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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신화> 책표지.
 <거장 신화> 책표지.
ⓒ 펜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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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저서 <군중과 권력>에서 지휘자에게 주목했다. 지휘자가 보여주는 권력의 본질을 설명하는 대목에서였다.

"지휘자의 연주보다 권력을 더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권력의 본질을 보여 준다. 권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지휘자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권력의 속성 모두를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780쪽)

이 책에 따르면 원래 지휘라는 직업은 작곡가의 조수 역할로 시작되었다. 최초의 전문 지휘자의 전형이었던 한스 폰 뷜로가 작곡가 바그너의 영향력 아래서 조수처럼 보낸 사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그런 지휘자가 어떻게 권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책 <거장 신화>가 다루는 몇몇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다.

원래 지휘는 작곡가의 조수 역할... 권력 본질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

<거장 신화>에는 최상급 부사어 '가장'이 두 개나 따라다닌다. 두 개의 '가장'은 저자와 책에 붙는다. '세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음악평론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클래식 음악 책' 식으로 말이다. 저자인 노먼 레브레히트는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평론가라고 한다. 그는 날카로운 비판과 거침 없는 독설로 유명하다. 음악과 문화 전반에 대한 그의 평론은 대중적으로 폭넓게 읽히면서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송사에 휘말린 경우도 많다고 하니 그의 논쟁적인 기질을 익히 짐작할 만하다.

물론 저자의 날카로운 평론이 근거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책이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음악평론의 최일선에서 30여 년을 넘게 일해왔다. 그런 탄탄한 이력이 주는 신뢰감을 떠올릴 수 있다. 1991년에 이 책 초판을 내기까지 10여년간 음악가, 음반 관계자, 에이전트, 매니저 등과 대화를 나눈 사실도 범상치 않다. 그에게 붙는 부사어 '가장'은, 현장 평론가의 날카로운 분석력과 음악계의 현장을 발로 뛴 성실함이 어우러졌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카네티가 권력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지휘자를 끌어 온 배경이 있다. 옮긴이에 따르면 음악을 제외한 다른 어떤 예술 분야에서도 지휘자와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상정하는 경우는 없다. 지휘자라는 위치 또한 음악계에서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한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지휘자를 사람들이 '마에스트로', 즉 거장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제 지휘자들은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토스카니니는 죽은 지 5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는 다 큰 성인을 벌벌 떨게 하고 속옷까지 젖게 할 정도로 공포심을 안겨주는 '잔인한' 폭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를 반대하는 문화계 인물 중 맨 앞자리에 선 인물이었다. 그런 토스카니니가 죽었을 때 서구 문명 전체가 애도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각국 대통령과 총리, 비탄에 잠긴 뉴요커들의 애도를 받은 카라얀과 번스타인 들도 지휘자들의 막대한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사회적 비중이 커지자 지휘자들은 경제적으로도 정말 특별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1960년부터 1990년 사이에 노동자의 소득이 단지 네 배 상승할 동안 정상급 지휘자의 하루 지휘료는 열두 배나 증가하였다. 다르게 말해서 1910년에 정상급 지휘자는 공장 노동자가 일주일 동안 받는 임금의 열 배를 벌었지만, 1990년에는 50배를 벌었다는 것이다. … 레너드 번스타인 말년의 최저 보수는 4만 마르크였다. 그는 공산 체제 붕괴 이후인 1990년 '프라하의 봄' 음악회 한 번으로 체코의 학교 교사가 25년 동안 일해야 받을 수 있는 액수를 받았다." (707쪽)

저자는 마에스트로가 부유해질수록 음악가과 악단이 궁핍해졌다고 말한다. 소개되는 사례들은 충격적이다. 런던의 일반적인 연주자들이 1년에 3만 파운드를 버는 동안 그들의 음악감독은 100만 파운드를 벌었다. 오클랜드 심포니(1986년에 100만 달러에 가까운 채무를 청산하기 위해 반세기 동안의 역사를 접고 해체됨)의 연주자들은 실직하기 전에 반년 동안 1만3000달러의 소득을 얻었지만, 그들의 지휘자는 하룻밤에 그 이상의 금액을 거둬들였다.

지휘자들의 욕심은 끝을 몰랐다. 번스타인은 레이건 정권의 세금 완화 정책을 이용해 2만 마리를 소를 사들여 현금화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휘자들을 지휘하는 막후 실력자로 평가 받는, '세계 최대의 클래식 음악 매니지먼트 회사'의 사장이자 최대 주주인 로널드 윌포드는 휘하의 지휘자에게 미국의 납세의무를 피하기 위한 방법까지도 알려 준다.

저자의 말처럼 지난 120년 동안 지휘자는 작곡가의 궁전에 있는 겸손한 하인에서 음악의 운명을 좌우하는 주인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앞으로도 그럴까. 저자는 지휘자들의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별개로 지휘의 미래가 전에 없이 어두워 보인다고 진단한다. 음악에 대한 해석은 피상적이고, 새로운 피(젊은 지휘자)의 유입이 부족하다는 진단에서다.

저자는 이른바 '위대한 지휘자'의 존재를, 비음악적인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상업적 필요에 의해 유지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저명한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업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일은 예술적이 아니라 사회적인 이유로 20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말로 뒷받침된다. "지휘자처럼 사기꾼이 진압하기 쉬운 직종도 없다"고 한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플레쉬의 말도 마찬가지다.

저자에 따르면 신비로운 지휘자의 이미지는 왕성한 성적 탐욕에 대한 소문으로 증폭되기도 한다. 자타가 공언하는 말러의 계승자 중 하나였던 오토 클렘페러는 지휘대 위에서 애인의 남편에게 말채찍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철십자가 그려진 나치 깃발 앞에 선 푸르트벵글러는 연주회 전에 항상 새로운 여성과 대기실로 들어갔다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저자는 지휘자들의 '신화'가 이윤에 목을 거는 오케스트라와 음반사, 에이전트 산업계의 협력 외에 협조적인 평론가들의 묵인 아래서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위대한 지휘자'라는 표현 자체가 비평계에서 나왔다. 평론가들은 그야말로 지휘자의 "미덕은 부풀려지고 죄악은 은폐"(27쪽)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주인공들이다.

"지휘자는 절대로 일자리를 찾지 않는다. 그는 음악감독직 '초청을 수락한다'. 그는 보수가 충분하지 못해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로 그 자리를 사임한다"고 보도된다. 그는 낡은 음반을 재발매하라고 음반사의 중역들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스페셜 에디션을 발매하는 것을 허가한다." 마에스트로는 지쳤다고 느끼면 하룻밤 휴가를 내는 대신 '컨디션이 나쁘다'고 발표하고, 사람들이 서툰 대역 지휘자의 연주를 듣기 위해 매표소에서 돈을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표를 늦춰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29쪽)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지휘의 메커니즘을 파고들어서 지휘라는 무한히 매혹적인 전문 분야의 사회적·심리적·정치적·경제적 역학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완곡어법과 기술적 아첨, 신격화를 배제하고 평범한 언어로 분석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나온 마에스트로 이야기는, 저자 자신의 말을 빌리면 사회의 폭력적인 환경에 의해 왜곡되어 온 개인적 노력과 야심의 연대기였다.

"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나쁜 지휘자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영웅적인 행동과 마찬가지로 지휘 행위 또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권력의 남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지휘(자)에 대한 이런 관점은, 저자가 1991년의 초판 서문과 1998년의 재판 마지막 장에서 거듭 인용하는 말러의 말, "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나쁜 지휘자만 있을 뿐이다"를 통해 좀 더 극적으로 강화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갈릴레오의 삶>에서 갈릴레오의 입을 빌려 "아닙니다. 영웅이 필요한 곳이야말로 불행한 곳이지요"라고 말한 경우를 사례로 든 까닭도 영웅화한 지휘자들을 꼬집기 위한 의동에서였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지휘 세계를 '뒷담화'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지휘계의 미래를 마냥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터무니없는 과장 같지만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는 상투적인 표현, "클래식 음악은 영원하다"를 인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전 세계를 주유하는 '제트족 지휘자'들이 '영웅이 필요한 곳이야말로 불행한 곳'이라는 브레히트의 말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조금 미심쩍긴 하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거장 신화>(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 펜타그램 / 2014. 7. 1. / 823쪽 / 28,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거장 신화 - 클래식 음악의 종말과 권력을 추구한 위대한 지휘자들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펜타그램(2014)


태그:#<거장 신화>,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펜타그램, #마에스트로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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