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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7월 31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7월 31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 이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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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믿습니다. 유가족 분들이 곧 예수님이시지요."

하얀 수도복 위로 노란 리본을 단 김영미 수녀가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섭씨 32도에 육박하는 더위였으나 수녀들은 머리와 온몸을 덮는 수도복을 입은 채 앉아있었다. 교회가 아닌 천막 아래의 수녀들이 신기하다는 듯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기색이었다.

7월 31일 오전 11시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사제단은 8월 16일까지 17일간 단식농성을 진행할 예정이다. 8월 16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참석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단식농성장 뒤에는 '절망에 빠진 이의 이야기는 바람에 날려도 좋단 말인가'라는 욥기 6장 26절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성경의 뜻을 따라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온 나승구 신부, 김영미 수녀를 만났다.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유가족 피해 우려돼 함께하기로

이날 오후 1시에 만난 나승구 신부는 유가족들과 사이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 신부에게 언제부터 있었냐고 묻자 "사제단의 단식농성은 오전 11시부터 세월호 문화제가 끝나는 시간까지 진행된다"라고 답했다. 세월호 문화제가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해 밤늦게까지 열리는데도 그때까지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전국사제단, 여자수도회, 남자수도회 전체가 세월호 유가족과 정식으로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단식농성은 사제단의 신부, 수녀들이 매일 번갈아가며 참가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번 단식농성 전에도 사제단 내 각 교구들은 개별적으로 세월호 참사 해결에 관심을 표해왔다. 나 신부는 "전국적으로는 팽목항에 다같이 방문했으며 염수경 추기경이 안산합동분향소에서 함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단식농성이 마무리되는 날인 8월 16일은 우리나라 천주교 순교자 124명의 시복식이 있는 날이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광화문광장에서 천주교 신도들과 시복식을 함께할 예정이다. 천주교에서 중요한 날인데도 사제단이 유가족의 곁을 지키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 신부는 "당일 교황을 경호하는 문제 때문에 단식농성장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라면서 유가족들을 걱정했다. 나 신부는 "경찰이 유가족을 몰아낼 수도 있고…, 사정이 복잡하다"며 "세월호 유가족을 지켜드리고 싶어 시복식까지 함께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미사 봉헌 하지 않는 이유... "특정 종교가 분위기 이끌어선 안 돼"

이번 사제단의 단식농성에서 돋보이는 점은 미사 봉헌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제단은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 미사'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위한 시국 미사' 등 굵직한 사안마다 미사 봉헌을 통해 천주교의 입장을 드러내왔다.

나 신부는 "유가족들이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점을 존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 특정 종교가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면서 "전체 국면에 차질이 없도록 유가족의 뜻을 따르려고 한다"고 밝혔다.

나 신부는 "17일 동안 단식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사제단의 단식농성 참여의 이유를 밝혔다. 이어서 "유가족은 하루하루 4월 16일을 사시는 분들이기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드리고자 참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곧 예수님"

천막 아래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던 김영미 수녀를 만났다. 수도복을 입고 있는 것이 덥지 않느냐고 묻자 웃으면서 답했다.

"우리는 일상이 늘 이렇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에요."

김 수녀의 등 뒤로 '절망에 빠진 이의 이야기는 바람에 날려도 좋단 말인가'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성경의 욥기 6장 26절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라며 열변을 토해냈다.

"정말 귀를 기울여야 할 곳에 바람이 지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절망에 빠진 세월호 유가족에게 누구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고 있어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거예요. 그분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사람들이 놓치고 있잖아요. 약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뜻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한 거예요."

교회에 있어야 할 수녀들이 단식농성장 아래에 있는 것이 신기한 것일까, 슬쩍 쳐다보며 지나가는 시민들이 보였다. 시민들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느냐고 묻자 김 수녀는 "우리가 신기하게 볼 사람들이라곤 생각 안 한다"며 "누구도 손 잡아주지 않을 때 종교인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낮은 곳에 예수님이 있다는 게 천주교의 뜻이에요."

성경책에서 눈을 떼 기자를 바라보는 김 수녀의 말이다. 김 수녀는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곧 예수님"이라면서 "예수님이 고통 받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세정 기자는 <오마이뉴스> 20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근혜, #세월호, #세월호특별법, #단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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