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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백성이 아닌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이순신과 백성(수군도 포함)은 전쟁을 앞에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인다. 그 과정에 불신과 갈등은 전쟁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백성들은 다른 영화처럼 불가능이란 없는 영웅의 한마디에 감동받고 의기충천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지 않는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과 싸우려는 이순신이 아닌가. 암만 생각해도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왕도 나라를 버리지 않았는가. 전쟁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다. 이순신도 너무 두렵다.

하지만 <명량>에선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인 두려움이 이순신을 통해 하나의 긍정적인 화두가 된다. 스쳐지나가는 병사, 멀리서 치마를 보따리를 흔드는 백성의 눈빛까지 두려움이 가득하지만 비장하게 싸운다. 그러니 영웅이라는 껍데기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밖에. "어찌 극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신단 말입니까?" 라는 아들 회의 물음에 "죽어야겠지, 내가"라고 하는 이순신의 답은 그래서 바꿔야 한다. "믿어야겠지, 내가" 라고 말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말처럼 쉬운가. 결전의 순간 상선인 이순신의 배만 남고 11척의 배는 진군도 못하고 내뺀다. 결국 이순신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군을 안고 홀로 싸운다. 자신이 이끄는 배 한척으로 많은 왜군의 배를 '울돌목'에 끌어들여 침몰시킨다.

하지만 그건 이순신의 배도 마찬가지다. 회오리에 빨려 들어갈 줄 알면서 그는 싸운 것이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백성들이 나타난다. 자신들의 고깃배를 타고 몰려와 목숨을 걸고 무섭게 몰아치는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순신의 배를 구한다. 아, 나라를 구한 건 이순신이지만 이순신을 구한 건 백성이라니!

"백성은 자기살기만을 추구할 뿐인데 어찌 백성을 향하는 것이 충이겠냐"는 회의 물음에 답이기도 한 결말이지만 "회오리가 천행이겠냐? 백성의 도움이 천행이겠느냐?"라고 이순신 입을 통해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도 만만하지 않은 백성이냐고?'

보통 시대적 영웅을 그린 영화를 보면 백성은 언제나 뇌도 용기도 없는 '그밖에 여러분'이다. 영웅이 나타나 구해줘야 하는 미천한 존재 아니면 영웅을 위한 도구이거나. 지금까지 내가 본 영웅영화가 그랬다. 역사책도 그렇지만. 그런데 <명량>은 조금 달랐다. 영웅을 잠시 내려놓고 백성을 주체로 끌어올리다니.

감독이 <씨네21> 인터뷰에서 "현재 위기를 겪는 사람들의 어떤 애타는 갈구가 <명량>을 함께 완성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궁극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감독의 시선은 역사적 사실보다 허구를 통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힘을 끌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의도가 감동이 되어 제대로 먹혔을까?

'울돌목'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맹골수도'에서 아주 가깝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끔찍한 물살에 가슴이 미어져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속으로 수장된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참사가 일어난 그 시점에 무기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내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월호 침몰' 120일이 넘었는데도 10명의 실종자는 아직 물속에 있고, 진상규명은커녕 책임도 지지 않는 인면수심의 정부와 국회위원에게 면죄부만 주고 있는 만만한 백성이여서 부끄러웠다.

<명량>이 최단 기간 천만관객이 넘었다. 아, 천만! 그 감동의 물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순신을 구한 백성을 세월호참사와 연이은 참사로 까발려진 자신의 너덜너덜한 가치를 다시 땜질하고 다시 모르는 척 죄책감만 해소하는데 소비하는 힐링영화로 끝나는 건가. 그래서 이제는 세월호를 잊자고, 이 정도면 충분하니 경제를 살리자며 맞장구를 치는 건가.

영화<명량>이 12일 만에 기록한 '천만'이건만 그 '천만'은 다 어디가고 세월호특별법제정을 위한 '천만인 서명'은 4개월이 다가는 데도 갈 길이 멀다. '예술이 세상을 바꾸거나 어떤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거나 혹은 정치체제를 바꾸거나 고래나 레드우드 나무를 구하거나 하는 것은 못한다,'라는 레이먼드 카버의 말이 맞는 걸까.

차라리 그럴 거라면 감독이 관객에게 감동을 줘야겠다는 의미나 미장센은 쓰레기통에 쳐버리고 그 장면에 이순신을 죽게 해야 했다. 백성들은 속수무책 동동거리며 바라보고 있을 뿐 이순신을 구하지 못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해야했다. 왕도 나라도 그를 버렸으니 백성도 그를 버렸다. 저 끔찍한 물속으로. 굳이 관객이 원하는 대로 영화가 정의롭지 않은 만만한 백성의 상처를 치유해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처럼 더욱 잔인하게 관객들의 실체를 스스로 바로 보게 해야 했다. 돈에 중독되어 돈만 주면 정의고 생명이고 사랑이고 내팽겨 치는 뻔뻔함과 비겁함의 얼굴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발견하게 말이다. 영화는 어차피 허구가 아닌가. 하긴 그랬다면 백만은커녕 십만도 들지 않았겠지. 누구나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걸 줘야 감동을 받으니까, 그 점이 씁쓸하다.

감동 뒤에 오는 이 씁쓸함을 뭐라고 해야 하나.


태그:#이순신, #세월호, #명량, #천만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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