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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수 교육부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라북도 군산에 있는 군산영광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정은균입니다.  교육 노동 경력 14년차인 저는,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 다섯이고, 아내와 함께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이지메의 구조> 겉그림
 <이지메의 구조> 겉그림
ⓒ 한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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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교육의 수장으로서 격무에 바쁘실 줄로 압니다. 언젠가부터(원래부터?) 우리나라 학교 현장은 언제 어디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한 '화약고' 같은 곳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니 장관님께서는 더욱 밤낮을 잊은 채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고 계시겠지요. 그래도 이 글 한 편 읽을 여유는 있으시지요. 부디 바라건대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야지(야간자율학습 지도)'를 한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에 걸쳐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바로 이 책, <이지메의 구조>입니다. 일본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로 있는 나이토 아사오가 쓴 책이지요. 그는 일본 최고의 이지메 연구자라고 합니다. 전공은 사회학입니다. 그래서 집단 괴롭힘의 메커니즘을 교육학적인 시각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조망한 책을 몇 권 냈지요. <이지메의 사회이론>과 <이지메학의 시대> 등이 그것입니다. 저자 소개를 보니, 이 책들 모두 일본에서 큰 공감을 받았더군요. 기회가 된다면 이 책들도 꼭 구해서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책을 읽는 내내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비탄의 한숨이 흘러 나왔습니다. 대체 아이들은 왜 그렇게 같은 반 친구를 극악하고 잔인하게 괴롭힐까요. 집단 괴롭힘의 표적이 된 아이들은 왜 그리도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고, 학교와 교사들은 일이 터지면 또 왜 그다지도 비겁한 모습을 보일까요. 책에 소개된 사례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울분이 일었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인간이라는 '생물 종'에 대한 혐오가 일기도 했습니다. 시쳇말로 '멘붕'이었습니다.

'전인교육'을 하고 있는 우린, 왜 아우성을 칠까요

장관님, 도대체 우리에게 학교는 어떤 곳일까요. 장관님께서는 지금 우리나라 학교 수가 몇 개나 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작년 통계를 찾아 보니, 초중고 학생 수는 약 672만 명 정도이더군요. 학교는, 대학을 제외하면 1만1360개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숫자로 존재하는 학교와 학생들을 장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학교에 관한 부동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숭고한 교육의 공간이다, 학교는 공동체다, 학교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다, 학교 교육은 학교 교육의 논리대로 풀어야 한다" 따위가 바로 그것들이지요. 다른 어떤 조직보다 훨씬 더 강하게 '학교다움'과 '학생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그 '신화'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군인들이 '군대다움'과 '군인다움'을 유난스럽게 강조하는 것과 그 맥락이 같습니다. 학교를 병영에 빗대는 이유도 바로 이런 데 있겠지요.

오늘날 학교가 내세우는 표면적인 교육 목표를 보면 정말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라는 말을 보시지요. 아마도 1만여 개가 넘는 우리나라 학교들 중에서, 자신들의 학교교육 계획서에 이 단어를 쓰지 않는 학교는 한 군데도 없으리라 봅니다. '전인 교육'은 또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공동체'라는 단어 못지 않게 여기저기에서 쓰이고 있을 겁니다.

이 말들은, 우리가 보거나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아니,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 단어라고 하는 게 맞을까요. 이들 뒤에는 어떤 휘황하고 신성한 아우라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왜들 이리 아우성을 치고 있을까요.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느니, 공교육이 붕괴되었다느니 하는 말들은 이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아니 '진실'로 굳어졌습니다. 그러고는 말합니다. 학교의 공동체성을 살려서 무너진 학교 교육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과연 진실로 그래야 할까요.

학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분이나 행동이 깊은 부분에까지 서로 영향을 미치는 집단생활에 의한 전인교육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그것을 개개인에게 강제한다. 온종일 서로 부대껴야 하는 공동생활을 강요하고 심리적 거리를 강제로 축소하는 환경에서, 어린 학생들은 다양한 '관계'를 의지와는 상관없이 맺어나간다. 이것이 자동차 교습소와는 다른 '학교다움'이다.

학교 운영의 근간은, 학생들을 날마나 훈련시켜서 골수에까지 스며든 습관으로써 이 '학교다움'을 실현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중략) 학교는 성스러운 공동체라는 인식하에 학생이 전인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도록, 각자의 다양한 기분이나 행동이 서로의 운명에 크게 영향을 미치도록 제도·정책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지금까지 어떤 인연도 없었던 또래의 아이들을 한데 묶어(학교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실에 모아놓고(학급) 생활 전반을 감시하는 것이다(실질적으로 강제수용제도와 마찬가지인 의무교육제도). - (162, 163쪽. 갈색 부분은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사이토 교수는 이 학교공동체주의 이데올로기가 학교를 가혹한 '정치 공간'으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불안한 집단생활의 장이 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는 그런 아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심지어 '감정 노예'에 비유하기까지 합니다. 아이가 그러한 감정 노예의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집단 괴롭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실제로는 없는 가짜 친밀함을 '마음'에서 짜내어 집단에 내어 주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를 "정신적인 매춘"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에 빗대고 있습니다.

집단괴롭힘이 사라지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장관님,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아이들이 하루 대부분을 살아가는 학교는, 그럴듯한 '공동체'라는 말로 치장된 가혹한 '정치 공간'입니다. 그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기꺼이 집단 괴롭힘의 가담자가 되거나 비정한 구경꾼이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급이 한 명의 '보스'와 서너 명의 '(보스) 추종자', 그리고 대다수의 '평민'과 한두 명의 '노예'로 이루어져 있는 철저한 계급 시스템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계급 시스템의 바깥으로 가야 할까요. 가령 담임 교사나 학교, 경찰과 같은 대상들에게로 말입니다. 아이가 그들에게 가는 순간 그는, 계급 시스템 내부의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됩니다. 죽음과도 같은 '비존재(非存在)'가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렇게 시스템 바깥으로 간 아이들은 더욱 혹독하고 잔인한 괴롭힘에 노출된 채 결국 비존재의 상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죽음으로써 말이지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용기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시스템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찾아가지요. 하지만 지금의 학교 시스템에서 아래서 용기를 낸 그 아이가 도움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경향은 교사나 학교가 억압적이고 통제적일수록 더욱 뚜렷해집니다. 왜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학교가 유난스럽게 학교의 명예를 중시하고, 그들에게 문제가 생겨도 쉬쉬 하면서 덮으려고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도 학교는 그 나름의 '독립적인' 시스템에 따라 유지되어야 하는 공간이나 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학교 교육의 독립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가령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되도록 학교 안에서 최대한 그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경찰을 부르고 법에 호소하는 것이 항상 능사인 것만은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이런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됐습니다. 사이토 교수는 집단 괴롭힘이 사라지지 않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시민사회의 질서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집단 괴롭힘의 심리학적·사회학적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석한 후, 그것이 냉철한 '이해타산'에 기초해서 발생하고 유지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심각한 집단 괴롭힘을, 이해 관계를 조절하여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시민사회의 논리를 학교에 적용하지 않는 것이 심각한 사건을 빈발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폭력을 쓰면 경찰을 부르는 것이 당연한 장소라면 '일정한 선을 넘기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한 마디로 (이해타산의 가치가 변하여) 폭력형 이지메를 확실히 멈출 수 있다"(137쪽)고 강조합니다. 어떤가요.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학폭('학교폭력'의 준말) 사건이 일어나면 덮기에만 급급한 학교의 모습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견해가 아닐런지요.

그렇다고 해서 경찰차가 수시로 학교를 드나들고, 아이들과 교사들이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이나 경찰을 자연스럽게 들락거려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는 장관님께서 이런 저자의 주장을 접하면서 '역시 학폭은 엄벌주의로 다스려야 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저자의 진정한 의도를 잘못 파악하는 오독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제 짤막하게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학급이란 굴레가 없어지면, 따돌림도 없어진다"

나이토 교수의 이런 주장은 집단 괴롭힘과 같은 학교폭력을 모두 엄벌주의로 다스리자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아주 심각한 사안이 발생했을 경우에 문제를 학교 자체의 논리로 풀지 말자는 것입니다. 경찰의 개입이나 시민사회와의 교류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문을 열자는 주장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한 마디로 학교는 신성 불가침의 공간이라는 인식을 깨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이토 교수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학교의 '법화(法化)'를 주장합니다. 폭력을 계속 행사하면 확실하게 손해가 간다는 인식을 폭력 주체들에게 심어주자는 것이지요.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학급 제도의 폐지를 주장합니다. 일일이 기록할 수도 없고, 법적으로 처벌하기도 힘든 욕설이나 무시, 비웃음 등을 통해 이뤄지는 박해가 주로 학급 단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학급이라는 굴레가 없어지고 만남에 관한 폭넓은 선택지와 충분한 접촉 가능성이 주어진 생활권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다면, 따돌림이라는 행위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게"(199쪽) 되기 때문입니다. 학급이 없는 대학 강의실에서 왜 집단 괴롭힘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설마 그들이 성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장관님, 글을 마칠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장관님께서는 우리 사회나 학교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투명'해지기를 바라십니까. 이 질문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이토 교수가 제안하는 학교 정책의 방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취임 초기이니 장관님께서도 우리 학교 정책에 대한 고민이 많으시겠지요. 그런 고민을 하시는 데 이 질문이 상당한 영감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생각은 자유이지만, 이 책의 201쪽에서 216쪽까지에 저자의 '답'이 나와 있으니 꼭 읽으시면서 확인하고 견줘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서일까요. 봄바람이 아주 찹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이 나라 교육의 앞날을 고민하는 데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에 더 자주, 더 많이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04월 11일, 무리뫼 군산에서 국어 교사 정은균 드림

덧붙이는 글 | <이지메의 구조> (나이토 아사오 지음 | 한얼미디어 | 2012.03 | 13,000원)

- '야지'는 '야간자율학습 지도'의 준말입니다. 원래는 '야간자율학습 감독'의 준말인 '야감'으로 쓰지요. 그런데 '자율학습'에 웬 '감독'이란 말입니까. 며칠 전에 후배 교사의 이런 반문을 듣고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겠다 싶어서 저도 '야지'라는 쓰기로 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쯤이나 '야자'가 없어질런지요. 올해 마흔 다섯인 제가 교직을 떠나기 전에는 '야자'가 없어질까요. 얼마 전 '야지'가 있던 날, 다른 후배 교사 두 명과 학교 급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더랬습니다. 대화 끝에 씁쓸함만 남더군요.



이지메의 구조 - 왜 인간은 괴물이 되는가

나이토 아사오 지음, 고지연 옮김, 한얼미디어(2013)


태그:#나이토 아사오, #<이지메의 구조>, #집단 괴롭힘, #학교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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