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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 남면 발산리
▲ 여자 의병대장 윤희순 시댁 강원도 춘천시 남면 발산리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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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천리 임 뵈러 가는 하늘 푸르고
노오란 오월 애기똥풀 반기는 무덤

잔잔한 홍천강 물살 가르는 모터보트 저 친구들
여기 이 언덕
구국의 일념으로 온몸 바친
여장부 영면을 방해치마라

바람 앞에 흔들리는 조국
안사람들이여 일어나라
며느리들이여 총을 메라
가서 아들을 돕고 남편의 뒤를 따르라
(중략)

유씨 문중 일심동체로 독립에 혁혁한 공
돌비석 하나로는 다 기리지 못해
무순의 독립 청년단원 이끌다 잡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죽은 아들 부여잡고
노을진 봉천성 해성현서 의병장 윤희순 숨 거두던 날
잿빛 하늘에서 퍼붓던 비 애달픈 투사의 눈물이었네.

                   <서간도에 들꽃 피다(1), 윤희순 의병장편, 이윤옥 시>

발산리 윤희순 의병대장이 살던 집 뒤에 있다.
▲ 윤희순 의적비 발산리 윤희순 의병대장이 살던 집 뒤에 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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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尹熙順, 1860~1935. 8. 1) 의병장이 시집와 살았던 발산리 시댁은 후손이 말끔하게 집을 가꾸고 살고 있었다. 대문에서 윤 의병장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것 같은 말끔한 시골집 주변을 행여나 흘러가는 흰구름이 애틋한 말이라도 전해줄 듯하여 오래도록 서성였다. 나라를 왜적에게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아녀자의 길을 걸었을 윤 애국지사.16살 때 당시로는 두메산골인 강원도 춘천 남면 발산리로 시집왔다.

시아버지 유홍석과 친정아버지 윤익상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이로 두 집안은 사돈지간으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들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을 축출하고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1895년 시아버지 의병장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다. 시아버지의 거병을 지켜보면서 윤 의병장은 의병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노래를 만들게 되는데 8편의 의병가가 그것이다. 그는 의병가를 손수 지어 여성과 청년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4편의 경고문을 지어 의병과 싸우던 관군과 의병을 밀고했던 밀고자들과 일본군을 꾸짖었다.

"나라없이 살수없네 나라살려 살아보세
임금없이 살수없네 임금살려 살아보세
조상없이 살수없네 조상살려 살아보세
살수없다 한탄말고 전진하여 왜놈 잡아
임금앞에 꿇어앉혀 우리임금 분을 푸세"

윤희순 의병장이 직접 쓴 친필 <안사람 의병가> 가사
▲ 안사람 의병가 윤희순 의병장이 직접 쓴 친필 <안사람 의병가>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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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의병장은 1907∼1908년 의병운동 때에는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 여우천 골짜기에서 여자의병 30여 명을 조직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아서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가히 남성들도 넘보지 못할 기개였다. 그 뒤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이 중국으로 먼저 망명길에 오르자 윤 의병장은 51살 되던 해 아들 돈상, 민상, 교상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이때부터 1935년 숨을 거두기까지 25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요동지구에서 종횡무진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가가 모두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항일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나라를 되찾으려면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그는 이회영, 우병렬, 우병렬의 부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으로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세웠다.

이곳에 노학당을 설립한 것은 조선인이 비교적 많이 모여 살았고 항일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학교운영자금은 선생과 학생들이 환인지역의 조선인, 중국인들에게서 모금한 것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을 비롯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양성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 유홍석, 남편 유제원과 아들 유돈상에 이르는 독립군 집안의 윤희순 의병장은 여성의 몸으로 초기에는 의병활동을 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는 독립운동을 돕다가 1935년에 봉천성 해성현 묘관둔에서 75살을 일기로 숨을 거뒀다.

윤 의병장이 죽은 때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숨진 큰아들 유돈상이 숨진 지 11일 만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슬픔은 더욱 컸다. 그의 유해는 1994년 고국으로 봉환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 양지바른 곳에 남편과 함께 합장하였다. 여성 의병장으로 당당한 삶을 산 윤 의병장의 고귀한 삶을 기리고자 춘천시립도서관 앞에는 동상이 서 있고 시집와서 35년 동안 살던 발산리에는 해주윤씨의적비, 묘소에는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윤희순 의병장 무덤 오르는 길의 안내 비석과 오르는 길
▲ 무덤 가는 길 윤희순 의병장 무덤 오르는 길의 안내 비석과 오르는 길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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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리 시댁을 나와 관천리 선영으로 이르는 길에는 노란애기똥풀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들이 속삭이듯 무덤을 찾는 나를 반기듯 재잘거렸다. 멀리 홍천강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윤 의병장의 무덤이 있었는데 홍천강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터보트를 타는 젊은이들의 물살 가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오래도록 무덤가에 앉아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가를 짓고 아녀자들을 모아 의병활동을 진두지휘했던 윤 의병장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았다. 오늘 의병의 날(6월 1일)을 맞아 더욱 그리워지는 분이다.

덧붙이는 글 | 대자보에도 보냄.

남성들에 견주어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사회적 조명에서 비켜나 있다. 유관순 열사밖에 모르는 현실에서 윤희순 같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찾아 방방곡곡 다니며 시를 쓰고 그분들의 일생을 정리한 민족시인 이윤옥의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서간도에 들꽃 피다> 1.2권이 출간되어 있다. 이 책에는 윤희순 의병장 같은 여성독립운동가 40명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현재 3권 집필 중이다.



태그:#윤희순, #의병대장,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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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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