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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의 발명> 책표지.
 <모성애의 발명> 책표지.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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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맞벌이 부부다. 집안 일과 아이들 챙기는 일이 버거워질 때마다 아내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당분간 일을 쉬고, 세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제안한다.

막내가 세 살이 되면서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작년부터 이런 말을 할 때가 부쩍 더 많아졌다. 세 살짜리 아이가 아침 7시를 전후로 일어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눈을 흘긴다. 아내 입에서 "우리 형편에..."로 시작하는 '현실적인' 이유들이 쏟아진다. 나는 "애들이 중요하냐, 돈이 중요하냐"는 억짓말로 대꾸한다. 세상 천지에 자식보다 돈을 더 귀히 여기는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졸지에 자식들에게 '나쁜 엄마'가 된 아내는 금세 표정이 굳어진다. 짤막한 말다툼이 끝난 우리 집에는 짙고 긴 한랭전선이 펼쳐진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아내의 '모성애'를 의심한다. 아내에게 모성애라는 게 있을까. 이런저런 사정은 죄다 거두절미한 채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발명된 모성애'라니...

이 책은 <모성애의 발명>이라는 도전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모성애를 여성의 본능처럼 여긴다. 그런데 '발명된 모성애'라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명제다. 모성애에 관한 기존의 상식을 깨는 책 제목(과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추천사에 따르면, 이 책은 "발명된 모성애의 정체를 밝히는 가족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거의 유일"하다. 어찌하여 '발명된 모성애'인가. 저자에 따르면, 산업사회 이전에 삶의 형태는 본질적인 영역들에서 개인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가족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어머니가 되는 것은 (결혼한) 여성의 삶에서 지극히 당연한 소명이었다. 여성에게는 '나만의' 인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삶이 일차적으로 가족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주로 감정보다는 가족경제의 요구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가장 자연스러운' 끈이라는 모성애만 하더라도, 많은 사회사학자가 과연 과거에 모성애가 존재했는지, 아니면 근대에 와서 비로소 만들어진 것인지를 의심스럽게 여긴다." - 53쪽

한마디로 모성애가 '가족경제의 요구'와 같은 구조적·외적 요인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가족구조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저자는 근대 산업사회 이후 '한 집안'이 해체되면서 개인이 중심을 차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생행로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생존 경쟁과 자기주장이라는 노동시장의 요구와 관련된다. 그 결과 업적과 규율, 목표 지향성 등의 새로운 태도와 능력, 행동방식 등이 더 중시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여성의 새로운 인생행로가 만들어졌다.

"산업사회의 등장과 동시에 보완적 형태의 또다른 인생행로가 필요해지는데, '근대화의 가혹함'을 완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그 임무로 할 수 있다. 이 인생행로는 시장이라는 조건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모든 인간적 욕구를 떠맡게 된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성취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에서 지원하고 원기를 북돋아주며 격려하고 확인해주는 등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에게 주어진 노동 및 삶의 형태다." - 67쪽

이와 같은 변화는 여성의 특성에 대한 인식 양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여성이 아동 교육에 적합한 존재로 규정되는 예를 든다. 이와 같은 '규정'의 근거로, 여성이 '본성적으로' 섬세하고 희생적이라는 점, 여성이 미성숙한 것처럼 보여 어린이에게 더 가깝다는 점 등이 소개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어린이를 책임지고 기르는 여성의 이미지는, 수많은 교육서와 문학 작품, 예술 등을 통해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번성한 후 20세기에도 계속되면서 광범위하게 퍼진다. 모성 이데올로기로 이어지는 모성 신화라는 새로운 숭배 현상도 나타난다. 그 핵심에는 "모성을 위한 자아의 포기가 여성의 지고의 행복"(78쪽)이라는 모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물론 오늘날의 여성의 삶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저자가 보기에 여성들은 19세기 말에 (가정에서의 삶보다) 직업활동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이행기를 힘겹게 경험한다. 자연스럽게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게 되면서 직업에 대한 욕구가 증가한다.

"많은 여성들은 단지 '돈벌이'만을 위해 직업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을 원하며, 그래서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계속 직업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노동세계에는 그런 '이중 부담'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두 영역에 참여한 여성들 중 다수가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긴장 상태를 경험했다. 가정 저편의 세계에서 새로운 자유를 추구했던 그들이 찾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루 48시간", 끊임 없는 부담과 초과 부담이다. 이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꿈은 실컷 잠을 자는 것이 되었다." - 183쪽

글머리의 내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내 아내의 노동은 온전히 아내 혼자만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 책의 주장처럼, 가족이나 사회구조의 변화와 같은 거시적인 요인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돈' 때문만이라고도 말하기 힘들다. 저자의 말처럼, 독립성과 같은 전혀 다른 가치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많은 여성이 가정에 머물면서 '발명된 모성애'의 굴레에 얽매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면서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남성에 비해 20대를 제외한 나머지 연령대에서 20~30% 낮은 점이 그 방증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국 남성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격차는 22.4퍼센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4개 회원국 중 4위에 해당할 정도로 크다. OECD는 한국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남성 수준으로 높아지면 국가의 전체적인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퍼센트 포인트 증가할 것이라고도 밝혔다고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사회구조나 문화를 만들고, 이를 위해 양질의 여성 일자리를 크게 확충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저출산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정부도 지난 2월 25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통해 오는 2017년까지 청년·여성분야에서 16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며 거창한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경력단절 방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비정규직이나 소규모 사업장, 서비스업 종사 여성들이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를 썼을 때 부당해고한 사업장은 제재한다는 방침도 나름대로 눈여겨 볼 만하다.

양성의 평등지수가 높을 때 출산이 축복이 되고...

하지만 정부가 창출하겠다는 일자리 160만 개가 과연 얼마나 양질의 수준을 유지할지, 정부의 제재가 실효성 있게 현장에 적용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수 년째 일터 내 육아시설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아내의 직장과, 그런 직장들을 수수방관하는 정부나 지자체의 태도가 미더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결론에서 평등사회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한다. 양성의 평등지수가 높을 때 출산이 축복이 되고, 여성이 그동안 해왔던 사회적 경력도 단절되지 않고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꾸준히 출산지원금이니, 세금 혜택이니 하는 식으로 '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추천인이 소개하는 바, 양성 평등 문화를 도외시한 채 돈으로 출산율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독일의 출산율 장려 정책을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발명된 모성애'의 억압에 저항하려고 '결혼·임신·출산 파업'을 하는 여성들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모성애의 발명>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이재원 옮김 | 알마 | 2014. 1. 20. | 255쪽 | 13,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모성애의 발명 - '엄마'라는 딜레마와 모성애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 옮김, 알마(2014)


태그:#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모성애의 발명>, #이재원 옮김, #알마,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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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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