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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펼쳐진 진주땅 전체를 나지막히 내려보고 있는 진주성 촉석루는 무수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조선개국 시기 정도전의 정적이자 이방원의 책사로 핵심적 역할을 했던 하륜이 남긴 촉석루에 대한 일기를 비롯해 600여 년간 여러 선비들이 남긴 방문기가 있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에는 수차례에 걸쳐 왜적을 막아내며 무수한 백성들의 생명을 지킨 김시민 장군과 의병들의 혁혁한 전공의 역사가 있다. 달 밝은 밤 기생 논개가 왜장과 함께 떨어진 이야기는 세상이 다 안다.

지난 11일 경남 진주에 다녀왔다. 그런 겹겹의 사연을 지닌 촉석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기와로 된 지붕을 가진, 수십 채의 건물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비교적 커다란 삼성전자서비스센터가 보인다. 1층에는 각종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디지털프라자 진주성점이 있고, 윗층에는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는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린 진주센터 수리기사들의 농성이 40여 일째 계속되고 있다. 지난 10월 6일 진주센터 사측이 일방적으로 센터 문을 닫고 폐업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폐업신고는 이뤄지지 않았고, 수리기사들이 받아야 하는 임금의 일부도 체불된 상태다. 적어도 진주에서는 꽤 알려진 문제지만, 80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폐업으로 해고된 상황이라는 점에서 볼 때 사안은 심각하다 할 수 있다.

"힘내라" "삼성이 너무 못됐다" 응원하는 진주시민들

겹겹의 사연을 지닌 촉석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기와로 된 지붕을 가진, 수십채의 건물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비교적 커다란 삼성전자서비스센터가 보인다.
▲ 진주성 바로 아래의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무더기해고 규탄 현수막 겹겹의 사연을 지닌 촉석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기와로 된 지붕을 가진, 수십채의 건물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비교적 커다란 삼성전자서비스센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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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노동자가 살기 어려운 도시, '폐업'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하는 걸까? 공공의료를 파괴하는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의 해결이 난국에 빠진 상황이 1년 이상 지속됐다. 또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적 직장폐쇄를 맞은 내화연화연료 생산업체 아세아세라텍 노동자들의 투쟁이 100일 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제는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폐업까지.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진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일해온 젊고, 평범한 노동자들이 민영화나 삼성 무노조 정책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에 의한 구조조정들에 의해 자신의 생존권을 빼앗기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사측은 10월 6일 일방적으로 센터 문을 닫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적자였지만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고 조합원을 사업장에서 몰아내기 위한 위장폐업이라는 지적이 많다. 물론 삼성전자 서비스 측은 자신이 아닌 하청업체의 일이라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진주센터에서 짧게는 2년, 길게는 30여 년을 근무한 80여 명의 수리기사들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내몰렸다. 이날 이후 진주성 북측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에선 매일 집회가 열리고 시내 곳곳에서 시민 선전전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은 사측의 폐업을 '위장폐업'이라 규정하고 해고된 80명의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폐업 36일째를 맞은 지난 11일 아침. 하나둘씩 빨간 조끼를 입은 수리기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부터 열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스물두 살 앳된 얼굴의 휴대폰 수리기사부터 1980년대 중반부터 삼성 마크 달고 삼성전자 제품 고치며 일해온 쉰세 살 외근 수리기사까지 각양각색이다.

이들은 지난 여름 45일에 걸친 노숙농성 끝에 동료였던 양산센터 수리기사 고 염호석씨의 죽음에 대한 삼성의 사과와 기준단협을 쟁취했지만 한동안 센터별 단협을 체결하지 못한 채 일해야 했다. 그러다 결국 폐업까지 맞았다.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은 매일 위장폐업과 무더기해고를 규탄하는 수리기사들의 시민 선전과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은 매일 위장폐업과 무더기해고를 규탄하는 수리기사들의 시민 선전과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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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하나둘씩 수리기사들이 모인다. 이전 같았으면 센터로 출근해 관리자의 실적 타령, 반성문 작성 강요를 들어야 했을 시간이다. 그러나 진주센터 수리기사들은 매일 아침 센터 앞 인도에 모여, 진주성곽 도로를 지나가는 출근길의 시민들을 향해 진주센터 폐업 문제를 알리고 있다.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이삼십 대 젊은 조합원부터 사오십 대 선배들까지 다양하다. 진한 진주 사투리를 쓰는 이 동네 토박이들이 많다.

오전 10시. '진주센터 위장폐업 규탄' 37일차 약식집회가 시작된다. 사회자는 항상 쩌렁쩌렁하고 담백한 말투로 사회를 보는 송동수씨다. 그는 10년 가까이 이곳 진주센터에서 외근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날은 10일 대구와 울산 등으로 흩어져 그곳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호소하고 돌아온 조합원들이 갔다 오면서 느낀 점과 고민들을 나누었다. 앞으로도 진주센터 수리기사들은 영남지역 곳곳의 노동자들을 만나며 도움을 요청할 예정이다.

반 시간 정도 집회가 끝나고 나면 여덞개 조로 흩어져 센터 앞에서 선전전을 한다. 고장난 휴대폰과 청소기 등을 들고 방문한 고객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진주센터가 폐업되고 센터 주위에 걸린 현수막, 앰프에서 울리는 투쟁가 소리 등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이다. 센터 안에 들어가도 본래 수리기사들이 앉아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센터 밖에는 5대의 이동수리버스가 세워져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원청에서 보낸 대체인력이다. 원청 정규직으로 이뤄진, 타지에서 온 대체인력들은 군말 없이 해고된 엔지니어들의 일거리를 처리하고 있다. 노조 없는 정규직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고 싶어 노동조합 가입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생계를 틀어막는 잔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폐업도시 대명사된 진주... 삼성의 사회적 책임은 어디에?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에서는 매일 위장폐업과 무더기 해고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매주 수요일 저녁7시에는 차없는거리에서의 촛불문화제도 열린다.
▲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 집회 모습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 앞에서는 매일 위장폐업과 무더기 해고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매주 수요일 저녁7시에는 차없는거리에서의 촛불문화제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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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내 진주센터 수리기사들은 시내 곳곳으로 흩어진다. 경상대 등 시내의 3개 대학가와 차없는거리, 대형마트 앞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가서 적극적으로 폐업 사태를 알린다. 이번 진주센터 폐업으로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60여만 명의 소비자들은 쓰고 있던 삼성전자 제품이 고장나도 제대로 서비스 받기가 어려워졌다.

대체인력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단골 서비스기사들을 찾던 시민들의 불만은 상당하다. "삼성이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장사질해도 되냐", "수십조씩 돈 벌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무책임하냐", "경남도민을 무시해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냐" 등 성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주시 당국과 지역사회의 지혜를 통한 사회적 해결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자칫 진주시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고담 시티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영화 <배트맨>의 배경인 '고담 시티'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미래도 없이 탐욕과 파괴의 욕망이 판치는 음울한 도시다.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미래를 꿈꿀 수 없다면 그만 한 절망이 어디 있을까? 진주시민들의 성토가 줄 잇는 이유다. 진주를 비롯한 경남 서부지역의 지역사회와 행정당국이 사태 해결의 주선자, 주체로 나서 적극적으로 사안을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날이 저물고 진주성 촉석루에도 석양이 내린다. 하루 일정을 마친 진주센터 수리기사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 해지는 진주성 촉석루 날이 저물고 진주성 촉석루에도 석양이 내린다. 하루 일정을 마친 진주센터 수리기사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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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고 진주성 촉석루에도 석양이 내린다. 하루 일정을 마친 진주센터 수리기사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도 많다. 저마다 걱정 한 가득 품지만, 이 문제가 그리 쉽게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고 한다. 한숨도 나오고, 근심도 늘어가지만 뭐든 하겠다는 각오다.

임진왜란은 진주성에서의 고군분투로 초기의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진주센터 수리기사들도 탐욕과 부정의 대재벌에 맞서 진주대첩에 나선 심정이다. '불로소득'으로 사회적 원성을 듣고 있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 이건희 시대와는 다른 삼성의 미래를 만들고자 한다면, 이곳 진주센터 수리기사들과 경남지역 도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앞으로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의 수리기사들은 진주시내 차없는거리에서 폐업 철회를 요구하는 촛불문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진주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오는 22일 오후 3시에는 전국 1천여 명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금속노조 영남권 조합원들이 진주로 모인다. 진주에서 열리는 집회로는 가장 큰 규모다. 진주센터 앞에서 폐업과 해고에 대한 규탄 집회를 열 1천여 명의 참가자들은 시내 한복판을 가로질러 시민들을 만날 예정이다.


태그:#삼성전자, #삼성, #진주성, #위장폐업,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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