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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에서 이어집니다.)

화가 난 미키는 보도본부장에게 거칠게 항의한다. 취재 파트가 아닌 조사 파트로 난 인사 때문이다.

"아니, 최소한 언질은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갑자기 이런 법이 어딨어요? 제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이건 너무 이상한 인사 아닙니까?"
"내 소관이 아냐. 위에서 그렇게 내려온 사항이야. 내가 결정한 사안이 아니니까 그렇게 알아."

본부장은 급히 자리를 피한다. 어이없게도 미키의 하소연도 그것으로 끝이다.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 이외 조직의 횡포에 환멸을 느낀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조직 앞에 한 인간이 얼마나, 그리고 언제나 초라해 질 수 있는지 절감한다. 거대 조직 내에 한 구성원은 단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현실이 아프다. 지금껏 스스로 일에 의해, 성과에 의해 평가받고 있었다는 허상이 갈기갈기 찢긴 것이다.

그 '윗선'을 움직인 이는 바로 다케우치다. 서울에 특파원으로 나가 있을 때 간접적으로 미키에게 오하라 법무서기관을 통해 야쿠자들의 폭력 사태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 것도 그였다. 이번에는 '최고의사결정연구단 다케우치 료타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어두운 타이틀로 미키를 한직으로 인사시킨 것이다.

다케우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배려였다. 시끄럽고 분주한 취재기자가 아닌 조용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조사 파트가 자신의 '피앙세'가 머무를 곳이라는 독단이었다. 누군가가 세심한 배려라고 베푼 일이 당사자에게는 거친 폭력으로 다가선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미키는 현실을 금세 받아들인다. 짐을 정리한다. 동료들의 의아해 하는 눈길을 느낀다. 얼마 전 전국적인 특종을 터뜨린 기자에게 가혹하고 이상한 인사 아니냐는 위로 인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집안과 얼굴만 믿고 까불다가 좌천됐다는 시기와 질투 어린 반응도 몇몇 경쟁 여기자들로부터 또렷이 읽을 수 있다. 10년 전쯤인가 미국 여성심리학자인 필리스 체슬러는 <여자의 적은 여자다>(Woman's Inhumanity to Woman)라는 저서에서 조직이나 집단에서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두운 감정들, 근거 없는 적대감에 대해 분석했는데, 딱 그런 분위기다. 일면으로는 그래서 조직인 것이다.

그 순간 K가 넋두리처럼 했던 말이 송곳처럼 미키의 가슴을 파고든다.

"조직이나 집단이란 게 겁먹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사냥하는 곳이야. 그 조직이나 집단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들 역시 사냥감이 되는 곳이고. 그러니까 혼자 사냥하거나 맹수를 물리칠 수 있으면, 혹은 산과 들을 떠돌면서 풀 뜯어먹고 열매를 따먹을 줄 알면, 그 조직이나 집단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귀찮은 존재인지 아니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인지 깨닫게 되지.

게다가 그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안에서 싸움이 밖과의 싸움보다 더 치열해지고, 만일 다른 조직이나 집단과 전투라든지, 전쟁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패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그 싸움을 하기 싫어도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승리나 패배라는 것은 그 조직이나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피와 뼈와 살로 만드는 공허일 뿐이지.

그럼에도 조직이나 집단은 그 승리나 패배에 헌신, 순국이라는 명목으로 다음 패싸움을 꼬드기니 얼마나 멍청한 짓이야? 그렇게 사람이라는 게 나약하기 짝이 없으니까 결국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본래의 야성을 잃고, 월급이라는 사료로 직장이라는 농장에서 사육될 뿐이지. 가끔은 울타리 너머 너른 산과 들과 바다를 그리워하면서." 
    

분위기가 차분하다. 매시간 정신없는 보도본부가 아니다. 사람이 북적이지도 않고, 공간도 넉넉하다. 이를테면 근무환경은 좋아진 것이다. K의 말을 생각하면서도 미키는 마음먹는다. 사람을 순치시키려는 못된 의도 중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순응하기로. 어차피 지금 딱히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럴 바엔 적응하고 살아남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부서원들과 첫 인사 겸 점심을 했다. 1시간이 넘는 정찬이었다. 보도본부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느긋함이다. 조사부가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는 점을 부서장이 강조한 것처럼 여유가 넘치는, 디저트까지 딸린 점심이었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다. 다케우치의 전화다. 받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안 받을 이유도 없다.

"미키, 인사 이동이 있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어때요. 새 일은 마음에 듭니까?"

순간 기분이 나빴다. 알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소소한 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다케우치의 태도가 불쾌했다. 아무리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지인의 일상사에 관한 하찮은 일까지 참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것도 마치 너는 내 손아귀에 있다는 빈정거림으로 들려 더욱 반갑지 않다.

"무슨 일이세요?"
"주말에 미키 아버님, 어머님과 우리 부모님과 함께 저녁하기로 했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미키 부모님이 알고 계시고요."
"사전에 저와 먼저 얘기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미키 아버님한테 연락 받은 다음 바로 전화한 겁니다."
"…."
"그때 봅시다."


참 간단하다. 자기 용건이 끝나자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는다. 오늘 하루만 미키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받은 두 번째 '통고'다. 미키는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이 이뤄지는 자신의 일에 대해 낯선 느낌이다. 때로는 일방적이지만 대부분 자신을 먼저 배려해 주는 K 생각이 간절하다.

벌써 한 달째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다. 깨진 SNS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 두세 건을 빼고는 통 소식이 없다. 미키 자신도 바빠서인지 아니면 좀 더 거리를 두려고, 혹은 더 가까워지기 위한 냉각기간을 갖기 위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미키 자기보다 더 한가한, 아니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K가 일체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다.

'내가 떠나올 때 그 K라면, 수십 번도 더 전화나 문자를 보냈을 텐데. 그 사이에 다른 여자가 생겼나.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바로 전화를 한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아예 신호도 가지 않고 반응이 없다. 이내 먹통이 돼 버린 전화를 끊는다. 조금 불안하다. 아직 서울에 있는 메구미에게 알아봐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뿐이다.

떠올려보면 서울에서 그와 함께 보낸 석 달은 행복 그 자체였다. 난생 처음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에 흠뻑 빠졌고, 그 남자의 체취를 그리워할 줄도 알게 됐고, 그를 속절없이 기다린다는 게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배웠고, 그를 떠난다는 아픔이 기다림보다 더 크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만난다는 기쁨은 다시 헤어질 수도 있다는 슬픔을 조건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아련하기만 한다. 만일 K가 곁에 있다면, 그리고 '그게 바로 사랑이란다'라고 속삭였다면, 진정 그렇게 느꼈을 텐데.

"Q : 최근에 <사요나라 이츠카>(언젠가는 안녕)라는 영화를 봤어요. 만든 지는 꽤 지났는데요. 처음 당연히 일본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영화라고 합니다. 영화에도 국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셨는지요? K님의 평론을 부탁드립니다."

"A : 영화에도 국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 제작업체나 제작자가 어느 나라인지에 따라 국적이 부여됩니다. 이 영화는 한국 제작사가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혹은 독일을 배경으로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미국 제작사의 투자로 만들어졌다면 '미국 영화'인 것이죠.

이 영화 봤습니다. 2009년 만들어졌고요. 이 영화의 이재한 감독은 한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존 리'로 활동하는 인물입니다. 한국 영화 뿐 아니라 중국, 미국 영화를 만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감독이고요.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작가 츠지 히토나리 아시죠? 우리나라에서는 <냉정과 열정 사이>(BLU)가 나왔을 때부터 인기 있는 일본 작가로 손꼽힙니다. 당시 여자 파트(ROSSO)를 쓴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요. 영화로도 한국에서 꽤나 히트했던 작품입니다. 그 이후에 한국의 유명 소설가인 공지영씨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라는 소설을 같은 형식으로 여자와 남자 부분으로 나눠 쓴 적도 있고요. 하여튼 개인적으로 츠지 히토나리는 연애소설 전문가인 거 같아요.

저는 영화 <사요나라 이츠카>도 츠지 히토나리 작품의 큰 줄기는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그리면서 애틋하고 헛헛하고 또 먹먹한 느낌을 주는 그런? 특히 이와이 슌지 감독이 자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러브레터>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가 나이가 들어 주인공 '토우코'로 나와 시간의 흐름이라는 무게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참 나카야마 미호와 츠지 히토나리는 부부였다가 이혼했죠. 츠지 히토나리 원작인 이 영화에 출연했을 때는 이혼할 줄 알았을까요?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라면 '당신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 당신이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겠어요? 아니면 당신이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겠어요?' '우리 내일 뭐 할까? 그건 내일 생각해' '멕시코 속담인데 청년을 꿈을 꾸고 노인은 옛날을 회상한다고 합니다' 등 정도.

그런데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을 보면, 모두 이탈리아, 한국, 태국을 오가며 주인공들도 홍콩 유학생, 한국 유학생, 일본인이지만 지구촌을 누비는 여인 등 국제화됐다는 점이 재미있네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라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게 맘에 듭니다…."

K는 커뮤니티 방에 올라온 회원의 질문에 답하고는 미키 생각을 한다. 무심하다. 문자에 대해 답장도 없고 전화도 안 된다.

'한 번 방송국으로 찾아가 볼까. 아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래도 전화 해 볼까. 아니다. 어떻게든 연락은 올 거야.'

도쿄로 넘어 올 때 서울에서 쓰던 휴대전화는 장기 로밍시켜 살려 놨다. 한국의 지인들은 물론 미키와 이어지는 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A그룹 일본 지사에서 내준 업무용 전화까지 핸드폰만 두 대다. 그러나 우스갯소리로 '캔디폰'일 뿐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기 때문이다.

모바일 시대다, 사물 인터넷 시대다 하면서 빠르고 편리한 것을 찾는 세상이라지만, K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아예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삐삐' 조차 없는 유선전화 시대였으면 하고 하릴없이 바랄 때도 있다.

밤새우며 꾹꾹 눌러 쓰던 연애편지가 그립기도 하고, 답장이 왔는지 기대하면서 편지함을 살펴보는 설렘을 다시 느끼고 싶기도 하다. 애꿎게 미키의 사진이 배경화면으로 깔려 있는 한국에서 쓰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릴 때 진동이 오고 K는 반사적으로 급히 전화를 받는다.

"K씨 핸드폰인가요?"

기다리던 전화는 아니었다. 최근 무선전화에 퍼진 악성바이러스 때문에 걸려온 통신사 전화였다. 기존 바이러스와는 달리 한 단계 더 교묘하게 문자를 통해 악성바이러스가 전파됐고, 그 악성바이러스는 휴대전화 소유자가 가장 자주 연결하는 전화번호를 무작위로 뽑아 통화 불능에 이르게 하는 등 전화기 프로그래밍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얘기다.

최근 한국에서 너무 많이 일어난 통신 사고라 가입자에게 일일이 연락을 해서 이 악성바이러스를 막는 백신을 내려 받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는 뜻으로 전화한 것이다.

며칠 바빠서 한국 뉴스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바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뉴스를 확인했다. 거의 1000만 명 가까운 사람들 휴대전화가 감염됐다니 사상 최악의 사건임이 틀림없다. 더욱이 이 바이러스는 인터넷에서도 퍼져나가 컴퓨터에 치명적인 장해 내지 불통을 야기한다고 한다. 한때 금융망도 마비시켜 거의 '2017 통신대란'으로 명명됐다.

언제나처럼 바이러스 유포자는 오리무중이고, 북한측 유포설-중국측 유포설 등 설과 추정만 난무한다. 더 의아한 점은 바이러스 유포자가 무엇을 노리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다. 아무리 따져 봐도 실익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컴퓨터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하는 해커들이나 바이러스 유포자의 경우에도 실익은 큰 동기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렇듯 대량으로 휴대전화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퍼져서 일본에서 로밍을 받고 있는 K의 핸드폰도 감염됐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거의 사이버 테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위험한 범죄다. 암을 정복하는 날이 가까이 왔어도 인간과 그 인간이 사는 사회는 늘 병(病)을 끼고 산다. 육체의 병은 물론 마음의 병까지, 그리고 이제는 프로그램화된 세상에서 고의로, 악의로 번지는 이 같은 '디지털 병'까지.

문명과 이기의 발달은 인류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인간의 양면성과 같이 문명의 야누스적인 모습을 언젠가는 분명히 겪는다는 것이다. 부질없는 상상처럼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선물하기 전에는 사람의 손으로 불을 내 다른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 만드는 방화 사건은 없었을 것 아닌가.

인간의 역사라는 게 석기-청동기-철기를 거치고, 곡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전쟁이라는 대량 살상까지 서슴지 않으며 발전했다. 수년 전엔가  출판가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던, 문화인류학자이자 문명연구가인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의대 생리학과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쓴 <총·균·쇠>에서 보이듯 말이다.

발달한 항해술을 기본으로 삼각돛을 단 범선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신세계'는 유럽인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들이 신세계라고 여기는 곳에 수만년 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전에 없던 온갖 질병과 함께 생태계 교란을 겪었다. 천연두의 창궐이나 북미 평원에서 수많았던 버펄로가 멸종된 것처럼.

화약으로 장전한 총은 개인을 손쉽게 죽일 수 있게 만들었고, 전쟁을 더욱 크고 잔인한 살상의 장으로 만들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불거진 '러다이트 운동'은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기계가 황폐화한다는 이유로 벌어진 기계파괴운동이다. 그들은 안 것이다. 기계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이 언젠가 인간을 파괴할 것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 폐해가 인간의 탐욕과 합쳐지면서 절망적으로 현실이 됐다. 독가스로 유래 없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태평양전쟁 말에는 한 순간에 20여 만 명을 사라지게 만드는 원자폭탄이라는 재앙을 세상에 내놓고야 만다.

최근에는 컴퓨터, 전기전자 등 정보통신의 발달과 산업화의 심화에 따른 비인간화에 대한 반발로 자연 회귀와 은둔, 슬로 푸드를 주장하는 '네오 러다이트 운동'도 일어나고 있는 세상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인류의 성과와 목표만을 좇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닌가보다.


태그:#여자의 적은 여자다, #사요나라 이츠카, #총균쇠, #네오 러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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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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