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재현 모습. 지난해 10월 울돌목에서 열린 명량대첩축제의 한 장면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재현 모습. 지난해 10월 울돌목에서 열린 명량대첩축제의 한 장면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7년을 호남민중의 역할과 함께 재조명하는 대하 역사소설이 전라남도 누리집에 연재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후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기까지 7년의 삶을 그린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이 지난 5일부터 전남도 누리집에 연재되고 있는 것.

글은 법정, 다산 등 고승과 역사 인물의 삶을 글로 다뤄 온 정찬주(61) 소설가가 쓴다. 연재는 올 1년 동안 매주 월요일에, 모두 52회에 걸쳐 한다. 이 소설을 보려면 전라남도 누리집(www.jeonnam.go.kr)에 접속해 '생명의 땅 전남'을 클릭한 다음 '도정홍보관', 'e-book 자료실'로 들어가면 된다.

소설은 이순신 장군이 1591년부터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임진왜란에 대비하면서 23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과정, 백의종군 후 궤멸된 조선수군을 재건한 일 등을 재조명한다. 그 과정에서 충무공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호남의 장수와 의병, 승군과 관군, 이름 없는 민중의 역할을 복원시켜 임진왜란 해석의 새 지평을 열게 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새겨진 이순신 어록비. 해남 우수영공원에 세워져 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새겨진 이순신 어록비. 해남 우수영공원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소설가 정찬주가 쓰는 '이순신의 7년'. 전라남도 누리집에 연재되고 있다.
 소설가 정찬주가 쓰는 '이순신의 7년'. 전라남도 누리집에 연재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정 작가는 "'호남이 없다면 국가는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이순신 장군의 말은 임진왜란 역사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명쾌한 평가"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 민중의 역할이 정당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호남 민초들의 절절한 사연도 역사의 뒤편에 묻혀진 느낌"이라며 소설 집필의 배경을 설명했다.

작가는 이어 "구례에서 곡성, 순천, 낙안, 보성, 장흥, 강진, 완도, 진도, 해남으로 이어지는 남도의 육로와 해로는 건곤일척의 명량대첩을 앞둔 조선수군에게 재기의 생명선이었다, 궤멸 직전의 조선수군을 기사회생케 한 데에는 이순신 장군과 호남 민중의 힘이 절대적이었다"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던 당시의 호남 민중을 복원해 오늘의 호남인 모두에게 헌정하는 소설이 되게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찬주 씨와 박명숙 씨 부부가 자신의 처소 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어디엔가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정찬주 씨와 박명숙 씨 부부가 자신의 처소 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어디엔가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소설가 정찬주 씨가 자신의 처소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처소의 처마에 '이불재'라고 이름 붙어 있다.
 소설가 정찬주 씨가 자신의 처소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처소의 처마에 '이불재'라고 이름 붙어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정찬주 작가의 처소를 지난해 11월 13일과 12월 18일 두 차례 찾아갔다. 작가는 전남 화순의 절집 쌍봉사 건너편의 산중에서 도예가인 부인 박명숙(59)씨와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은 처소에다 '이불재(耳佛齋)'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 솔바람으로 귀를 씻어 진리를 이루는 집이란 의미라고.

정 작가가 서울에서 유배를 떠나 듯 봇짐을 챙겨 화순으로 내려온 지 올해로 14년째. 만나자마자 산중생활이 외롭지 않은지 우문을 던졌더니 "외로움이 내가 살아가는 힘"이라는 현답이 돌아온다.

"처음에는 허허로웠는데, 외로우니까 자연과 가까워지더라고요. 하나하나 눈여겨보게 되고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소중하고. 날씨가 추우면 딱새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새도 반갑고. 같이 사는 거죠. 조금 전에도 직박구리 한 마리가 죽어있기에 배롱나무 밑에다 수목장을 해주고 왔어요."

정 작가의 말이다. 날마다 눈인사를 나누는 텃새도, 계절 따라 들고나는 철새도 모두 가족처럼 산다는 얘기다.

정찬주 씨와 박명숙 씨 부부가 사는 이불재 입구. 화순 쌍봉사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정찬주 씨와 박명숙 씨 부부가 사는 이불재 입구. 화순 쌍봉사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그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된다. 새벽공기를 심호흡하고 바로 '글 농사'를 짓는다. 아침이 되면 부인과 함께 밥을 먹고 다시 일터로 스며든다. 정 작가는 글방으로, 부인은 집안의 도예공방으로 출근을 한다. 오후엔 농사일을 한다. 이게 이불재의 질서다.

"산속 생활은 질서가 있어야 해요. 이게 흐트러지면 한없이 게을러지거든.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사교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고. 대신 사색을 하죠. 만주벌판에서 투쟁하던 독립군처럼. 글 쓰는 독립군으로 살려고 노력해요."

이른 아침부터 들에 나가는 농부에게도 한 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묻어난다. 그가 글쓰기를 '글 농사'로, 간행물을 '수확물'로 표현하는 이유다.

정찬주 씨가 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활짝 웃고 있다.
 정찬주 씨가 역사소설 '이순신의 7년'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활짝 웃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역사와 불교를 주제로 한 글을 즐겨 써온 정 작가는 행정에도 역사와 문화의 옷을 입혀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래야 생명력을 얻고 정체성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전라도가 살길은 역사문화에 있어요. 모든 분야에 역사의 옷을 입혀야 해요. 전라도만의 다리를 만들고, 전라도만의 농산물을 생산하고. 다산밥상, 이순신밥상도 내놓고. 역사인물 공원도 조성하고요."

작가는 남도에 훌륭한 역사인물이 많은 데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일침을 가했다. 자연을 스승 삼아 산 김삿갓이나, 특정 종교를 떠나서 나라의 큰 스승인 법정스님을 방치하고 있는 것도 가슴 아프다고 했다.

"전라도에 살고 있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에게 지역의 풍광이나 역사문화를 살린 글을 쓰도록 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지원도 하고요. 작품에 지역의 문화와 인물을 집어넣는 건 지역에 사는 작가의 책무이기도 해요."

정 작가의 제안이다. 그는 행정기관의 누리집을 작가들에게 개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7∼8년 전에 자신이 조광조를 주제로 한 소설(<하늘의 도>)을 화순군 누리집과 한 인터넷매체(프레시안)를 통해 연재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최근 전라남도 누리집에 '이순신의 7년' 연재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소설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는 정찬주 작가. 손님을 맞는 이불재의 맞이방에서다.
 자신의 소설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는 정찬주 작가. 손님을 맞는 이불재의 맞이방에서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정찬주 씨와 박명숙 씨 부부가 집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정찬주 씨와 박명숙 씨 부부가 집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정 작가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4년부터 샘터사의 편집자로 일했다. 이때 법정스님과 인연을 맺고 재가제자가 됐다. '세상에서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의 '무염(無染)'이란 법명도 법정에게서 받았다.

글은 불교적 사유가 배어있는 소설과 명상적 산문을 주로 써왔다. 20만 부 넘게 팔린 '소설 무소유'를 비롯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산은 산 물은 물' 등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암자로 가는 길', '선방 가는 길' 등 산문집도 여러 권 냈다.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도 펴냈다.

"불교 전문작가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싫지는 않지만, 불교와 고승들 속에서 한국인이 잃어버려서는 안 될 덕목을 펼쳐 보이려고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한테도 울림이 있을 것이고요."

그의 '글 농사'는 지난해 가을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을 수확했다. 한글 창제의 주역이 승려 신미대사(1403∼1480)이고, 한글이 절에서 태어났다는 도발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기존의 통설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정찬주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 앞표지. 한글이 절집에서 태어났다는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정찬주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 앞표지. 한글이 절집에서 태어났다는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정찬주 작가와 이불재. 정 작가가 자신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찬주 작가와 이불재. 정 작가가 자신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숭유억불을 표방한 조선시대잖아요. 새로운 문자 창제는 반발이 컸을 테고. 집현전에서 주도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 한글이 창제될 때까지 집현전 학사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어요. 떠도는 야사나 저의 상상력이 아니고.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쓴 정인지의 문장에 정확히 드러나 있어요. 그만큼 비밀리에 추진됐다는 거죠."

당시 시대상황으로 볼 때 신미대사가 전면에 드러날 수 없었다는 게 정 작가의 추론이다. 작가는 한글 창제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사료에 매달렸다. 신미대사의 속가 족보까지도 훑었다고 했다.

"세종실록을 열 번 이상 봤죠. 거꾸로도 읽어봤고. '용재총화'란 책에는 훈민정음이 범어로 만들어졌다고 나와 있어요. 신미대사의 속가인 영산김씨 족보에는 신미가 집현전 학사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고요."

정 작가의 회고담이다. 씨줄 날줄로 얽혀있던 의문의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면서 역사가 하나씩 복원됐다는 얘기다. 세종이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한글로 작곡하고,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존호를 내리라고 유언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건 훈민정음 창제를 의미한 것이라고.

<천강에 비친 달>은 이렇듯 정 작가의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문학적 상상력이 한데 버무려진 결정체다. <이순신의 7년>도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그만의 문학적 상상력이 어우러질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의 기대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찬주 작가가 사는 이불재의 바깥 풍경. 기와집과 돌담이 어우러져 멋스럽다.
 정찬주 작가가 사는 이불재의 바깥 풍경. 기와집과 돌담이 어우러져 멋스럽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태그:#정찬주, #이불재, #박명숙, #천강에비친달, #이순신의7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