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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인생 45년, 아직도 옷감을 만지면 설렌다는 그녀는 이제서야 이 일을 즐기며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한다
▲ 유인덕 디자이너 디자이너 인생 45년, 아직도 옷감을 만지면 설렌다는 그녀는 이제서야 이 일을 즐기며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한다
ⓒ 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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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중앙로 대로변. 형형색색 화려한 간판 속에 낯익은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군산이 고향이고, 이곳에서 오래 거주했던 분들이라면 이곳, 키티의상실(대표 유인덕·69·이하 키티)을 모를 이는 없을 것이다. 무려 45년 간 그것도 한 자리에서 군산의 패션을 주도한 키티의상실. 그곳은 아직도 건재하게 조명을 밝히고 있다.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의상실로 군산기네스에도 등재됐다. 디자이너를 넘어 장인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유인덕 디자이너를 지난달 12일 만나 그녀의 인생을 조명해 봤다.

그 옛날, 키티에서 옷 한 벌 맞추는 게 여성들의 로망이었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유 디자이너 역시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손님들이 옷 한 벌 맞추는 데 너무 오래 기다리셨어요. 한 벌 한 벌 손수 제작하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죠.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 아이들이었을 거예요. 소풍뿐만 아니라 졸업식, 입학식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죠. 그게 지금 생각하면 진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대체 얼마나 바빴으면 자녀 입학식,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을까. 짐짓 이곳의 인기가 실감이 간다.

열정 가득한 눈빛으로 옷감의 패턴을 뜨고 있다
▲ 패턴을 뜨는 유 디자이너 열정 가득한 눈빛으로 옷감의 패턴을 뜨고 있다
ⓒ 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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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50여 년 전, 그녀 나이 스무 살 무렵, 유 디자이너는 막연하게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광주로 향했다. 당시 패션학원으로 유명했던 뉴스타일학원을 다니기 위해서다.

동네에서 바느질 솜씨 좋기로 유명했던 어머니 밑에서 보고 자란 영향일까.

남들보다 기술습득이 영리했던 그녀는 5년 뒤, 남편의 고향인 군산에서 키티의상실을 열게 됐다. 지금은 대단히 유명하지만, 당시는 '키티'라는 상호도 생소했다. 이름만 봐도 45년 전, 그녀는 얼마나 대범했는지 상상이 된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옷을 만들고 싶다는 뜻이 내포된 키티는 점점 군산 여성들의 로망이 돼 갔다.

"당시 뉴스타일학원에서 같이 배운 동기생들은 대부분 서울로 갔어요. 저도 상경할 기회는 많았지만, 남편의 권유로 군산에 오게 됐죠. 지방이라고 해서 의기소침하진 않았어요. 군산에서 패션을 리더해 가야겠다는 다부진 포부도 세웠죠. 그렇게 계획한대로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키티라는 브랜드 가치가 높아졌고, 지금까지 그 명성이 이어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군산의 패션을 리더 해 가야겠다는 포부가 확고해지면서 그녀는 패션의 본고장 파리를 찾게 됐다. 서른네 살 무렵 처음 찾았을 땐 문화적 충격도 상당했다고 한다. 그 후 1년에 한번 씩은 해외로 출장을 다녀왔다는 그녀는 각종 패션쇼를 참석하며 디자인의 끝없는 변화와 그 상상력에 자극받았다. 그리고 한 발 앞선 패션을 선도해 나가고자 끝없는 도전을 계속해 왔다.

이곳 옷들은 전부 류 디자이너의 작품들이다
▲ 키티의상실 내부 모습 이곳 옷들은 전부 류 디자이너의 작품들이다
ⓒ 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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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2013년 패션쇼 잡지와 각종 인문학 책을 손에 놓지 않는다는 그녀는 변화와 트렌드에 예의주시하며 디자인에 열중하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그녀의 옷은 여전히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기성복이 대거 등장하면서 의상실의 위기를 많이 거론했죠. 사실상 의상실이라는 곳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희미해진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젠 오히려 정형화된 기성복에 질린 고객들이 의상실을 다시 찾고 있어요.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의상을 입고 싶어 하는 고객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에요. 키티의상실의 미래가 밝을 수밖에 없겠죠?(호호)"

패션다자이너 외길 인생 자그마치 45년. 그녀가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선 그녀는 가족을 꼽았다. 남편의 외조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다는 그녀.  가족의 고마움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그리고 꼽은 건, 열정이다. 패션을 대하는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뜨겁다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옛날엔 너무 바빠 즐길 틈이 없었는데, 요즘엔 오히려 즐기면서 일하는 것 같아요. 45년 동안 이 일을 했으면 질리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전혀요. 항상 새롭고 신선해요. 새로운 옷감을 보면 저 옷감으로 어떤 패턴을 뜰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저한테 즐겁고 행복한 일이에요. 간혹 주변사람들이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거냐고 물어보는데 대답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냥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어요. 제 안에 패션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가득해 주체할 수 없거든요."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를 더해 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패션(의상 fashion)에 패션(열정 Passion)을 가진 유 다자이너. 그녀가 절대 늙을 수 없는 이유를 사무엘 울만은 정의했다. '키티'다운 사랑스럽고 귀여운 의상으로, 군산 여성들의 영원한 로망이 돼주길 언제나 응원하겠다.

예전엔 번화가였던 구도심에서 류 디자이너는 여전히 건재하게 의상실 불을 밝히고 있다
▲ 키티의상실 외부 모습 예전엔 번화가였던 구도심에서 류 디자이너는 여전히 건재하게 의상실 불을 밝히고 있다
ⓒ 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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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해타임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유인덕, #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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