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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꼭 쥐어지는 둥근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시츄나 요크셔테리어 따위의 강아지가 주인에게 배를 얻어맞는 것 같은 삐걱대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개새끼, 라는 욕이 어울릴 법한 듣기 싫은 소리였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무(無)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우주에 빅뱅이 일어나듯이 검은 공간의 형체가 드러났다. 니콘의 방,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물건 하나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사라진 것이다.

냉장고에 붙은 쪽지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단서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꽤나 먼 곳으로, 아마도 다시는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뷰렛이 떠나간 방식과 같았다. 어쩌면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니콘을 아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K는 떠나고 없었다. 사실 그것은 소설이라고 볼 수 없는 글이었다. 그것은 에세이에 가까웠다. 니콘과 뷰렛, 극중에서 K로 분한 인물에 대한 나의 에세이. 나는 뷰렛과 니콘을 보며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소설에 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 하나의 반론조차 제기되지 않은 만장일치의 혹평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때 들었던 수많은 평은 모두 한쪽 귀로 흘러나갔고 단 한 문장만이 지금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소설 속 '나'와 나 자신을 혼동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그 견해에 대해서 니콘은 이렇게 덧붙인 바 있다. 소설가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주워 담는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해. 소설가는 허구를 창조해내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만약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그걸 독자들에게 판매한다면 과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색욕에 눈이 먼 엄마와 가족을 제외한 전 인류를 사랑한 아빠에 대한 글을 쓴다고 생각해 봐. 그걸 상상만 해도 난 숨이 막히고 금방이라도 토할 듯 역겨워져. 자신이 진정 소설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글을 쓴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해.

하지만 더 이상 쓸 거리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 어떤 창작의 여지조차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가로서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말소되어 버린다면 나는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들은 소위 말해서 사기를 치는 거야. 잊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긁어모아서 다듬어놓고 그것이 창작한 것인 양 능청을 떠는 거지. 소설가들이란 결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평가받는 사기꾼 집단이야.

*

내 옆방으로 이주해 온 이후로 니콘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녀가 방에서 나오는 것은 아침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밖에는 없었다. 심지어는 씻거나 화장실을 가는 행위조차 그 시간에 몰아서 했고,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그녀가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때도 간혹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집안 일로 인해 며칠간 고향으로 내려가려던 참에 함께했던 식사 중에 나는 물었다. 있잖아,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그때 왜 헌혈을 그렇게나 했던 거야?

내가 니콘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된 일이었음에도 나는 그때까지 그것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왠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추상적인 직감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내가 그것을 꼭 그날 물었던 것에는 어쩌면 내가 껴안게 될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상이 뒷받침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판단이 든다.

물론 그날의 물음도 그다지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입을 열 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이 말을 듣는다면 잠시 귀를 기울이는 척 하다가 곧바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식사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은 무언가 중요한 단서를 남기는 것만 같았다. 마치 유서를 적는 시한부 환자, 혹은 다잉메시지를 남기는 추리소설 속 피해자 같은 그런 표정 말이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쓸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한동안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 문장으로 운을 뗀 그녀는 입술을 살짝 어루만지고서 말을 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어떤 기여를 하는지에 대해서. 그날 내가 했던 행위는 그것에 대한 고찰이었을 뿐이야. 다른 의미는 없어. 넌 내가 이타심이나, 뭐 그런 감정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은 것뿐이야.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다시 말 없는 식사가 이어졌다. 입을 여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이 서려있던 니콘의 탓에, 우리들은 함께 있을 때면 관계가 무색할 정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이런저런 말을 많이 걸었고 니콘 또한 정 답하기 싫은 것 이외에는 응대를 해 주었지만 니콘의 침묵이 익숙해짐에 따라 서서히 나 또한 입을 여는 횟수를 줄여갔다. 나는 그녀와 진정으로 말 한 마디 없는 교감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렸어?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며 물었다. 소설을 쓸 수 없게 됐을 때 너의 존재이유 말이야.

이번에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왼쪽 새끼손가락을 윗입술에 얹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할 때 자주 취하는 자세였다.
요즘 들어서, 그녀는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아니면 그저 혼잣말인지 모를 어조로 말했다. 소설을 쓸 때면 커다란 시계의 초침이 빠르게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그게 어디서 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쓸수록 커져가는 걸 느껴.

나는 비록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묵묵히 그녀가 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귀에 쑤셔 박으며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집을 나서는 나를 배웅해주며 마주친 그녀의 표정에는 묘한 죄책감 같은 것이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그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니콘은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K는 떠나고 없었다.

그녀의 방에 남은 모든 그녀의 흔적을 품으로 끌어다 모으며, 나는 짧지만 강렬했고 말 한마디 없이 무수한 소통을 했던 니콘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고 또 내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생각은 곧 그것에 대한 역 또한 고려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고 또 무엇을 남긴 것인가. 해답은 간단한 곳에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삶의 목적'들, 원고지와 펜 하나로 그녀를 신으로 만들어준 기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

아직 제목조차 정해지지 않았던 니콘의 이름 없는 소설 속에는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한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옆집에 살고 있는 타투이스트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사고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몸에는 큰 화상을 입은 여자였다. 세상에 환멸을 느꼈던 '그녀'는 어느 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에 대한 소설을 써서 등단한 주인공이 사랑조차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신을 비관하며 그녀를 찾아 세상 밖으로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었다.

그것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펜을 집어 드는 순간부터 느꼈을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부모도, 객체에 머무르도록 억누른 채 수단으로서만 이용한 모든 세상 사람들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을. 그녀에게 있어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 질문이 끝없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의 환멸은 나에 대한 죄책감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영감의 부재로 인한 것인가. 그 어떤 환멸이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세상과 작별을 고하도록 이끌었다는 말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끓어오르는 영감을 느꼈다. 소설 속 '나'와 나 자신을 혼동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 문장을 이제야 이해한 거였다. 니콘이 말한 것처럼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제 것인 양 포장해서 파는 일종의 사기 행위였다. 이제는 내가, 니콘과 뷰렛을 팔 차례가 온 것임을 느꼈다. 나는 당장에라도 소설 한 편을 완성할 기세로 왼쪽 구석에 놓인 원고지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사로잡는 잡음에 휩싸였다. 커다란 시계의 초침이 빠르게 돌아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였다. 니콘이 말했던 바로 그 소리. 니콘도, 뷰렛도 이런 식으로 사라져 간 것이리라. 귀를 찢는 잡음과 함께, 현관부터 시작해서 불길이 발했고 온 집안으로 번졌다. 연기 속에서 뷰렛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니콘이 지금껏 내게 했던 모든 말이 잡음과 섞여서 나의 귀를 끊임없이 농락했다. 잡음은 더욱 거세어졌고 고막이 터져나갈 듯이 아파왔다. 어느덧 나의 방까지 타오르는 불길을 느끼며 나는 자리에 앉은 채 왼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결코 오른손에 쥔 펜을 멈추지는 않았다. 내 펜 속의 잉크가 소모되는 속도에 반비례해서, 고통은, 귀를 찢는 잡음은 커져만 갔다.

경첩이 녹아내려 문이 쓰러지고 가전제품들이 조각으로 분해되는 화학작용 속에서 나는 낯익은 물체를 발견했다. 니콘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바로 그 카메라였다. 나는 오른손으로는 글을 쓰는 것을 유지하며 왼손을 뻗어 그것의 스트랩을 쥐고 당겨 품에 넣었다. 불길은 나의 발밑으로 옮겨 붙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눈을 뜨면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얼굴로 프렌치토스트를 입에 넣는 니콘과 마주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니콘의 존재 자체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 뷰렛까지도.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가진 것이라곤 자존심뿐인 10대 소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불길은 다리 사이로 피어올랐고 카메라는 나를 급하게 찾는 누군가로부터의 부재중전화 알림처럼 진동했다. 니콘은 이 카메라로 도대체 어떤 사진을 찍은 것일까. 불현듯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떤 영감을, 어떤 각도에서 얻었던 것일까. 나는 펜을 놓았다. 그것의 뒷부분을 잡고 뚜껑을 열어 필름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뚜껑을 연 순간, 나는 깨달았다. 카메라 속에 처음부터 필름은 없었다.

단지 기다랗고 검은 톱니바퀴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멈출 생각을 않고, 톱니바퀴는 끝없이 회전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내 고막을 찢을 듯 진동하고 있었다.

*완결


태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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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글을 씁니다. 주로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과 이 시대에 필요한 대중문화에 대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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