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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더 마실까?"

오늘도 가까이 사는 후배와 저녁에 마트에서 만나 같이 장을 보고 헤어질 때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이래야 오 분쯤? 억지로 늘려야 겨우 십 분을 넘지 않을 것이다. 나올 때부터 물이 끓는 온도에는 미치지 못한 채 온기만 겨우 느껴지는 자판기 커피가 후루룩 넘어간다.

위장이 신경질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명치끝을 긁는다. 뜨거운 모래 위를 맨발로 걷는 것 같다. 아니 집채 만한 얼음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다. 온몸이 정상적인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고 확확거린다. 솜털 구멍마다 억만 개의 손가락으로 마음을 헤집는 스산한 바람이 들어온다.

이미 하루 동안 집에서 혼자 대여섯 잔의 커피를 마셨다. 거기에 후배를 만나자마자 또 커피부터 마셨으니 장을 본 시간 삼십 분 남짓 후 연거푸 마시는 커피가 달 리 없다. 그런데도 나는 어제와 똑 같은 말을 한다. 결국 후배를 붙잡고 싶은 것이다. 아니 누군가와 함께 있는 순간을 붙잡는 것이다.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밥딜런의 이 노래를 들은 건 80년 대학에 입학한 직후였다. 거친 모래밭을 발뒤꿈치로 끄는 것 같은 목소리. 음의 고저에 특별한 악센트도 없고 악기의 현란함도 없지만 <one more cup of coffee> 라는 제목에 먼저 마음이 붙들렸다. 그리고 밥딜런이라는 가수, 애원보다는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그래서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하자는 말이 전혀 추레하거나 부담으로 오지 않는 그의 목소리에 내 시간이 젖어들었다.

대학 시절, 남편과 연애할 때는 헤어지기 싫어 집 앞에까지 왔다가 중요한 걸 잊은 사람들처럼 집 부근에 있는 다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결혼하고 고향인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친정에 가면 홀로 계신 엄마와 헤어지는 게 안타까워 연거푸 커피를 타 마시며 엄마를 바라보곤 했다. 엄마의 외로움, 엄마의 걱정, 발길을 붙잡는 사무치는 혈육의 정... 속이 쓰린 것쯤은 헤어지는 시간을 유보할 수 있는 이유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등단을 하고 지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의기투합된 문우들과 이런저런 여행을 한 끝엔 지하철역이건 뻥 뚫린 도로건 커피 자판기를 찾아 발바닥의 물집도 잊었다.

칠 년 전 이십 년 가까이 살던 잠실에서 이름도 생소한 창동으로 이사 온 다음엔 가까운 곳에 사는 후배와 헤어지는 순간이 먹먹해 또 마트 앞에서 서성인다.

헤어지는 순간은 늘 그랬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자라고 살아오는 동안 혼자 있는 것엔 익숙한데다 또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하루 종일 혼자 있으면서도 심심하다고 느껴본 적 기억에 없다. 오히려 가족들과도 24시간을 함께 있어야 하는 날을 불편해한다. 친한 친구와도 오랜 시간은 힘들다. 이렇듯 혼자 있는데 명수인 내가 헤어지는 순간엔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쓰린 속에 커피를 부어 넣는다.

그 순간이 싫은 것이다. 그 순간을 못 견뎌하는 것이다. '홀로'는 편하고 쾌적하지만, '홀로 되는' 어떤 지점은 막막하고 외로운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큰 허기는 늘 그런 지점에서 몰려왔다.

생각 없이 부르고 들었지만 가사를 생각하면 울음과 회한이 봉두난발처럼 일어서는 건 최근 몇 년이다.

but I don't sense affection
no gratitude or love
your loyalty is not to me
but to the stars above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
one more cup of coffee ' fore I go

살아가는 동안 내 것이라 믿었고 내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시간들로부터 '내가 그들의 것이 아닌' 어떤 순간... 거꾸로 세워진 병풍 같은 시간 속에 떨어져본 적 어찌 없겠는가.
그가 혹은 그들이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감지하는 순간 이별은 이미 당도해 있다. 그걸 알면서도 밥딜런은 커피 한 잔만 더 하자는 말을 한다. 그건 이제 곧 혼자가 돼야 할 시간에 대한 준비과정이자 이별을 기정사실화하기 전에 '함께 하는 마지막 일'이다.

커피는 만남의 의미이자 이별의 의미가 공존하는 다의적인 차이다. 그런 만큼 맛과 향도 그걸 마시는 사람들의 사연과 상황만큼이나 다 다르다.

one more cup of coffee!

이제는 내가 나를 붙잡고 싶을 때, 현재의 나와 헤어지는 게 무서울 때, 아니 나를 두고 멀어져가는 모든 것들... 시간과 열정과 설렘과 기대 같은 삶의 증표들을 불변의 기억들로 묶어놓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실 일이다.

기억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누군가와 헤어지기 싫어, 함께 하는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홀로 되는 순간이 두려울 때 마셨던 커피는 절대 달콤하지 않았다.


태그:#밥딜런, #ONE MORE CUP OF COFFEE, #서석화, #음악에세이, #이별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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