>의 금오산성 관련 기술

'이 무렵 <선조실록>의 전후 기록을 상고해볼 때 금오산성의 수축은 이 해(1595년)에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해 축조를 완공하였음이 고증되고 있다.'

'우의정 겸 하사도(下四道) 도체찰사의 본영을 1595년 10월 11일 금오산성 내에 설치하고  진주목사로 있던 무장 배설로 하여금 선삼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으로 임명, 1596년 3월 4일 경상도 조방장을 겸임하게 하여 산성 수축과 방어를 전장(專掌)하도록 지치(指置)하였다.'

또 <구미 시지>는 최현 <일선지(一善志)> 금오산성조(條)에 '부사 배설에게 각기(刻期, 빠른 시일) 내에 축성하도록 하되 문경, 함창, 상주, 금산, 지례, 개령, 성주, 고령, 본부(선산)의 9개 주현(州縣) 민과 군을 동원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당시 배설은 무(武)당상관으로서 9개 주현의 수령보다 상위 직급자로 전란 중에 긴급을 요하는 산성 수축을 능동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도체찰사의 지략적 계획이라 하겠다.'로 평가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41년 뒤인 1639년(인조 17) 경상도관찰사 이명웅이 임금의 윤허를 받아 당시 선산부사 이각(李恪)으로 하여금 금오산성을 가축의 대역사(大役事)를 담당하게 했다. 금오산성의 당시 병력은 3,500명이었다.'

'그 후 다시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 섭정 당시 다시 성을 수축하였는데 누곽(樓廓)의 규모가 100여간에 이르고 관아와 군창을 새로 지으니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요색지라고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에 기록되어 있다.'  

금오산성에 대한 기사는 1596년(선조 29) 11월 17일 실록에도 등장한다. 선조가 "성주산성은 수축하여 지키고 있는가?" 하고 묻고, 도체찰사 이원익이 "수축은 했지만 성 모양이 좋지 않고 골짜기도 평평하지 않은 곳에 있는 까닭에 장수들이 모두들 그 곳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산의 금오산성은 선산의 수령(선산부사)인 배설을 장수(금오산성별장)로 정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런가 하면, <구미 시지>는 이능화의 1918년 간행 저서 <조선불교통사>에 나오는 '사반 영남 초격(師返 嶺南 抄擊) 연축 용기 팔공(連築 龍起 八公) 금오제산성(金烏諸山城) 흘위보장(屹爲保障)'이라는 기록을 인용, 승병대장 유정(사명대사)도 선조 28년과 29년 간 금오산성의 축조에 조력(助力)한 바 그 공로가 많았다'라고 기술한다. 또한 사명대사가 '영남 금오산 아래에서 아픈 중에 구름을 그리며 읊은 시(嶺南 金烏下 臥病 憶雲中寸調)'도 수록, 소개한다. 여기서는 번역문만 읽어본다.

병이 들어 삼 년 동안 금오산 밑에 누워 있고
애타게 노룡을 바라느라 일 년이 또 지나가네
찬 서리에 기러기떼 날으니 깜짝 놀라고
국화도 피었건만 북녘 소식은 아니오네
산천은 아득한데 길은 멀리 뻗쳐 있고
비바람은 쓸쓸히 오두막을 덮쳐오네
중천에 다만 홀로 가을달만 둥실 떠서
아쉬운 이 내 마음 시름 겨워 눈물 짓네

금오산성 대혜문. 이 성문을 지나 더 오르면 내성(內城)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금오산성 대혜문. 이 성문을 지나 더 오르면 내성(內城)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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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시지>는 '금오산성은 수축 이후 천생산성('곽재우 장군은 왜 검은 말 등에 쌀을 부었을까' 기사 참조)과 더불어 임진왜란 중에 영남 보장(保障, 지킴)의 중요한 기능을 다시 발휘하기 시작했고, 정유재란 시에는 도체찰사의 전략 본영으로서 영남을 수호하는 구국의 아성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1597년(선조 30) 1월 난리가 재발되었을 때 조선 조정은 산성을 굳게 지키는 작전을 중시하여 경상, 전라, 충청의 여러 산성들을 중점적으로 방어했는데, '도체찰사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을 본영으로 삼고 방비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이때 정기룡이 상주목사로서 상주진 관하 9개 군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금오산성 별장 이수일과 함께 금오산성을 굳게 지켰다.'

최전방 군사 지휘부이자 후방 행정 지원 관청이었던 금오산성

<구미 시지>는  '선조 31년 무술(1598)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7년 중 후반 4년 동안 금오산성의 역할은 지대했다'면서 '군사적으로는 최전방 지휘부로서 작전, 의병, 보급, 명군의 지원, 행정적으로는 전란 시의 백성들을 회유하고 보호하는 한편 다각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대관방(大關防, 큰 방어 기지)이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결론만으로도 임진왜란 중 금오산성이 지녔던 전력적 중요성은 충분히 파악된다.

금오산성 성곽의 흔적
 금오산성 성곽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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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오산성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백성들이 왜적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또 굶어죽은 슬픈 역사가 서려 있기도 하다. <구미 시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북 구미) 선산에서는 노경임(盧景任)을 대장(隊長)으로, 박수일(朴遂一)을 부대장으로 추대하고, 최현(崔晛)을 장서(掌書)로 하여 의병을 조직, 격문을 작성하여 사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노경임은 급히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아 떠나고, 적이 16일만에 질풍같이 들이닥쳐 남녀노소를 닥치는 대로 마구 죽이니' 모두들 속수무책이 되어 각자 흩어져 피신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당시 '선산, (경북 구미) 인동, (경북) 상주 등지는 적의 진격 요충지였기 때문에 적세가 강대하고 노략질이 심하여 거의 무인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이 왜적에게 피살되고, 또 굶어죽은 금오산성

그런가 하면 <구미 시지>는 부안현감 고한운(高澣雲)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는 고향 선산땅에 도둑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졸을 이끌고 와 금오산에 진을 쳤다. 고한운이 군진을 구축했다는 소문이 번지자 (경북 김천) 금릉, (경북 구미) 인동 등지의 선비와 흩어졌던 병졸들이 합세했다.

선산의병이 순찰사에 보낸 지원요청문(일부)

금오산 전투 이후에 민심은 더욱 흩어지고 의병을 모으기가 더욱 힘들게 되었습니다. 적에게 항복하지 않은 완강한 백성들도 적의 노략질에 못이겨 타향으로 흩어져 바가지를 들고 거적을 둘러메고 남의 집 문전을 돌아다니며 걸식응 하며 냉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륜과 도의가 땅에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틈을 타 적진을 피해가면서 유민(流民)을 모으려고 "평소에 미련하여 충의의 소중함을 몰랐으나 왜놈들이 이를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하니 이러한 인간들의 딱한 처지를 도대체 누구의 탓이라 하겠습니까. 아! 오늘의 변은 천고에 다시 없고 우리 고향의 성황은 더욱 처참하고 비통하여 말하기조차 힘이 듭니다.

우리들의 이번 거사가 큰 성과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병을 설치하여 틈을 타서 한 놈의 적이라도 죽이려 합니다. 우리들은 일개 서생으로서 피신한 뒤에 무기 하나 가진 것이 없고 비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개심은 있으나 맨손으로 호랑이게 덤비는 격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원컨데 합하(순찰사)께서는 우리들의 복수의 뜻과 나라를 위한 지극한 충정을 살피시어 군기를 갖추게 하여 주시고 백성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우리들이 지극히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창기(倡起)하나 대사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며 항상 누워서 쓸개를 맛보는 뜻만으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아뢰오니 동해에 새아침이 밝아오는 날 그 이전에 우리들은 모두 명이 다하는 날이 될 것이며 서쪽나라 지상에 아직 평화가 요원한 가을에 적과 더불어 공생하지 않기를 맹세하면서 이 글을 바치는 바입니다. - <구미 시지> 수록

'처음에는 (고한운 부대가) 복병(기습)으로 여러 번 적을 격파하여 식량과 가축을 탈환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오니 한때 산성 안에는 사기가 앙양'되었다. 그러나 금오산이 골이 깊고 요지이기는 해도 사방이 불과 50리밖에 안 되는 까닭에 '적은 (경북 김천) 개령, (경북) 성주 등지의 병력을 집결하여 철통같이 금오산을 포위했다, 성 중의 형세는 위급해지자 대장 강순세(康舜世), 유사 허국신(許國臣)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적진으로 나아갔으나 도리어 적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끝까지 적을 매도하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선 안에는 동요의 빛이 역력하였다.'

'고한운 장군은 성 안에서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야음을 타고 무사히 탈출하였으나 적은 금오산성 안팎을 뒤져 남녀노소 없이 모조리 살해하니 한 그루 나무 한 포기 풀도 성한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서울로 진격한 주력 부대의 후미를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이 지역의 적들은 공포 작전을 폈다. 그들은 금오산성에서 잡은 장졸 60여 명을 선산읍 남문 밖 10여 리에 걸쳐 나뭇가지에 매달고 눈을 뽑고 손과 팔다리를 찢어내고 심장을 도려내는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고한운이 이 광경을 보고 땅을 치고 하늘에 우러러 탄식하며서 결사대를 조직해서라도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최현을 만나 다시 의병을 모집하는 방도를 강구하자고 의논하였는데, 최현은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인의예지를 배웠지만 무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참으로 한심하다, (중략) 경상우도에는 김성일 선생이 순찰사로 계시면서 의사가 구름떼같이 일어났는데 좌도는 형세가 그렇지 못하다"면서 걸군기(爲善山鄕兵乞軍記, 선산의병이 군대 지원을 요청하는 글)를 썼다.'

하지만 순찰사 쪽에서는 아무 회신이 없었다. 고한운은 '복병으로 왜구와 싸웠으나 마침내 병사하고 말았다.'

금오산성 내 거의 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연못들. 임진왜란 당시 아군은 이 연못들과 우물들의 물이 있었기 때문에 금오산성을 중요 방어기지로 사용했다. 대혜폭포에서 도선굴로 가는 입구의 커다란 바위에는 배설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별장이 금오산성에 우물과 연못을 팠다는 각서가 새겨져 있다.
 금오산성 내 거의 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연못들. 임진왜란 당시 아군은 이 연못들과 우물들의 물이 있었기 때문에 금오산성을 중요 방어기지로 사용했다. 대혜폭포에서 도선굴로 가는 입구의 커다란 바위에는 배설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별장이 금오산성에 우물과 연못을 팠다는 각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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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성을 걷는다. 호숫가를 걷고, 박희광 독립지사를 만나고, 길재 선생과 채미정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고, 금오산성 사적비를 지나 대혜문에 당도한다. 물론 도선굴에 들러 그곳의 캄캄한 어둠 속에도 파묻혀 본다. 산길을 타고 오르다가 오른쪽 산비탈로 접어들어 임진왜란 당시 우리 군사들이 사용했던 연못에도 가 본다. 연못들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가득 모여 있다.

어디 그뿐일까. 금오산성의 나뭇가지와 풀잎들에는 배설, 사명대사, 정기룡, 정경달, 창석 형제, 고한운, 최현 등 이곳에서 피땀을 흘리고, 죽은 의병 군사와 백성들의 숨결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의 뜨거운, 분노에 찬, 슬픔에 겨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전을 때려온다. 임진왜란은 옛날 일이 되었지만 이 나라 산천은 여전히 전쟁 중(휴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 사명대사의 '산천은 아득한데 길은 멀리 뻗쳐 있네'라는 싯구가 새삼 가슴을 애잔하게 적셔온다.


태그:#금오산, #배설, #정기룡, #정경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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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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