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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향기로 채워진 5월의 헤이리
 아카시아 꽃향기로 채워진 5월의 헤이리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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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으로 가득한 5월의 오늘, 산 자만이 누리는 것이 미안할 만큼 싱그럽습니다.

#1 바위 뒤에 숨은 그림들

부부가 입대후 첫 외박을 나온 아들과 함께 모티프원에 오셨습니다. 

어머님은 두 달 만에 만나는 아들을 이리보고 저리보고, 감격하고 감읍한 마음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습니다.

늦은 밤, 과일을 챙겨 먹이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오신 어머님에게 물었습니다.

"군복 입은 아들, 대견하시지요?" 

어머님은 이 한마디 물음에 10분도 넘게 접시를 들고 선 채로 아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쏟아놓았습니다.

"아들을 보충대에 두고 돌아서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석주는 부모의 속 한번 썩여 본 적이 없어요. 석주를 낳고 얼마지나지 않아 친정의 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 충격으로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다시 어머님이 쓰러지셨습니다. 제가 모시고 대소변도 받아내야하는 생활을 여러해 했습니다. 친정이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저의 남편은 석주 하나만 잘 키우자고 하더군요. 엄마를 돌보아야하는 상황에서 다시 둘째를 낳아 키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남편의 배려였습니다. 

석주는 외할머니 때문에 늘 집에 있어야하는 저와 항상 책을 보았습니다. 함께 책을 읽고 문제를 푸는 것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때로는 외할머니의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하고 냄새나는 할머니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기를 원했던 아이입니다.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은 놀기를 좋아하는데 석주는 공부만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선생님이 저를 불러 말씀하시더군요. 석주에게 너무 공부만을 시키지 말도록……. 그때 선생님에게 집에서도 석주가 놀이보다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을 더 즐긴다는 것을 설명 드려서 선생님의 오해를 풀어드려야 했습니다. 석주는 선생님도 이해하기 어려운, 공부가 놀이였던 아이었어요. 

한번은 학교에서 바위를 그렸다는 스케치북을 보여주었어요. 그곳에는 덜렁 원하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아해하는 엄마에게 석주가 10분 이상 그 바위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이 바위 뒤에 어떤 꽃이 숨어있고 어떤 곤충과 식물들이 함께 놀고 있는지를……. 단지 바위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석주는 그런 아이였어요." 

#2 "저는 외계인과 살고 있어요"

부부가 오셨습니다. 하루를 헤이리에서 보내고 어둠이 내린 시간, 부부가 모티프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오늘 하루, 마침내 하나를 건졌군요. 이곳입니다."

다시 서재로 내려오신 부인이 이 책 저 책에 눈길을 주며 말했습니다.

"오늘 낮 헤이리가 선생님을 만족시키지 못했군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어린이들로 넘쳤어요. 혼란하고……."

예상된 말씀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5월에는 특히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나들이가 많습니다. 아마 바쁜 일상으로 어린 자녀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강박을 면할 기회를 드리니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으로 저는 5월 헤이리의 주말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또한 헤이리의 가장 큰 문제는 방문객들이 주말에 집중되는 심한 편중현상입니다. 한정된 자원의 헤이리가 주중 5일은 방치되고 주말 이틀은 인파로 몸살입니다. 나라의 시스템이 그러하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아무튼 방문객의 방문을 분산하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금방 고개를 끄덕여주셨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저는 미국에서 20여 년간 생활하면서 사업도 하고 소설도 쓰는 사람입니다. 같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 서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한 시간쯤 뒤에 남편이 서재로 내려오셔서 열심히 서재를 훑었습니다.

- 찾는 책이 있으세요?
"혹시 이 서재에 추리소설이 없습니까? 제가 추리소설을 좋아하거든요. 그 얘기를 하자 아내가 서재에서 추리소설은 없다고 말하면서 찾아오면 10만원을 주겠다고 하네요."

- 부인께서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서 아까 사모님께서도 쉽게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선생님을 도와드린다면 그 상금의 반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사실 아내가 건 10만원의 상금도 사실은 제 주머니에서 나간 돈입니다. 하지만 드리지요."

- 셜록홈즈 전접은 없지만 '장미의 이름'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선생님이 원하지는 한 두시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과 척학에 가까운 역사소설같은 너무 무거운 책이므로 5만원은 받지 않겠습니다.
"저는 완전히 외계인과 살고 있어요. 아내가 하는 얘기들은 제가 듣기에 완전히 허황된 4차원의 얘기들이에요. 그런데 아내의 얘기를 듣는 다른 사람들은 아내에게 말해요. '순수하다'라고... 아니 외계인의 말이 순수한가, 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 이해가 가요. 선생님은 정말 행운이군요. 선생님 친구분 중에 어느 분이 외계인을 부인으로 둔 사람은 없잖아요. 축하드립니다.
"모티프원에 온 것은 대학원에 다니는 딸이 예약해서 보내 준 것입니다. 아내는 특히 TV드라마를 좋아해요. 거실에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보는 엄마와 딸이 늘 다투어요. 그 딸이 TV가 없고 책만 있는 곳을 골라 저희 부부를 이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3 "중2 딸이 남자친구를 사겨야할까요?"

엄마와 중학생 딸, 모녀가 왔습니다. 저녁에 책을 고르기 위해 함께 서재로 왔습니다.

- 따님이 고등학생인가요?
"중학교 2학년이에요."

- 오, 너무 성숙해서 외모로는 구분을 할 수가 없어요. 전 이렇게 모녀만이 여행을 오는 분을 보면 참 부러워요. 엄마와 단 둘만의 여행이 딸에게 평생을 두고 얼마나 아름답게 반추되겠어요. 언제부터 모녀만의 여행을 즐기셨나요?"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터에요. 1년에 한 번. 이번이 네 번째이군요."

-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누어요? 아빠, 흉을 보시나요?
"딸은 학교 얘기를 많이 해요. 그리고 친구들 얘기……. 물론 저는 남편얘기를 하지요. 그 얘기 중에는 남편을 흉보는 얘기도 물론 있습니다."

- 아빠를 흉보는 그 말에 딸이 동조를 합니까? 어머니 편으로…….
"처음에는 물론 제 말들을 긍정해주어요. '그거는 글래...'라는 그 말이 결국 엄마를 위한 립서비스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빠가 엄마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잖아!'라고 끝에는 아빠 편을 들지요."

- 모티프원에는 모녀는 물론 부녀도 간혹 오세요. 성장기 단 둘이 여행하는 것은 아무 방해 없이 서로의 얘기에만 집중하는 것이니 두 사람 모두의 성장을 위한 나들이이지요. 지난 달에는 부인이 대학생 딸과 오셨는데 딸에게 고민을 얘기하고 딸에게 충고를 받으니 참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음번에는 부녀 단 둘이 여행을 한 번 보내주세요.
"네, 그래야 겠네요. 지금까지 아빠는 아들하고만 여행을 갔었는데……."

- 딸아! 남자친구 있니?
"없어요."

- 엄마 계신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 (엄마)솔직하게 말해봐. 혹시 엄마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야?
"아니. 없어!"

- 그럼, 한 반의 친구 중에 얼마나 남자친구가 있어?
"한 20% 정도요."

-지금 사귀고 있는 친구들만 그렇다는 거지? 그럼,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는 친구까지 합한다면?
"한 80%는 될 거예요."

- 딸은 그 80% 중에 들까?
"아니요."

- 왜,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는 거지?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 되는 것 아니야?
"(엄마)대학교에 가서 만나도 되지요."

- 제 생각은 달라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먼저라고 여겨요. 그때그때 남자를 만나면서 남자에 대한 공부를 해야지요. 그래야 결혼할 때는 그런 공부를 통해서 실수 없는 선택을 하지요. 시험공부는 평소에 해두어야지 시험일에 임박해서 몰아서 외운 벼락치기 공부는 결국 자기 것이 되기 어렵잖아요. 어머님도 따님이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떻게 도와야하지요?"

- 시장 가시는 길에라도 멋진 남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을 보면 잘 얘기해서 전화번호를 따야지요. 그리고 따님에게 전해주는 거예요.
"하하하. 그 학생들이 저를 무서워하면 어떻하지요?"

- 사실대로 얘기해지요. 예쁜 딸이 있는데 소개해주려고 그런다고……. 오늘 밤에 모녀가 그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내일 제게 결과를 얘기해주세요.

오늘 아침 여유 있게 모녀가 방을 나왔습니다. 

- 어떻게 결론이 났나요?
"(엄마)미루기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딸)언제 그랬어?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4 "할아버지! 제가 안아드릴게요"
 
보랏빛 붓꽃을 방문한 벌 한 마리
 보랏빛 붓꽃을 방문한 벌 한 마리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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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5살 지효가 서재에 한발만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이제 가려고요. 인사하러왔어요."

단정히 단장을 하고 큰 인형을 안고 있는 지효가 마치 말하는 인형처럼 귀여웠습니다. 저는 지효와 함께 지효의 엄마, 아빠가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지효가 할아버님의 수염을 너무 좋아해요."

지효어머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지효보다 어린 아이들은 처음 저를 보면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수염이 긴 사람을 처음 보니까. 물론 다음날 갈 때는 제 수염을 한 번 만져보고 싶어 하지만... 정말 고맙군요. 지효는 처음부터 내 수염을 좋아해주니……."

엄마와 얘기하고 있는 옆에 있던 지효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안아 드릴게요."

지효의 느닷없는 허그 제의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지효에게 안겼습니다.

지효의 두 팔이 제 등 뒤에서 마나지는 못했지만 지효의 작은 품에 안긴 순간 저는 천사에 품에 안긴 것이 이렇지 싶었습니다.

"지효가 유치원에 다니나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아니요. 지효는 '숲학교'에 다녀요. 글자를 배우는 대신 풀과 나무와 더불어 지내며 노는 거예요."

지효가 이렇게 경계 없이 섞일 수 있는 이유를 알만했습니다.

"숲속에서는 모두가 친구가 되지요. 풀도 나무도, 곤충도 벌레도... 서로 어울려 함께 사는 것을 배움 없이 배웠구나. 지효는……." 

지효를 보내고 모티프원의 정원을 둘러보니 보드라운 햇볕아래 보랏빛 붓꽃이 지효의 웃음을 웃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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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헤이리, #파주, #모티프원, #게스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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