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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춘호 전 국회의원.
 예춘호 전 국회의원.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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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서 '변신'은 익숙한 풍경이다.

그중에서도 야당에서 여당으로 변신한 경우는 부지기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많지 않다. 일부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여당으로 돌아가곤 했다. 더러는 야당 의원으로서의 지조는 지켰으나 불법 정치자금의 유혹을 버티지 못하고 감옥살이의 흠집을 남겼다.

지난 6일 <인물현대사>가 만난 예춘호는 1960년대엔 박정희의 사람, 1980년엔 김대중의 측근으로 우리 정치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1988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에는 미련 없이 정치판을 떠났다.

올해 나이 89세. 그러나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만난 그는 3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5대 국회의원 총선거(7월 29일) 때 경남 부산 제4선거구에서 무소속 출마했다가 후보등록 72시간 만에 사퇴한 것이 정치인생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민주당 계열과 정치를 함께 할 수 있겠나"라는 깊은 회의감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에는 '가정사', '개인 형편'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실은 집권 앞둔 민주당의 선거운동 방해에 손을 들어버린 거예요. 자유당더러 독재한다고 비난하더니 막상 자기들이 집권하게 되니 독식하겠다는 욕심을 드러낸 셈이죠. 더구나 그 당의 뿌리가 되는 세력은 친일파 아니면 지주들이었고…."

"'외국 선물 가져오면 안 된다'던 박정희, 하지만..."

이듬해 5·16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진 후 부산에서 난민촌 건설운동을 하던 그를 눈여겨본 사람은 김종필(JP)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당시 공화당 사전조직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부산 동래관광호텔에서 예씨를 4시간가량 인터뷰했다.

"그때 앞자리에서 색안경 끼고 우리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있던 사내가 '됐어. 자신이 붙는군'하고 고함을 지르는 거예요. JP 왈 '이분은 최고회의 내무위원장 김형욱 장군입니다' 그러더군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공화당 사전조직의 지역책임자 면접 자리였어요."

공화당 부산시당 사무국장으로 낙점된 예씨는 승승장구했다. 1963년 11월 16일 6대 총선에서는 부산 영도에서 야당의 분열 속에 손쉽게 당선되는 행운도 따랐다. 당의장이 된 JP는 1964년 37세의 그를 집권당의 사무총장으로 발탁하며 각별한 신임을 표시했다.

여당의 살림을 맡은 사무총장이었던 만큼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들 기회도 많아졌다. 그는 집권 초기의 박정희를 '소박한 대통령'으로 기억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지만 회장이 각각 중학생, 초등학생일 때 얘기인데, 그 시절만 해도 박 대통령이 새벽 1~2시에 나를 청와대 관저로 불러내곤 했어요. 몸뻬 바지 입은 육영수 여사가 직접 차려준 돼지족발을 안주 삼아 박 대통령과 아침까지 소주를 마시며 국내·외 정세 얘기를 하곤 했죠.

그때는 관저에 페치카(러시아식 벽난로)가 있었는데, 하루는 당 간부들 모인 자리에서 대통령이 그러는 거예요. '외국 다녀온 뒤에 나에게 선물 가져오는 놈 있는데 뭘 갖고오든 다 저기(페치카를 가리키며) 들어간다. 그러니 그럴 돈 있으면 외국 사람들에게 막걸리 한잔 더 사주고 우리 실정 알리고 와라.'

그랬던 대통령이 1979년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죽었을 때는 연회 자리에서 시바스리갈 양주 마시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아, 그분이 (권좌에) 오래 계시더니 변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두 번만 하고 내려와도 박수받을 수 있었는데..."

1967년 6월 8일 7대 총선에서도 52.7% 득표율로 재선되고 정치인으로서 순풍이 계속되는 듯 보였다. 역설적으로 정권의 위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야권이 신민당으로 똘똘 뭉쳤지만, 공화당 인기가 괜찮아서 과반수 확보는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과반수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역구 10곳 이상에서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등 개헌선 확보에 집착하는 모습이 보였죠. 두 번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회 줘도 나라 발전의 초석 놓았다는 박수받을 수 있었는데, 그때부터 박 대통령이 다른 마음(집권 연장) 먹은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죠."

1969년부터 이효상 국회의장과 공화당 윤치영 의장서리, 길재호 사무총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3선개헌 불가피론'을 설파하며 박 대통령의 의중도 분명히 드러났다.

예춘호 등 '3선개헌 반대파'도 가만 있지 않았지만, 측근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대통령의 각개격파에 속수무책이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반대파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JP의 변심이었다. 1968년 5월 30일 당의장을 사퇴할 때부터 3선 개헌에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던 그가 1년 만에 반대파 의원들을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지금은 대통령을 도와야 할 때"라고 말을 180도 바꿨다.

훗날 '10·26'의 두 주인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갈등을 목격한 것도 그해 여름이었다.

"3선개헌 반대파들은 전부 제명(출당)되고 당내에서 반대 의견 말할 분은 공화당 초대 총재 지낸 정구영 선생 한 분 남은 거예요. 차지철 의원이 8월 7일 정 선생의 고향(충북 옥천)까지 쫓아왔어요. 개헌 지지 여부를 밝히라는 박 대통령의 사신에 답을 달라는 거였죠. 차가 다음날 아침에도 북아현동의 정 선생 집을 또 찾아와서 재촉하는 거예요. 마침 김재규 부장이 들렀다가 이 광경을 보고 집 밖에서 둘이 옥신각신 시비가 붙은 거예요. 그때는 말싸움으로 끝났지만 10년 뒤에는 말로 안 끝나는 사이가 된 거죠."

9월 12일 박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불렀지만 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9월 14일 새벽 3선 개헌안은 여당의 단독 소집으로 맥없이 통과됐고, 공화당 출신으로 끝까지 반대한 의원은 그와 정구영·양순직·김달수 4명뿐이었다. 기세등등했던 예춘호도 양순직과 함께 양대 선거가 예정된 1971년 1월 8일 공화당으로 복당했다.

그해 4월 부산 영도 지역구의 대선 득표율은 박정희 53.2% 대 김대중 45.3%. 대선에선 공화당이 이겼지만, 5월 총선에서는 예씨가 신민당의 거센 기세를 꺾지 못하고 41.2% 지지에 그쳐 낙선했다.

"JP는 재주가 아까운 사람"

1960년대엔 박정희의 사람, 1980년엔 김대중의 측근으로 우리 정치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예춘호 전 국회의원
 1960년대엔 박정희의 사람, 1980년엔 김대중의 측근으로 우리 정치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예춘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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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의 국회 해산, 이른바 '유신'으로 치러진 9대 총선에서는 아예 공천도 받지 못했다.

1974년 1월 7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인근 다방에서 김지하·백낙청·이호철·이희승·황석영 등 문인들의 시국선언이 벌어진 시각, 예춘호는 '정치멘토' 정구영과 공화당 탈당을 선언했다. 공화당에서 "조국의 현실을 무시한 지극히 위선적이며 배신자적 행위"라는 규탄 논평(이해원 대변인)이 나왔지만, 박 대통령이 지방시찰 중이던 김종필 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대책을 논의할 정도로 정국에 미친 파장은 적지 않았다.

1978년 5월 22일 정구영이 별세하자 며칠 뒤 JP가 빈소로 찾아왔다. 9년만의 만남이었지만 둘은 정치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공화당에서 JP, 신민당에서 김영삼, 민추협에서 김대중과 각각 일을 해봤지만 3김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하나 꼽으라면 단연 JP죠. 말년에 김영삼·김대중과 내각책임제 고리로 연합해서 정치생명을 연장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여튼 재주가 아까운 사람이에요."

1978년 12월 12일 10대 총선은 유신 치하의 마지막 전국 선거였다. 무려 11명의 후보가 난립한 부산 영도-중구에서 무소속의 그는 31.2% 득표로 재기에 성공했다. 예춘호와 신민당 후보가 1등과 2등으로 동반 당선되고, 공화당 후보는 3등으로 낙선했다.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된 상태에서 "예춘호는 당선돼도 의원직 박탈"이라는 여당의 맹공세를 누른 승리에 대해 그는 "생에 다시 없는 감격과 기쁨의 순간이었다"라고 묘사했다.

"전국의 선거 현장이 150곳이 넘는데, 선거 막판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 '유신정권이 예춘호 탄압한다'는 가십 기사들이 실리면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때 <중앙일보>에서 기사 써준 사람이 작년에 총리 내정됐다가 물러난 문창극 기자였는데…."

국회에 다시 돌아온 1979년 4~5월께 그는 양순직 의원과 함께 '옛 친구' 차지철 경호실장을 찾아갔다. 당시 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과 박 대통령의 면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차 실장이 1960년대 말에 재혼했어요. 재혼할 때 쑥스러우니까 사람들 많이 (결혼식에) 안 부르잖아요? 국회의원 중에서는 나까지 2명만 결혼식에 초대했어요. 그만큼 친한 사이라서 모처럼 찾아가서 부탁했고, 차 실장도 호의적인 반응이었죠. 

양순직 의원이 지나가는 말로 '차 실장, 이제 대통령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런 준비를 서서히 하는 게 어떠냐?'고 하자 차지철이 화를 벌컥 내면서 '정신나간 인간들아, 빨리 나가라'고 우리를 밀어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게 김대중씨가 박 대통령 직접 만나서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아깝게도 물 건너간 셈이죠."

박 대통령이 죽은 후 이듬해 5·18까지 권력의 향배가 어디로 갈지 불투명했던 기간에 그에게는 묘한 제안이나 충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10·26 이후 12·12이 터지기 전에 3~4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세경 변호사가 '군에서 시국을 바로잡기 위해 1년만 집권하겠다는데 협력할 생각 있느냐?'는 얘기를 하더군요.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 순방 출국(5월 10일)을 앞두고는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급히 불러서 집에 가보니 '당분간 조용히 있는 게 좋겠다'는 말만 하고 입을 꾹 다무는 거예요. 그때는 '바쁜 사람 붙잡고 허튼 소리할 분들이 아닌데 참 싱겁다'는 생각만 했었어요."

"반란수괴 비서실장이 필요했던 신군부, 날 택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혐의자 명단이 실린 1980년 5월 18일자 <경향신문> 호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혐의자 명단이 실린 1980년 5월 18일자 <경향신문> 호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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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씨는 1980년 5월 18일 일요일이 돼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날 오전 5시 결혼식 주례를 보기 위해 부산역에 내린 그는 곧장 김해공항을 거쳐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 조사실로 끌려갔다.

당일 <경향신문> 호외의 내란배후 조종 혐의자 명단에는 '김대중' 바로 밑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신민당에 입당한 국회의원이었지만 김대중의 '동교동 모임' 고정멤버였고, 김대중이 비서실장이나 '싱크탱크' 한국민주제도연구소 이사장 자리를 제안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됐다.

"1980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몇 차례 그런 제안이 있었죠. 김대중씨가 집에 찾아오신 적도 있었고…. 제 대답은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돕겠지만 비서실장은 안 맡겠다'였어요. 내가 누구 비서실장 할 성격도 아니었고 그분 주변 사정을 훤히 아는 것도 아니라서 거절한 거 였는데 신군부가 내란음모 조직표 만들 때는 반란수괴의 비서실장 자리에 넣을 사람이 필요했고, 내가 선택된 거죠."

그는 7월 11일 성남 육군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이곳에서 55일간 무지막지한 발길질 등 구타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1심 공판에서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잘 안 보이는 오른쪽 눈은 당시 교도소에 생긴 동상 자국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긴 '의료사고'의 흔적이다.

내란음모 사건 1심 최후 진술에서 "관대한 처분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만은 다시 생각해달라.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를 죽인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호소한 그에게 9월17일의 계엄보통군법회의(재판장 문응식 소장, 심판관은 박명철·이재흥·여운건 준장)는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강제징집 택한 아들 휴가 나왔는데 손가락이..."

1982년 3월 1일 그는 형집행정지로 원주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막내아들 종영(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씨가 같은 달 24일의 고려대 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자 신세가 됐다.

예씨는 "감옥 대신 군대 가는 조건으로 강제징집을 택한 아들이 모처럼 휴가를 나왔는데, 손가락 끝이 까맣게 변해있더라, 이른바 '녹화사업'을 당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손가락 끝이 까맣게 변하는 것은 전선을 손가락 끝에 연결하고 전기고문을 가할 때 나타나는 상처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군대 가서 생고생한 막내아들은 3년 뒤 당시 민정당 남재희 의원을 아버지로 둔 '운동권 후배' 남영숙(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씨와 결혼했다.

녹화사업이란?
1980년 광주 민중들의 민주화 운동을 폭력으로 짓누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접한 대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에 부딪치게 됐다.

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 진상규명 요구' 등 대학생들의 강력한 저항에 대해 81년 11월부터 검거된 시위 주동자-참가자들을 강제 징집으로 입대시켰다.

'녹화사업'이라는 말은 "좌경사상으로 붉게 물든 학생들을 푸르게 순화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향파악→연행→등급분류→강제입영→특별정훈교육'으로 이어지는 녹화사업 과정에서 보안사 분실에 수시로 끌려가 조사를 받던 학생들은 보안사 요원들에게 수시로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프락치 공작에 말려든 학생들은 특별휴가 또는 외박 형식으로 학교에 보내져 동료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강요받았다. 특히 김두황(고려대. 1983. 6. 8. 사망. 22사단), 정성희(연세대. 1982. 7. 23. 사망. 5사단), 이윤성(성균관대. 1983. 5. 4. 사망. 5사단) 한영현(한양대. 1983. 7. 2. 사망. 7사단), 최온순(동국대. 1983. 8. 14. 사망. 15사단) 등 녹화사업 대상자 5명의 사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1982년 9월부터 시작된 녹화사업은 1984년 11월 전담부서가 없어지며 공식적으로는 폐지됐지만 보안사 차원의 프락치 공작은 1990년대 초까지 음성적으로 이어졌다.

예씨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는 김대중-김영삼이 손잡고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다. 1987년 7월 10일 사면복권된 후에는 정치권의 러브콜이 이어졌고, 그 중에는 JP도 있었다.

"그해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 창당 앞두고 같이 하자는 JP의 제의가 있었어요. 내가 '같이 정치하려면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하다. 나를 감옥에 보낸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JP가 대선 끝날 때까지 그걸 안 하는 거예요. 그 양반과의 정치 인연도 그걸로 끝난 거죠."

"정치권 대립·갈등 심해진 건 분명"

1987년 11월1일 한겨레사회연구소 창립총회에 참석한 박용길 장로(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영숙 평화민주당 부총재, 한 사람 건너 예춘호 전 의원.
 1987년 11월1일 한겨레사회연구소 창립총회에 참석한 박용길 장로(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영숙 평화민주당 부총재, 한 사람 건너 예춘호 전 의원.
ⓒ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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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6일의 13대 대선은 양김씨가 분열하며 야권 전체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듬해에는 "더 이상 양김씨와는 정치를 못 하겠다"며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하고, 10년 만에 지역구에 재도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치 활동의 공백도 공백이지만 "김대중 도운 예춘호 본적이 전라도"라는 악선동에 어찌 대응할 도리가 없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부겸·김성식·원혜영·유인태·제정구 등 이때 낙선했던 후배들은 훗날 국회에 입성했지만, 그는 더 이상의 도전을 포기하고 정계를 떠났다.

후배들은 대부분 야당의 중진의원이 됐거나 앞으로도 한국 정치를 이끌어갈 기대주가 됐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정치 얘기는 많이 하지 않으려 했다.

"좋아진 것도 있고, 나빠진 것도 있지만...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이 너무 심한 건 분명합니다. 독재정권 시절에도 여야 대표들이 아침점심저녁 밥 같이 먹으며 뭔가를 내놓았거든요. 뭐, 이 정도만…. 허허."


태그:#예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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