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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그래서 열풍기로도 모자라 전기 난로를 틀고 붓을 잡고 묵향 삼매경에 빠졌다. 열풍기는 큰 금고처럼 생겼고 열기는 한쪽의 구멍에서 천정으로만 올라간다. 자동온도계가 있어 일정 온도가 되면 저절로 멈춘다. 전기 난로는 유달리 체온이 낮은 내 다리 근처에 켰다.

글을 쓰는데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바로 연구실 마당에서 도시가스 공사를 하느라 인부들이 철관을 기계로 자르고 용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그냥 계속 붓을 잡고 작품에 열중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뭔가 책상 위로 하나씩 나풀나풀 날아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열풍기 위에 올려놓은 책들과 화선지, 고운 색깔의 삼베 더미들이 활활 타고 있었다.

난 혼비백산했다. 우선 전원 스위치를 내리고 정신없이 책상 위 화분에 있던 물을 부었다. 그런데도 불길은 더 치솟았다. 당황해서 책상 위 큰 담요를 가지고 마구 휘둘렀는데 담요에도 불이 붙었다. 소화기를 들고 작동해 보았지만 몇 년 동안 쓰지 않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방방 뛰며 물을 붓다가 담요에 물을 푹 적셔서 불길을 때리니 다행히 불길이 숨을 죽이고 꺼졌다.

마침내 문하생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같이 재를 치우고 걸레질을 하고 불탄 책과 종이들을 정리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재라는 것이 먼지보다 더 가볍다는 것을... 그리고 빨간 색의 불이 아니라도 아무 색깔이 없는 열기만으로도 불이 붙는다는 것을... 문하생들이 그랬다.

"불이 타면 우선 종이와 책들이 지이직 타는 소리와 타는 냄새가 났을 텐데 선생님께서 아마도 못 들으시고 코감기가 심해 냄새를 못 맡았을 거예요."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불과 물에 나는 취약하다. 출근할 때 목욕탕 물이나 싱크대 수도꼭지를 잘못 건드려 물이 콸콸 나도 모르고 그냥 나올 때도 더러 있다.

언젠가 언론 보도에서 화재로 중증장애인이 타죽었다는 보도가 났다. 우리 지역에서도 영구임대 아파트에 사는 중증여성장애인들은 휠체어를 챙기지 못해 경미한 화재인데도 화상을 입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재에 취약한 것은 청각장애인만 아니라 지체장애인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성장애인단체를 운영하면서 대형시설에서 사는 여성 장애인들을 개별로 자립하게 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았다. '탈시설'을 해서 사회 속으로 일반인과 이웃하는, 그 독립의 소중함이 주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자립을 할 수 있게 된 중증장애인들은 처음에는 너무 좋아하다가 이제 5년, 10년이 지나고 15년이 되어서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막연한 노후에 불안해 한다. 어떤 이는 다시 시설에 들어갈까? 하는 혼자말을 넋두리처럼 하기도 한다.

그들이 불안해 하는 '노후'는 일반인이 걱정하는 경제적인 빈곤 때문이 아니다. 혼자 사는 여성 장애인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인격이 떨어지는 이웃의 알코올 중독자, 성적욕구불만자, 그리고 언제고 불시간에 일어나는 화재의 위험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 심하게 자존감이 손상될 때, 불의의 생활상의 사고가 생길때 나는 그냥 조용히 한 켠에서 숙성하는 밀가루 반죽처럼 나를 숙성시킨다. 멀리 있는 딸들... 춥고 바쁜데 일부러 알려 걱정끼치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기자가 내가 성폭력상담소를 운영할 때 이렇게 질문했다.

"중증장애인인 그들을 그대로 시설에 놔두는 것이 안전하지 않나요? 만약에 사고가 생기면 꼼짝하지 못할 텐데..."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시설에서 나오게 자립운동을 하지 않고, 혼자서 임대아파트를 받아서 살지도 않아요!"

나는 그때의 기자를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다.

"만약 기자님이 당사자라면 시설 안에서 시키는 대로 일정한 시간에 밥 먹고 자는, 생활리듬을 따라 평생 그렇게 살고 싶을까요?"

가끔 사람들은 길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전동휠체어를 운전해 가는 중증장애인을 보면 쉽게 말한다. "추운데 왜 저렇게 힘들게 나와 돌아다니는 거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사람들이 추운데도 나와서 사무실에 출근하고 마트에 가고 병원에 가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냥 특별한 외출이 아닌 일상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일 뿐이다.

내가 가끔씩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했던, 교정시설의 높은 담 안에서 그녀들이 바라는 소망은 참 단순했다. 머리에 꽂을 조그만 꽃 머리핀, 따스하게 갓 구운 식빵, 불 끄고 싶을 때 불 끄고 자기, 친구랑 실컷 전화로 수다떨기, 김밥 실컷 먹어 보기, 영화관 가서 영화 2~3개 한꺼번에 보기.

작은 화재를 계기로, 그리고 대규모 장애복지시설에 대한 지원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탈시설'해 혼자사는 여성 장애인들의 노후에 대하여... 2~3명이 함께 대안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이상의 인원이 되면 공동체의 규칙이 있어야 하고 그 규칙은 또 하나의 시설이 만들어지는 시초가 된다. 그냥 두 세명의 마음이 통하는 벗들과 함께 하루를 나누거나 또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것이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불에 취약한 우리들... 함께라면 그 취약함이 덜어질까?


태그:#장애인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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