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주, 한 해외입양인을 집에 초대했다. 그와 함께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지하철역까지 배웅하는데 이 해외입양인이 내게 말했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싶네요."

'엄마가 해준 밥'을 먹어보지 못했던 그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해외입양인들은 강제로 친부모 품에서 분리된 사람들이다. 그 후 그들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백인국가로 해외입양됐다. 나는 30대에 유럽에서 10년 동안 살았는데, 가끔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다보니 별 위기 없이 어려운 순간들을 무난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정체성 형성이 안 된 황인종 어린아이가 백인마을에 자라면서 백인학교에 다니면서 겪는 인종차별을 혼자 힘으로 극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10대 청소년기에 인종주의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가난해도 친부모의 품에서 사는 게 정서적 안정감 형성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해외입양을 적극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국가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생활고와 사회적 차별로인해 헤어지지 않게끔 모든 조치를 해줘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의 사회복지 공약의 후퇴와 백지화를 용서할 수 없다. 열악한 사회복지와 해외입양은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생후 8개월만에 미국에 보내진 아이

이영숙씨
 이영숙씨
ⓒ 김성수

관련사진보기


이영숙(미국 이름 Kris Park)씨는 대전에 살고 있는 미국입양인이다. 나는 지난 6일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 그를 '뿌리의집'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이영숙씨는 1976년 5월 19일 인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76년 5월 21일 그녀는 인천시 용현동 159번지 해성영아원으로 입소된다. 그녀의 이름과 출생일자는 당시 해성영아원에서 지은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76년 11월 30일, 그녀는 대한사회복지회에 의해 해외입양 결정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7년 1월 28일, 대한사회복지회로 신병이 인수된 후 곧 미국 코네티컷 주로 해외입양 보내진다.

이렇게 생후 약 8개월 만에 미국으로 해외입양 보내진 이영숙씨는 한국 친부모에 대해 아는 사실이나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

이영숙씨 1976년 입양 당시 모습
 이영숙씨 1976년 입양 당시 모습
ⓒ 이영숙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이영숙씨의 입양부는 코네티컷 주 공장에서 일했고, 입양모는 할인매장에서 일했던 맞벌이 부부였다. 형제자매도 없이 그녀는 맞벌이 양부모와 코네티컷 주의 한 '워킹클래스'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았다. 그녀는 힘겨운 10대 시절을 주위 친구들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친구들과는 무척 가깝게 지낸다.

이영숙씨가 16세가 되던 지난 1993년, 공장에서 일하던 양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후 양부는 회복하지 못하고 3년간 병상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양부 사망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96년, 이영숙씨는 집을 나와 홀로 워싱턴D.C.에서 보모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어 대학에 다녔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 그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재미교포 중학교 교사를 만나 한글을 배우고 한국음식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이영숙씨가 물냉면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2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입양인들을 만나다

이영숙씨가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모습
 이영숙씨가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모습
ⓒ 이영숙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9년, 이영숙씨는 23세 때 처음으로 워싱턴D.C.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다른 한국인 입양인들을 단체로 만날 수 있었다. 이때의 즐거운 경험과 기쁨은 지금도 이영숙씨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지난 2000년, 모국인 한국에 대해 너무 알고 싶어서 입양 보내진 지 23년 만에 이영숙씨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지난 2004년 결혼 뒤 신혼여행으로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했다. 2012년 세 번재 방문에 이어 2013년 8월부터는 대전대학에서 영어교수로 일하며 한국에서 장기 거주하고 있다.

지난 2002년 입양모가 돌아가신 뒤부터 이영숙씨는 미국의 입양 친척들과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고 지낸다. 이영숙씨의 입양부모에 대한 추억은 별로 좋지 않다. 비록 입양부모가 자신을 학대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열린 분들은 아니었고, 이영숙씨의 교육에 대한 열망이나 지적 욕구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고 자신과의 공통점도 거의 없다고 회고한다. 이영숙씨는 10대 시절 영숙씨가 한국을 포함해 외국에 대해서 궁금해하며 외국어를 공부하고 외국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백인 입양부모가 의아한 표정을 짓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영숙씨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기의 역할모델이 없었던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다. 자신은 백인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백인이 아니라 한국인인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국이 무엇이고 한국인이 무엇인지 너무 몰라 형용할 수 없이 답답했던 순간이 많았다고 한다.

끝없는 외로움 그리고 공허감

이영숙씨 어린사절, 입양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
 이영숙씨 어린사절, 입양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
ⓒ 이영숙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그러던 끝에 이영숙씨는 한국에 오래 머무르면서 자신의 한국인 친부모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런 과정 중에 지난해 8월 대전대학 영어교수직을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 이영숙씨는 친부모를 찾기 전에는 자신의 존재 근원에 대한 끝없는 외로움과 공허감을 채울 길이 없다고 느낀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한국과 미국에 가까운 친구도 많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영숙씨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지만 두 나라에 대해 모두 '나는 이민자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한국과 미국에서 이민자와 소외계층을 위한 인권운동에도 관여했고, 관심도 많다.

이영숙씨는 "모국인 한국에서 아직까지도 해외입양이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취약계층과 미혼모를 위한 사회복지제도가 열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영숙씨는 "한국 정부의 해외입양 정책은 서구인들에게는 아동이라는 '상품'을 제공해 주지만, 한국사회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비인도적 정책"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한국 아이는 한국에서 친부모와 함께 살 때, 비록 그 친부모가 가난하고 결혼을 안 했더라도 '부유한 미국'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영숙씨가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이영숙씨가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 김성수

관련사진보기


또 이영숙씨는 "입양기관들이 대한민국과 한국인들에게 상처를 준다"며 "입양기관들이 가족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가정을 파괴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입양기관들이 겉으로는 자선과 이타주의를 내세우지만, 결국 본질적으로는 가난한 사람과 미혼모 아동을 외국에 판매해 돈을 버는 비인도적 행위를 하고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영숙씨에게 친부모님께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부모님, 제 진짜 이름과 태어난 날, 장소를 알고 싶습니다. 또 지금 친부모님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도 무척 궁금하고요. 무엇보다 지난 30여 년 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부모님이 걸어오신 길에 대해서도 너무 알고 싶습니다…."

이영숙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이영숙씨을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02-3210-2451)으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태그:#이영숙, #김성수, #입양, #인종, #인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