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듣고 보니 그렇다. 유치장인지 교도소인지 구별도 안 된다. K는 아직 재판도 받지 않은 미결수이지만 '1358'은 물론 다른 둘은 7년형, 10년형을 받은 기결수다.

"이상한 점은 더 있어. 분명히 감옥인데 교도관들 복장을 보면, 교도관이 아니야. 무슨 자위대 군복 같잖아. 그리고 일요일 날은 교회나 절에서 목사, 신부, 중들이 와서 예배를 보든지 포교를 하든지 하는데, 그런 것도 전혀 없고. 밥도 영 신통치 않아. 생선도 잘 안 나오고, 고기도 드물고. 안 그런가,  '1233' 꼬맹이?"

네 명 밖에 없는 공간이지만 권력 관계는 분명하다. K는 열외로 제쳐놓고는 '1358'이 왕이다. 키가 작아 꼬맹이라고 불리는 규슈 출신 '1233'과 나이가 많은 오키나와 출신 '1577'은 말없이 '1358'의 왕 노릇에 순응한다.

'1358'은 오사카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나름대로 주먹계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는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자기 몸의 화려한 문신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자신이 재일교포 3세로 한국계 조직원이 많은 '야나기가와 구미(柳川 組)'의 일원이라며 허풍을 떤다.

"왜 야쿠자가 됐냐고? 야쿠자가 되면 깔보는 놈들이 없으니까."

이 말은 수긍할 만하다. 귀화하지 않은, 그리고 한국식 이름을 가진 재일교포들이 살아가기에는 일본 땅은 만만치 않다.

"어이, 늘 말이 없는 '1901', 당신은 어디서 왔나?"

"한국, 서울에서 왔습니다."

"서울, 그러면 한국인이란 말이야?"

"그래요."

"그럼 이민이라도 왔나?"

아뇨. 잠시 머물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럼, 어떻게? 진짜 몇 명이나 죽인 거야?"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알았어, 알았어.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야?"

"몰라요. 제가 사람을 죽였다며 재판도 없이 여기로 보냈어요."

"뭐라고? 자네도 재판을 받지 않았어? 그러니까 여기는 정말 이상한 곳이라니까. 미결수가 우리처럼 감옥에 오면 안 되지. 구치소에 가 있어야지. 그런데 당신 말고도 요즘 온 친구들 중에 재판도 안 받고 무작정 수감된 사람들이 꽤 많아. 미결수와 기결수가 한 곳에 있다? 이게 이상하다는 거야."

'1358'은 의외로 똑똑했다. 나름대로 자신이 겪어온 일을 분석할 줄도 알고 종합할 줄도 안다. '1358'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은 또 있네."

그 순간 간수가 '1358' 머리를 손으로 툭툭 밀어제치며 말을 끊는다.

"잡담 금지. 특히 너희 더러운 한국 놈들은 입을 닥쳐라."

'1358'이 욱하며 덤비려 하지만 K가 잡으며 눈빛으로 말린다.

"이것 봐. 늘 몰려다니는 것도 한국 놈들 특징이지."

돌아선 간수가 호루라기 소리로 철수를 알린다. 죄수들은 줄을 선다. 군대나 감옥이나 비슷한 점은 늘 줄을 서고, 벌을 주면 받고, 때리면 맞는다는 것이다. 어느새 K는 이곳 생리에 맞춰 진화 아닌 진화를 거듭한다.

"어린놈이, 밖에서라면 설설 기었어야 할 놈이 이 형님 머리를 쳐?"

"그러다 또 독방 갑니다. 그런데 아까 그 이상하다는 점은 또 뭡니까?"

꼬맹이 '1233'이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저 새끼가 제 입으로 말하잖아. 여기에 있는 대부분이 한국인이나 한국 출신이야. 나머지는 규슈나 오키나와 사람들이고. 규슈 출신 중 대부분은 원래 오키나와에서 건너왔고."

K의 머리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 결론을 맺기가 겁난다. 이곳 수용기관에 있는 재소자는 모두 500명이 넘는다. 들어올 때 봤다시피 새로 지은 듯한 건물이다. 그리고 이곳을 처음부터 지켜봐 온 '1358'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정상적인 교정시설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 수용된 재소자 대부분이 한국과 관련돼 있고, 오키나와와도 연관돼 있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수년 전 언론 자유 침해, 인권 침해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특정비밀보호법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법에서 규정한 행정기관이 특정비밀을 취급하는 직원 적성검사 평가항목이 문제다.

그 평가항목에는 부모, 배우자, 형제의 국적도 포함돼 있다. 이는 곧 재일교포를 포함한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이나 귀화한 재일교포를 기밀 누설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아예 이를 솎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일본 정부에 반대 입장을 갖는 재일교포를 포함한 한국인, 오키나와인들을 분리 수용하는 것은 과연 일본 정부답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2014년 12월 일본 참의원에서 특정비밀보호법이라는 허무맹랑한 법을 통과시켜 2015년 12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 일본 특정비밀보호법 의회 통과시키는 모습 2014년 12월 일본 참의원에서 특정비밀보호법이라는 허무맹랑한 법을 통과시켜 2015년 12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 YTN 뉴스 캡처

관련사진보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상하고 수상한 이곳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그리고 법적 절차도 없이 외국인인 자신이 이곳에 수용돼 있다는 사실도 반드시 외부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그럼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감시하는 수용시설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불가능하다. K가 죽기 전에 악몽을 벗어나는 길은 아무 데도 없다. '하면 된다'는 얻을 수 없는 마약일 뿐 '되면 한다'는 게 현실이다.

미야자와 회장이 민주당 야마구치 곤다 의원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다른 젊은 민주당 의원들 2명도 심각한 얼굴로 둘의 얘기를 듣는다.

"최고의사결정 연구단장 다나카 간사장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심증만 가지 물증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고민입니다. 그리고 연구단의 실체적인 활동 내용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더욱 힘들고요."

야마구치가 볼멘소리다.

"허허. 그렇게 쉬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제가, 이 미야자와가 의원님께 부탁드리지도 않았겠죠. 일단 다나카의 주변을 때리세요."

미야자와가 조언을 한다.

"주변을 때려라? 그게 무슨…."

"타초경사(打草驚蛇)라고 했습니다. 뱀을 잡으려면, 주변 풀을 두드려서 뱀이 놀라 움직이게 해야죠. 일단 다나카 측근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자민당 미나미 겐조 의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야마구치 의원은 미야자와가 건네 준 봉투를 열어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잠시 놀라는 기색이다. 하지만 곧 의미 있는 미소를 짓는다.

"이 정도라면 충분하고도 남겠네요. 미나미 의원도 연구단 참석자 중 한 사람이니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날 미야자와 회장님을 보면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소중한 정보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것을 모아서 이렇게 가끔씩 정치에 도움을 주는 것뿐, 제가 하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미나미 의원의 정치적 생명을 끝내고도 남는 자료였다. 미나미 의원의 지역구인 효고 지역 건설업체들에게 받은 뇌물 내역과 돈이 오고 간 타인 명의 통장 사본은 물론 미나미 의원 정부(情婦)와의 정사 장면이 담긴 사진들이다. 검사들의 수법과도 비슷하다. 범인에게 자신과 관련 없는 큰 죄에 대해 불면 작은 죄를 용서해 주거나 감형을 준다는 '플리 바게닝'과 유사한 수법은 뒤가 구린 사람들에게 잘 통하기 마련이다.

"야마구치 의원님, 현 자민당 이하 극우 세력을 막기 위해서 NGO를 포함해 시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쪽은 진전이 좀 있습니까?"

"네. 지금 박차를 가해 진행 중입니다. 좌파와 진보진영을 아울러서 참여시키기 위해 재야 단체는 물론 공산당까지 손을 잡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하는 점은 요즘 언론에서 민주당은 물론 야권 의견 표출이나 움직임에 전혀 신경을 안 써줘서 전국적인 바람을 일으키기가 힘들어요. 최소한 방송사 한두 군데라도 우리 우군이 돼 줘야 하는데요.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저희가 하나,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평화'라는 주제로요. 저희 그룹 소속 연예인 아이들을 총 동원해서라도 바람을 일으킬 이벤트를 하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연예인들을 초청했고요. 그리고 사카모토 교수 아시죠?"

"게이오대 교수요? 물론 아다마다요."

"사카모토 교수님의 국제적인 인적 네트워크도 도움을 주기로 했습니다."

"아주 잘 됐네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될 상황인데 사카모토 교수님 정도의 영향력이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운동을 벌이기 위해서는 브레인이 필요합니다. 총괄 기획을 맡을 수 있는 분, 소개하겠습니다."

스텔라의 아버지 엔도 아키라 전일본공동체 명예본부장이다.

"아니, 자네는? 엔도 아키라아닌가?"    

"오랜만입니다. 야마구치 의원님."

"아니, 무슨 의원님이야. 친구한테. 살아있었어? 이게 얼마만이야."

야마구치와 엔도는 대학 동기다. 젊었을 때 이웃하던 과의 친구였다. 각기 다른 삶을 찾아 떠났다가 30여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한 30년은 넘은 것 같네. 자네 소식은 늘 언론을 통해 들었고."

"마지막으로 자네 결혼한다는 소식은 들었지. 가족들도 잘 지내지?"

"아내는 먼저 갔네. 지금 예전에 잃어버린 딸을 찾을 거 같고."

"뭘 하고 지내길래 그렇게 소식이 없었어?"

"자네는 자네의 자리에서 자네의 일을 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일을 했을 뿐이지. 소식은 딱히 전할 내용도 없었고, 그냥 그렇게 흘러간 것일세."

"나는 미야자와 회장이 좋은 사람 소개한다고 해서 왔네만, 자네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미야자와 회장께서 내게 좋은 선물을 준 셈이야. 잊고 살던 옛친구를 만나게 해줬으니까. 어쨌든 반갑네."

반가움과 사적인 얘기는 뒤로 미뤄졌다. 엔도와 함께 온 젊은 친구가 현재 정부와 우익의 움직임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기존 언론에 나온 것도 있지만 그들 음모를 말하는 놀라운 얘기도 있었다. 현 자민당 정부와 보수 우익 집단이 커다란 비밀 네트워크를 만들고, 세력을 규합해서 다시 태평양전쟁 전 군국주의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일간 외교 단절 위기가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와 현재 모처에서 국가안전보장법에 의거, 재일 한국인과 오키나와 출신자들에 대한 불법적 분리 수용이 자행되고 있다는 낯선 사실은 야마구치를 경악시켰다.

"이게 사실 확인이 된 것인가?"

"정부에 있는 내부 고발자 몇몇과 우리 공동체 출신 공직자들에게 나온 얘기이니만큼 진실성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없다네. 나도 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 어떻게 법치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 절대 다수당 자민당이 국가안전보장법 등 법을 내세워 독재적인 법집행을 자행하는 상황이라 의회에서 달리 막을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네."

"그럼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간다는 말인가?"

"시민들의 힘만이 유일한 방법이야.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시민들이 일어나는 것 빼놓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지. 최근 몇 년간 사람들이 의식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본의 모든 시스템이 정부의 독주를 견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어. 그런데도 이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

우리 일본의 현실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장이라는 인식이 없이 그냥 일본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영화 속의 장면으로만 보는 거야. 지금이라도 이런 우울한 현실이 나중에 엄청난 비극을 부른다는 것을 알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게 급선무야.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지방 조직을 움직일 것이고, 거기에 민주당 지역 단위 조직도 함께 참여시킬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네."

야마구치의 눈에는 아직도 엔도가 30여년 전의 그 전위적이고 열정적인 청년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 회의 아닌 회의가 가 끝났다. 남은 것은 미야자와와 엔도다.

"엔도 선생, 스텔라, 아니 아이치를 언제 만날 것이오?"

"회장님, 솔직히 만날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치가 그렇게 찾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잖소?"

"아이치를 안 만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야 아이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면목이 있을 것 같아요. 그때까지 회장님께서 아이치를 잘 보살펴 주세요."

미야자와는 내심 반가웠다. 자신을 믿고 있는 엔도가 고마웠다. 사실 엔도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소개하는 것조차 민망했다. 스텔라를 성인물 비디오 모델이라는 차꼬를 풀어주고 '전속'이라는 덫에서 구해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권력으로 스텔라를 산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몸과 마음을 허락하도록 만든, 노인네의 돈에 의해 이뤄진 또 다른 형태의 거래 내지 매춘이라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엔도는 스텔라와 그와의 관계를 얘기해 준 미야자와에게 오히려 거친 세상에서 미야자와는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며 고마워했고, 지금 또 자신에게 스텔라를 맡긴 것이다.

"알겠습니다. 언제든 아이치를 만날 준비가 되면 말씀해 주세요."

엔도는 아내가 죽은 후 집을 떠나 어린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을 속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은 피를 철철 흘렸다. 자신의 이상이라는 것을 좇아 가장 소중한 딸은 홀로 살게 팽개쳤다. 뒤늦게야 가족의 의미를 알게 된 지금은 스텔라를 떳떳이 볼 수가 없다.

스텔라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려 주지 못한다. 스텔라에게 어릴 적 받아야 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한꺼번에 선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신의 부재를 조금이라도 변명하기 위한 방법을 겨우 찾아냈다. 이 미쳐가는 일본에, 일본인들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한 다음 스텔라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방법이라고 스스로에게 이른다. 어차피 자신만의 이상을 위해 또 한 번 자신을 속이는 일일지라도.


태그:#불법수용소, #특정비밀보호법, #국가안전보장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