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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옆집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내일 마을 야유회가 있대."

그때만 해도 몰랐다. 그 야유회가 그녀에게 잊지 못할 말복의 추억을 안겨주게 될 줄은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인 여자1호는 스승으로 모시는 분의 부탁을 받아 마을 주민들의 소원을 받아 오는 길이었다. 전국 각지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폐지를 이용해 합천 해인사에 불상을 만드는 프로젝트였고, 제주도의 소원은 우리 마을 주민들의 것이 되었다.

이웃집 할머니의 소원은 말, 돼지,개가 잘되는 것과 몸이 안아프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웃집 할머니의 소원은 말, 돼지,개가 잘되는 것과 몸이 안아프게 해달라는 것이다.
ⓒ 유라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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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딸 잘되는거 바라지 다른 소원이 뭐가 있어?"
 "아들딸 잘되는거 바라지 다른 소원이 뭐가 있어?"
ⓒ 유라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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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자주 놀러오셔서 물외를 주시는 할머니의 소원은 손주가 말을 잘듣는 것이다.
 우리집에 자주 놀러오셔서 물외를 주시는 할머니의 소원은 손주가 말을 잘듣는 것이다.
ⓒ 유라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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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상자에 소원을 적어주신 할아버지는 내일 아침 열 시부터 야유회가 있으니 와서 인사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라고 하셨다. 체육대회라도 하려나 싶었다. 왕년에 발야구 좀 했던 나는 여자들 발야구 게임이라도 있으면 오랜만에 공이나 뻥뻥 차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원샷해!" 마을야유회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르다

다음날 오전 열 시에 맞춰서 나가 보니 집 앞 백 미터 거리인 명리동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어르신들과 남자들은 앉아서 수육과 함께 술 한잔씩 하고 있다.

"저희는 얼마 전에 이사온 사람들이에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뭐 도와드릴 건 없나요?"
   
아이스박스 가득 소주와 맥주가 있었지만 막걸리는 없는 것 같기에 슈퍼에 가서 막걸리 열 병을 사들고 와서 아저씨들 틈바구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집이 있는 저지리 명리동(명이동)은 30가구 정도가 되는데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거의 없단다. 한경면 저지리는 제주도에서 서쪽 편에 있는 마을로 400여 가구 정도가 있고, 바다와는 차로 십오 분 정도 거리가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닥나무가 많아 닥몰, 닥모로라 불리다가 한자로 저지리가 되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제주시에 속하지만 제주시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기에 시내까지는 차로 사십여 분이 걸린다.

시골마을들이 그렇듯 교통이 편리한 편은 아니지만 저지리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바 있고(㈔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연합 지정) 마을에 있는 저지오름은 200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을 받기도 했다.   

마을분들로부터 이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수육을 집어먹고 있는데 눈 앞에 냉면그릇만한 커다란 그릇에 막걸리가 가득 부어져서 왔다. 

"오마이갓 시민기자? 어이 아가씨들 원샷해! 안 하면 안 돼! 빨리 마셔! "

연재 기사를 보신 적이 있는 마을 주민분이 대신 소개를 해주셨지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는 어느새 오마이갓 시민기자가 되어 있었다.

신고식이구나. 이를 어쩌나. 게다가 여자1호 유라는 술을 거의 하지 못한다. 술에 대한 강요는 계속되었지만 '이거 다 마시면 저는 죽어요'라면서 못 들은 척 홀짝홀짝 막걸리 맛만 보고 있었다.  

차라리 이걸 시원하게 원샷하고 머리 위에 털어버린 뒤 취기를 빌려 이 아저씨를 포함해 야유회를 평정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불끈불끈 솟았지만 우선 참기로 하고 있는 터였다. 

양고기라며 건네준 수육의 정체는...

저지리 명리동 마을야유회 모습.
 저지리 명리동 마을야유회 모습.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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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양고기야. 한 점씩 일단 집어! 빨리! 자, 한잔씩들 해~ "

'이게 뭐지? 양고기는 아닌 것 같은데?'

입속에 고기가 들어오자 드는 생각. 아차. 개고기구나. 그러고 보니 다음날이 말복이었다. 장난이 심하다고 말을 할까 하다가 정색을 하게 되면 싸움이 날 것 같았다. 시골마을이 그렇듯 제주도도 개고기를 먹는다. 대평리에 살던 때도 집집마다 개들이 자주 바뀌어서 개들한테 정주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개고기를 먹어보지 않았고, 먹고 싶지도 않은 여자1호 유라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더니 입안의 고기를 처리하고 평소 먹지도 못하는 소주로 입가심을 하고 왔다.

먹지 못하는 술을 아침부터 들이킨 덕에 이미 눈은 풀려있었고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는 노래구절이 떠오르게 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개고기를 안겨준 아저씨는 "이거 동네 똥개야! 으하하하!" 하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크게 웃어댔다.

'뉘집 똥개인지 안 됐구나...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여자1호의 표정을 보자 이대로 두었다간 야유회가 정말 엉망이 되는 상황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오마이갓 시민기자'는 속으로 외쳤다. 오마이갓.

"저희는 잠시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며 그녀를 부축해서 데리고 들어왔다. 화난 기색이 역력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개고기를 속여서 먹이는 것은 못할 짓이다. 그런데 속아서 개고기를 먹게 되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   

나 역시 어릴적 부모님이 사기를 쳐서(?) 처음 개고기 맛을 보았었다. 부모님이 데려갔던 식당에서 도마 위에 올라온 수육을 놓고 돼지고기라며 먹으라는 부모님덕에 한치 의심없이 덥석 개고기 맛을 보게 되었다. 맛나게 잘 먹었다. 집에 와서 엄마의 "그거 사실은 개고기였어… "라는 고백을 듣고나서도 이상하게 역겹다거나 구토가 몰려오거나 하진 않았다.

개고기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빠 덕분에 그 이후로도 종종 개고기를 먹곤 했다. 고3 때 '엄마 나 요즘 몸이 허한 것 같아'하고 말 한마디 했더니 아빠는 신이 나서 커다란 전골 냄비를 들고 경기도 어딘가로 가시더니 냄비 가득 보신탕을 담아 왔다. 아침마다 엄마가 챙겨주는 보신탕에 질려서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보신탕이란 말입니까'를 외친 이후 지금까지 개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있었다. 서울집에서 개를 오래 키우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개고기 사건 때문에 마을 이야기를 더 듣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던 게 아쉽던 차에 야유회 날 마을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셨던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제 한번 시간되실 때 마을 얘기 좀 더해주세요" 하고 헤어졌더니 반갑게도 곧 연락을 주신 것이다. 아저씨와 마을의 오리고기식당에서 만났다. 아저씨를 똑닮은 똘똘해보이는 중3 딸도 함께다.

개고기 얘기를 웃으며 다시 꺼내자 당사자를 대신해서 사과를 하신다. 웃다말고 아저씨의 딸에게 물었다.

"개고기 먹어봤니?"
"네! 아빠한테 속아서 먹어봤어요!"

거참. 딸들은 여전히 아빠한테 속아서 잘도 개고기를 먹는다. 신고식을 그렇게 어설프게 마친 게 아쉬워서라도 조만간 마을분들을 집으로 초대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고기는 준비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태그:#제주도, #저지리, #쉐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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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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