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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방송된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한 장면
 2003년 방송된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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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도 복선이 있다. 엄마를 잃고 나서 알았다. 인생에 복선이 있음을 깨달은 순간과 동시에 '팔자'와 '운명'이라는 것에 함부로 덤벼선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달의 움직임이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예측 불가능한 공간에서 누군가 인간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봉착한 것이다. 딱히 정형화된 종교나 신적 존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누군가, 있다'.

"엄마가, 암이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서, 암이, 시작된 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던데, 무척, 위험한, 상황이라고, 그러더라"고 아빠가 말했다. 울음 참는 애들처럼 한 단어, 한 음절씩 띄엄띄엄 겨우 말을 마쳤다. 나는 "별 일 아니겠다"고 말했다. 정말 별 일 아닌 거라 생각했다. 이십 몇 년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 절박한 순간에 아빠는 나의 사사로운 한 마디를 명줄처럼 붙잡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꿈을 꿨다. 시퍼런 새벽에 저승사자 세 마리가 텅 빈 수레를 끌고 갔다. 새벽녘 꿈에서 깨고 이것은 꿈이 아닐 것이라고 상기하곤 했다. TV를 너무 많이 봤으려니…하며.

꿈에 나타난 저승사자...결국 엄마는 떠나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전 연락 한 번 없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그 애 어머니도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문상 오지 않겠냐는 연락이었다. 왠지 느낌이 께름칙해서 "안 가겠다"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입관식에 다녀왔는데, 사실 그것 역시 가고 싶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등바등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엄마는 나와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그제야 '저승사자'가 나온 그것이 '꿈'이었음을 인정했다. 그것이 인생의 복선이라 느낀 최초의 순간이었다.

병실에서 엄마를 간병하는 내내 나는 그 좁고 불편한 간이침대에서 숙면을 취하곤 했고 단 한 번도 꿈을 꾸거나 가위에 눌리지 않았다. 며칠씩 돌아가며 간병했던 나와 여동생은 가끔 그 병원생활이 귀찮고 지긋지긋해 질 때 즈음이면 서로에게 "오늘은 니가 가라", "싫다 니가 가라"며 미루곤 했다.

TV에 나오는 것처럼 환자의 똥오줌을 받아내는 일은 없었지만 그 비슷한 일로, 엄마의 식사량과 배설양을 체크해야 했다. 물을 얼마나 마시고, 밥을 얼마나 먹고, 또 그만큼 쌌는지. '먹고 싸는' 것에 사람의 생사를 묻는 절체절명의 한 달이었다.

변기에 앉아있는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하곤 했는데 반 쯤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도 엄마는 "이런 일을 시켜 미안하다", "어디서든 남들하고 같이 쓰는 화장실에 가면 뒷정리를 꼼꼼하게 하고 나와야 한다"는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5인 병실의 공동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친 엄마는 물기가 남은 바닥을 휴지로 꼼꼼하게 훔쳐내고 떨어진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없는지 손바닥으로 더듬거리며 말끔하게 치우고 나오곤 했다.

그런 것들이 꿈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안 나타난다. 엄마에게 감사하고, 함께 해서 행복한 순간이 꿈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안 나타난다. 혼수상태에 있다가 숨을 멈추기 전, 정신 바짝 차린 눈으로 마른입을 들썩거리며 울던 엄마 얼굴이 꿈에 나올 줄 알았는데 안 나타난다.

군대 간 남동생 미니홈피 다이어리를 보면, 고통스러워하던 엄마를 꿈에서 간간이 보는 모양인데, 나는 뭐 그런 것도 없다. 가끔 보고 싶은데, 엄마가 꿈에 잘 안 나온다. 엄마는 꿈에 안 나오고, 꿈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제 니 어메 없다"고만 한다.

"내게 엄마는 없다, 나는 엄마가 없다"

KBS 드라마 <브레인>의 한 장면
 KBS 드라마 <브레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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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온 날, 꿈에서 엄마랑 전화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밥 많이 먹고, 술 그만 마시라고 했다. 전화통화 더 하면 안 되냐고 물으니 이제 들어가 봐야 해서 바쁘다고 끊자고 했다. 엄마 꿈은 늘 이런 식이다.
친가식구들이 잔뜩 모여 옛날 살던 아파트에서 밥을 먹는데 엄마만 없다. 엄마가 어디 갔냐 물으니 다들 아무 대답 안하고 밥만 먹는다. "엄마는 왜 이런 날 집에 없는 거야"라고 나도 밥 한술 뜨려는데, 그때 '이제 내게 엄마가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잠에서 깨고 말았다.

또 어떤 날에는, 하늘빛이 쨍쨍하던 어느 날 대청마루 아래서 할머니하고 같이 고추를 다듬는데, 내가 "엄마는 어디 갔어?"라고 물으니 할머니는 "젊은년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싸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며 엄마 욕을 했다. '엄마 곧 오겠지'하고 있는데, 그때도 꿈에서 번뜩 내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과 잠의 어슴푸레한 경계에서 나는 구구단 외우는 초등학생처럼 "내게 엄마는 없다, 나는 엄마가 없다"를 몇 번씩 되뇌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아빠는 가끔 고모들에게 "아름엄마 꿈을 꾸고 싶다"고 했다. 고모들은 손사래를 치며 "죽은 사람 꿈에 보이는 거 좋은 거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빠는 엄마 꿈을 꾼 날에는 집에 돌아와 엄마를 직접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새벽녘 달무리처럼 엄마가 옅어지려고 할 때 아빠 꿈에 엄마가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 나를 잊지 마"라고 말 하는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엄마는 꿈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가끔 아주 행복한 순간에 엄마 생각을 못해서 죄스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누군가의 말마따나 내가 엄마 없는 외로움을 못 견뎌서 이렇게 사는 게 뭐가 나쁘냐고 대차게 따지고 싶을 때도 많다. 내가 평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한다고 해도 다시 와 줄 것도 아니면서...

이제 엄마가 꿈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할머니는 지난 1984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꿈을 3년에 한 번 꼴로 꾸곤 하니까. 작은 고모는 1994년에 백혈병으로 죽은 사촌오빠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고 하니까. 나나, 아빠 역시 마음에 묻은 엄마를 더 깊숙이 묻고 살아갈 테다.

원래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 양, 살아가겠지만 이제 내게 삶은, 인생은, 운명은, 팔자는, 확실해졌다. 내가 감히 부탁할 수 없는 영역, 물질이나 노동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것. 이끄는 대로 따르리. 한 가지 부탁을 해 본다면, 다만 내가 건강히 단명할 수 있도록, 그것만은 도와주시길...


태그:#엄마,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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