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모비스와 서울 SK의 2012-2013 KB국민카드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시리즈는 모비스학파 유재학 선임교수의 '해부학개론'이었다. 서울 SK를 이리 쪼개고 저리 들여다봤다. 현미경으로 단층면을 살펴보며 구성요소를 분석했다. 그는 장점과 약점을 끄집어내 모비스 제자들에게 설파했다. 그렇게 모비스학파는 통산 4번째 연구물을 세상에 발표했다.

슈터 발까지 파악했다는 유 감독의 말은 차라리 말로 표현돼 덜 무서웠다. 말이 담아내지 못한 그것들은 얼마나 SK를 뒤에서 괴롭혔을까 싶다. 어쩌면 내가 본 그것들은 빙산의 일각처럼 최소한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챔프전은 기대가 컸다. 사실 SK가 이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질 줄 몰랐다. 그런데 모비스는 전혀 다른 수로 새 농구를 열었다. 승패를 떠나 농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다시 큰 매력을 느꼈다. 모비스의 우승을 축하하며 챔프전에서 느낀 4가지를 정리해봤다.

1. 양동근이 보여준 MVP의 품격

4차전 4쿼터 중반 사실상 승부는 갈렸다. 양동근은 작정했다는 듯이 연속득점을 퍼부었다. 평소 무리한 공격을 않던 양동근이라 더 단호했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 나온 배우 양동근으로 빙의한 줄 알았다. 그에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뿜었다. 모든 조직력과 팀 전술을 벗어내고 자기 득점만 신경 썼을 때 얼마나 터트릴 수 있는지 보여줬다. 홈에서 마침표를 찍고 말겠다는 의지는 그런 폭발력으로 나타났다.

경기 전 양동근은 오늘 꼭 우승해야 한다고 했단다. 홈 관중들 앞에서 기쁨을 나누고 싶단 의지가 강했다. 그 약속을 지켰다. 중립경기가 폐지돼 더 이상 어색한 우승 세리머니도 없었다. 모비스의 통산 4번째 챔프전 우승과 함께 양동근은 MVP에 올랐다.

2. SK 두 바퀴를 바람 뺀 유재학 감독

농구가 얼마나 감독 역량이 중요한 스포츠인지 입증됐다. 유재학 감독은 한 팀을 집중적으로 분석했을 때 얼마나 대처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최소 30% 정도를 감독이 승부에 미치는 확률로 본다. 하지만 이번 챔프전은 그 이상이었다. 유재학 감독은 벤치에서 SK의 중심축인 김선형과 애런 헤인즈를 멈춰 세웠다.

문경은 감독도 잘했다. 그런데 경험부족이 여실히 보였다. 유재학 감독의 짬밥은 확실히 그냥 짬밥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병장이 아무리 작업 잘해도 낮술 마시고 온 행보관보다는 못한 법이다.

이번 시리즈는 정규리그와 챔프전이 천지차이임을 알렸다. 단기전과 장기전은 분명 다르다. 단기전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상대를 분석해 전략전술을 짜냈을 때 팀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줬다.

3. 기본에서 응용이 나온다

모비스는 팀 균형의 중요성을 새삼 입증했다. 고른 득점분포가 중요함을 나타냈다. 선수 전원이 고루 공격에 가담해야 함을 보였다. 체력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코트밸런스 측면에서도 그랬다. SK 입장에서는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이는 수비를 분산해놓는 효과도 있었다. 농구는 잘하는 한두 명이 경기를 뒤흔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승리까지 연결될 수는 없음을 보여줬다. 적어도 프로에서는 그 한 명에게 당하고 또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SK의 경험부족은 자유투에서 나타났다. 자유투는 농구의 기본이다. SK는 2차전에서 자유투를 많이 놓쳤다. 이것만 기본적으로 넣어줬어도 2차전 승부가 그렇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농구에서 자유투는 수학에서 구구단과 같다. 구구단도 모르는 학생한테 방정식을 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유투 확률이 일정 수준이 안 되면 감독의 어떤 전술과 주문도 코트 내에서 풀릴 수 없다.

수비전술의 기본이 뭔가도 되짚어보게 했다. 수비전술은 맨투맨과 지역방어가 적절히 혼합돼야 함을 깨닫게했다. SK는 3-2 존디펜스를 자랑했지만 맨투맨 수비가 약했다. 맨투맨 수비가 약한 상황에서 지역방어는 반쪽자리가 됐다. "지역방어는 3점슛 두 방이면 무너진다"는 농구 공식이 떠올랐다.

역시 수비의 기본인 맨투맨 수비가 돼야 모든 것이 가능했다. 맨투맨 수비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이게 돼야 트랩수비나 변칙수비 운용이 가능했다. 모비스는 그런 세밀함에서 SK에 앞섰다.

4. 그래서 SK 그래도 SK

김선형은 챔프전에서 다소 아쉬웠다. 슈팅능력을 키워야 하는 숙제가 내려졌다. 그 어떤 스타도 슛 없는 반쪽짜리 선수는 없다. 돌파는 왼쪽 오른쪽 두 가지밖에 길이 없다. 하지만 슛은 3점슛 라인 부근이면 언제고 던질 수 있다. 맘먹고 던지는 슛은 방해할 수는 있어도 완벽히 블록 하기는 어렵다. 반면 돌파는 한쪽은 도움수비에 맡기고 한쪽만 막을 경우 완벽히 틀어막을 수 있다. 슛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SK도 잘 싸웠다. SK가 지난 시즌까지 어떤 팀이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불과 1시즌 만에 달라진 팀을 만났다. 게다가 정규리그 우승팀이다. 단기전에선 끝내 웃지 못했지만 54경기의 장기 레이스에서 우승한 저력을 갖췄다.

SK 선수들이 앞으로 있을 시상식에서 수상 기쁨과 함께 아쉬움도 있을 것이란 게 마음에 걸린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선수들이 한 단계 도약하길 농구팬으로서 바란다. 어쨌든 한 해 동안 KBL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것에 팬으로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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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http://basketessay.co.kr
프로농구 KBL 모비스 SK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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