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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밀양은 내게 너무 먼 곳이었다. 몇 번 다녀오기도 했지만, 다섯 시간씩 걸리는 물리적인 거리가 마음으로도 좁혀지지 않았다. 작년 여름부터 틈틈이 밀양 송전탑 관련 사진을 찍어 온 터라 현장으로 달려가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도 났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장 아이들을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더욱 솔직히 밀양에 관심과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나의 일상으로 밀양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기 이전에 당장 먹고 살아야 하고, 밀려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하는 내 일들이 있다. 어쩔 수 없지, 나의 작은 힘으로 뭘 하겠어? 따지고 보면 내 일도 아니고 나랑 가까운 사람들도 아니지 않은가? 토요일에 밀양의 촛불집회에 참여하자는 웹자보를 보며 '가자!'고 마음먹으면서도 주말을 나태하게 보내고 싶은 유혹이 함께 떠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일상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다음날, 아이들을 보내고 출근을 했는데 식당에서 점심 반찬으로 어묵탕, 닭볶음, 새우조림이 나왔다. 식판을 보니 울컥 한숨이 터져 나왔다. 원산지를 알 수 없는 값싼 잡어로 만든다는 어묵, 후쿠시마 참사 이후 어묵을 보면 방사능 경고등이 깜박거리는 것만 같다. 그럼 닭고기는 괜찮은가? 생협 모임에서 공장식 축산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수요가 높은 가슴살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식용 닭들은 가슴이 큰 품종으로 개량을 한다는 것이었다. 비좁은 닭장 안에서 비대한 가슴에 어울리지 않게 가는 다리로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닭들을 상상하니 젓가락을 댈 수 없었다. 새우, 마트에서 이렇게 큰 새우를, 이렇게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다니! 감탄해 마지 않았던 그 새우는 참혹한 불법 노예노동으로 키운 것이라 하지 않던가.

당장 눈앞의 밥상조차 이러한데 내게 허락된 평온한 일상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삶이 이미 전쟁터인데 나와 내 가족이 밀양처럼 짓밟히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것이, 언제까지나 안전하고 무탈하기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말이다.

밀양의 송전탑을 따라가니 그 근원엔 잘못된 에너지 정책과 핵발전소가 있었다. 핵발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아이들, 미래 세대에 엄청난 재앙을 물려준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에너지 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내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고 개인적인 실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대안을 고민하는 정당에 가입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도 노후 원전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다. 밀양의 송전탑 싸움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왜 초고압 송전시설을 지어야 하는지, 전기 소비가 무분별하게 늘어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생태계와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 발전 방식이 과연 올바른지 묻는다. 그리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송전탑 반대 대책위와 시민단체의 자료를 검토한다면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 대규모 국책 사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녹조 라떼'가 된 4대강에서도 쓰디쓴 교훈을 얻지 않았나.

지난 6월 14일 토요일 아침, 밀양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밀양이 여전히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만, 어차피 서울에서도 그리 안녕치 못한 일상에 전전긍긍하느니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고 생각하니 오히려 모든 게 쉽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기차 나들이를 한다며 한껏 들떴다.

밀양 부북면 위양마을
 밀양 부북면 위양마을
ⓒ 빈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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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북면 위양마을은 작년 여름, 처음 밀양에 갔을 때 시골 마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던 곳이다. 낡은 철문에서 세월의 흔적을, 똑 고르지 않고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담벼락에서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넝쿨이 벽을 타고 올라가 대문 위에서 차양을 만들고 커다란 호박이 달린 모습에서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덕촌 할매, 열일곱에 막내 며느리로 시집와 시아버지와의 약속으로 한평생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그분이 여기에 산다. 가부장제 최대 피해자일 수 있는 그녀가 조상과의 약속을 부여잡고 이 힘든 싸움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여름, 그분의 집 마당에서 한나절을 함께 보내며 나는 그분의 삶을 조금은 수긍할 수 있었다. 밤낮으로 농성장을 지키며 언제 이렇게 농사를 지었을까? 깻단을 묶는 바지런한 손놀림,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알토란같은 고추밭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가녀리고 심하게 구부정한 그분의 모습이 낮게 엎드린 들꽃 같았다. 평생 이렇게 땅을 일구어 자식들을 키워냈고 물림 받은 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준다는 자긍심, '고향을 지킨다'는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6 11 행정대집행 이후 경찰이 평밭 마을 입구를 막고 있다.
 6 11 행정대집행 이후 경찰이 평밭 마을 입구를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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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 할매가 살다시피 지켜온 127번 농성장에는 이제 올라갈 수 없다. 평밭 마을 표지석 입구부터 경찰이 막아섰다. 녹음이 짙푸른 산골 마을 초입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낯설다. 작년 10월부터 밀양에 경찰이 주둔하며 쓴 경비가 백억이 넘는다는데, 돈이 많이 들어 지중화를 할 수 없다는 정부와 한전의 씀씀이를 납득할 수가 없다.

부북면 위양마을. 할매들이 촛불집회 장소로 이동
 부북면 위양마을. 할매들이 촛불집회 장소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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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할매의 마늘
 덕촌할매의 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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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할매가 연대자들을 반갑게 맞는다
 덕촌할매가 연대자들을 반갑게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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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장댁 사모님과 수녀님. 얼굴에 피멍이 들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장댁 사모님과 수녀님. 얼굴에 피멍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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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이구나'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마을은, 여전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작년 여름에 내가 사진으로 찍은 그 담벼락엔 똑같은 모습으로 새로운 마늘이 걸려 있었고 논밭의 풍경이 계절이 이르다 뿐이지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할매들은 손가락으로 산 위쪽을 가리켰다. 흉물스럽게 우뚝 솟은 송전탑 두 개가 보였다. 이제 철거당한 농성장에 새로운 송전탑들이 들어서고 전선이 걸리면 초고압 전기가 이 마을을 에워싸게 될 것이다.

현장에서 실신했던 이장댁 사모님은 얼굴에 커다란 피멍이 맺혔고 덕촌 할매는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할매들은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있었다. 침울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잔뜩 무거웠던 마음이 함박웃음으로, 반갑게 손잡아주는 할매들의 따스한 온기에 조금씩 사그라졌다.

덕촌 할매의 앞마당도 여전했다. 마당에는 채소가 줄지어 자라고 있었고 고양이들은 나른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마늘, 토실토실 살찐 마늘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에 눈길이 머물렀다. 암흑 같았던 지난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 전쟁 같은 나날에도 마늘을 이렇게 튼실하게 길러 낸 할매들의 손이 참 숭고하게 느껴졌다. 할매들은 단 한 순간도, 삶을 허투로 살지 않았구나, 정말, 이 참혹한 싸움에 지지 않았구나! 이것이 바로 할매들이 그렇게 지키고자 하는 '지금 이대로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팡이를 짚고 들판을 가로질러 집회 장소로 향하는 할매들의 모습이 무척 당당해 보였다.

밀양 150차 촛불집회
 밀양 150차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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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차 밀양 촛불집회
 150차 밀양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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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150차 촛불 집회. 덕촌 할매가 발언을 마치고 연대자들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밀양 150차 촛불 집회. 덕촌 할매가 발언을 마치고 연대자들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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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 할매의 발.
 덕촌 할매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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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차 촛불 문화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모였다. 6월 11일 현장에 대한 증언을 듣고 동영상을 함께 보았다.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전하는 행사들이 이어졌다. 이제 끝이구나, 마지막 농성장이 철거되었을 때 들었던 이 생각이 나의 나약함이었음을 깨달았다.

밀양을 보며 나는 줄곧 '나라면 어떨 것인가?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인가?'하는 질문을 해 보았다. 이런 모욕과 수치를 견디느니 손해를 입고 억울해도 그냥 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때로는 이렇게 오랜 세월 싸우는 할매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에서나마 밀양을 함께 '살며' '삶의 터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재산을 좀 더 늘리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전셋집을 떠돌아야 하는 도시의 우리와는 다르게 한 곳에서 터 잡고 오래 살아온 삶의 무게는 필시 다를 것이다. 조상 대대로 길게는 수백 년부터, 마침내 정착할 곳을 찾아 수십 년 동안 뿌리내린 삶, 그것은 가볍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쉽게 파헤쳐지지도 않으리라.

작년 여름, 밀양을 다녀와서 나는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맛난 자두를 맛보았노라고 자랑했다. 아이들은 밀양에서 잘 익은 살구와 보리수를 맛보았고 산딸기를 따 먹는 즐거움을 누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집회에서 현장을 재현하는 동영상 소리에 무섭다고 울기도 했다.

아홉 살 딸아이는 밀양에 다녀와서 일기장에 '산 위에 송전탑이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 송전탑을 초록으로 칠해도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라고 적었다.

이날 희망버스는 갑작스레 만든 자리인데도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타고 왔다. "희망이 무슨 뜻인 줄 아니?"라는 나의 물음에 딸 아이는 "뭔가 될 거라는 생각을 품고 꼭 이루려는 마음"이라고 답했다. 희망 버스에 몸을 실었던 이들이나 밀양의 주민들이나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는 '굴하지 않는 인간정신이 여기에 있습니다!'라며 밀양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시즌 2에 돌입한다고 알렸다. 그동안 밀양에서 벌어진 폭력과 인권 침해, 공동체 파괴를 기록하고 알려내어 그 책임을 묻는 한편 잘못된 법을 개정하고 위험한 핵발전소를 멈추는 운동을 열어나갈 것임을 밝혔다. 바로 전 주말에는 고정, 용회, 위양, 평밭 마을 4곳에서 농성장을 새로 짓고 개소식을 열었다. 앞으로의 촛불집회는 점차 '장터' 형식으로 바꾸어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직접 키운 작물을 먹고 나누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한다.

작년 5월, 밀양에 처음 공권력이 투입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밀양의 송전탑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지난 1년, 밀양이 내게는 무엇이었을까? 나 역시 내 방식으로 '밀양을 살며' 에너지 문제와 핵발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우리의 삶이 결국 서로 연결돼 있으며 '함께 살기'위한 고리를 맞추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밀양에서 마주친 여러 인연들, 나는 밀양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휴대폰에 녹음해서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다. 처음에는 경상도 사투리를 잘 몰라서 그랬는데 나중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들의 역사가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127번 농성장에서 바라본 화악산 2014년 1월
 127번 농성장에서 바라본 화악산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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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되면 고사리 끊으러 가고
가을 되면 표고 따러 가고
감나무에 홍시 따가지고 
아이 업고 이고지고 삼사십리 밀양 장에 걸어 다녔지,
버스비 고거 아까와서, 우리 아덜 연필 사 줄라고.
육 남매가 산 넘어 그렇게 초등학교 다녔어.
영감 따라 스물여섯에, 이 산골에서 오십 년, 한평생을 살았다.

화악산 기슭, 평밭 마을에서 만났던 할매의 음성을 옮겨 적으며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는 한, 밀양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두 아이와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줌마의 밀양 이야기, 6·11 행정 대집행을 지켜보고 6·14 밀양 촛불 집회를 다녀온 기록이다.



태그:#밀양, #송전탑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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