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랫말 없는 노래는 없습니다. 배경 없는 그림도 없습니다. 노랫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마치 내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곰곰이 새기다보면 내 사연처럼 들려 가슴이 일렁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노래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고, 어떤 노랫말에는 이별하는 눈물이 비춥니다.

노래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그림은 맑은 가을하늘이나 철렁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담고 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어떤 그림은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이나 구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해 보는 노랫말도 좋고, 내가 느끼는 대로 감상해 보는 그림도 좋습니다. 하지만 어떤 노래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그 노래를 만들었거나 그 그림을 그린 작가가 작품에 싣고자 했던 감춰진 의미나 드러나 있지 않은 의도를 낱낱이 헤아리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해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지은이 한해영 / 펴낸곳 (주)시공사 / 2014년 11월 28일 / 값 1만 5000원)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지은이 한해영 / 펴낸곳 (주)시공사 / 2014년 11월 28일 / 값 1만 5000원)
ⓒ (주)시공사

관련사진보기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지은이 한해영, 펴낸곳 (주)시공사)은 단원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동행하는 주인공에게 그림에 담긴 뜻과 배경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책입니다.

미술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자칫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정에 동행하는 주인공이 단원과 그의 작품을 알아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단원의 그림을 감상하던 주인공은 시공을 초월해 단원의 그림에 빠져듭니다. 먹을 갈기도 하고, 짐꾼이 돼 동행하며 단원으로부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들은 물론 표정이나 몸짓 하나하나에 새긴 의미 등을 세세히 설명 듣습니다.

이야기(설명)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참 실감납니다. 둘이 나란히 앉아 뭔가를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 같기도 하고, 먼저 깨우친 단원이 심부름꾼이 된 주인공에게 뭔가를 세세하게 설명하는 장면을 연상하시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단원이 그린 <씨름>, <무동>, <서당>, <타작>, <빨래터>는 물론 <군선도> 등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도 이유 없이 그냥 등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짓고 있는 하나하나의 표정과 시선, 몸짓과 소지품에도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다는 걸 단원이 설명해 줍니다.   

단원이 차근차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타작>이었다.

"옛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상하는 것이 순서일세."

얼음장처럼 찬 단원의 목소리로 보아 여전히 심기가 편치 않으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이렇게 친절한 설명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단원은 찬찬히 먹을 갈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단전까지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는 숨이었다. 그러고는 탈속한 듯한 표정으로 붓을 들었다. 실오라기만큼도 흔들림이 없는 무심無心의 상태 지금까지 보여 준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70쪽

단원은 옛 그림을 감상하는 순서부터 일러줍니다. 때로는 구박을 하듯 야단도 치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 모두를 보듯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동행을 하며 일러주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단원이 그 그림에 담고자 했던 숨은 그림이자 구도 속에 감춰진 시대적 아름다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그림 속 아름다움

'풍속화' 하면 단원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단원은 영조임금 대인 1745년에 태어나 순조임금 대인 1806년까지 무수한 그림을 그렸던 조선의 대표적 화가입니다. 영조와 정조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데 참여한 어진화가이기도 하지만 단원하면 아무래도 무수히 남긴 풍속도가 먼저 떠오릅니다.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감상하는 단원의 풍속화는 그저 오래되고 잘 그려진 하나의 작품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원이 그린 풍속화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들어있고 세상의 소리를 전하는 소리도 들어 있습니다. 

"네 놈이 풍자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를 가르치려 드는구나. 하하하. 풍자란 웃음 뒤에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숨겨두고 있는 것이다. 해학은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고 익살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고."
단원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풍자를 즐겨 쓴 이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었지. 그는『양반전兩班傳』에서 한 푼어치의 값도 안 나가는 것이 양반이라며 양반의 특권을 신랄하게 비틀었네." -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77쪽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구나. 몰랐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림이 새롭게 보였다. 정조 임금은 세상 사람들이 무슨 마음과 재주를 가지고 있든지 자신이 빛을 비출 때 드러날 수 있다 하였다. 단원의 경우가 그러했다. 가진 것이라곤 그리는 재주밖에 없었던 단원에게 정조는 어둠 속 환한 빛이 되어 주었고, 단원은 덕분에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림 속의 잡목이 보름달의 후광이 있었기에 돋보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154쪽

저잣거리를 동행하던 두 사람은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납니다. 나룻배를 타기도하고 길을 잃기도 하며 담아낸 그림들이 <금강사군첩>에 실린 <표훈사>, <은선대십이폭> 등등입니다.

단원의 그림을 보고 설명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을 수 있습니다. 여느 책에서 볼 수도 있고, 박물관에서 큐레이터가 해주는 설명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공을 초월해 단원과 동행하며 단원으로 부터 직접 설명을 듣는 듯한 형식으로 단원의 작품을 감상해 보는 기회는 어쩜 이 책이 처음일 거라 생각됩니다.

착각이라 해도 좋고, 혼돈이라 해도 좋습니다.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지은이 한해영, 펴낸곳 (주)시공사)을 통해서 만나는 단원의 작품 속에는 단원이 동행하고 있어 그림 속 세상은 입체적이고 그림에서 느끼는 실감은 시공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지은이 한해영 / 펴낸곳 (주)시공사 / 2014년 11월 28일 / 값 1만 5000원)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 김홍도의 제자가 되어 그림 여행을 떠나다

한해영 지음, 시공아트(2014)


태그:#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한해영, #(주)시공사, #단원, #김홍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