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과 성격>의 저자이자 SBS PD인 오기현은 SBS 본사의 아나운서 35명의 혈액형을 조사했다. 35명 중 A형 10명(29%), B형 8명(23%), O형 9명(26%), AB형 8(23%)명이었다.

<혈액형과 성격>의 저자이자 SBS PD인 오기현은 SBS 본사의 아나운서 35명의 혈액형을 조사했다. 35명 중 A형 10명(29%), B형 8명(23%), O형 9명(26%), AB형 8(23%)명이었다. ⓒ SBS


"요즘 아나운서는 예능 프로그램 진행을 많이 하는데, 좋은 진행자는 성격이 적극적이고 쾌활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B형이 아나운서하기에 가장 좋은 혈액형 같습니다."

"아나운서는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출연자를 배려하는 넓은 마음, 당연히 O형이 아나운서에 적합하지 않을까요?"

"방송은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세심한 완벽주의자인 A형이 바로 아나운서의 혈액형입니다."

"매끄러운 진행을 하려면 냉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시간을 잘 조절하려면 진행자로서는 AB형이 제일 낫죠."

대답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과연 아나운서에 적합한 혈액형은 무엇일까?

필자는 여전히 혈액형과 성격 혹은 혈액형과 직업의 상관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난 달 SBS PD들에 대한 조사에서는 AB형의 비율이 우리나라 평균(11.5%)보다 상당히 높게 나왔지만(21.3%), 표본집단의 크기가 작아 '혈액형과 PD라는 직업의 상관관계'를 인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단지 SBS PD들의 AB형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내용을 공개하자 아나운서의 혈액형을 조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언어감각, 순발력, 끼 등 아나운서야 말로 직업적 특성이 가장 명확히 나타나는 직종. 아나운서에 특정 혈액형이 많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것이야 말로 혈액형과 성격 혹은 혈액형과 직업의 상관관계를 인정하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는 논리였다. 여전히 표본집단의 규모가 작긴 하지만, 필자도 아나운서라는 매력적인 직업의 비밀(?)을 밝혀보자는 욕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예상외의 결과에 놀라다!

SBS 본사에서 활동 중인 아나운서는 모두 35명. 사내메일을 띄워 협조를 부탁했다. 그들은 방송에 출연하는 유명인들이므로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개인의 혈액형은 밝히지 않는다는 약속도 했다. 다행히 SBS 아나운서팀 전원으로부터 회신을 받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었다. 35명 중 A형 10명(29%), B형 8명(23%), O형 9명(26%), AB형 8(23%)명이었다. 우리나라 평균(A형 34.2%, B형 27%, O형 27.3%, AB형 11.5%)에 비해 A형, B형, O형은 약간 적었지만 AB형은 무려 두 배나 높은 수치였다. SBS PD에 대한 조사에서도 AB형이 21%로 높게 나왔다.

이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방송을 잘 진행하려면 '냉정한 합리주의자'인 AB형이 적합하다는 간단한 결론을 내려야할까? 아니면 여전히 표본집단의 규모가 작아서 별 의미 없어 보인다면서 덮어버려야 하나?

혈액형과 성격에 생물학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필자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뇌이지만, ABO식 혈액형을 결정하는 것은 적혈구에 붙어있는 당사슬(sugar chain)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나타난 결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 PD뿐 아니라 같은 방송직종인 아나운서에서도 AB형이 일반인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를 보인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후천적인 암시가 성격을 바꾼다

 KBS 2TV <개그콘서트>의 코너 '슈퍼스타 KBS'에서 혈액형을 이용한 개그를 선보이고 있는 '혈액형 브라더스'

KBS 2TV <개그콘서트>의 코너 '슈퍼스타 KBS'에서 혈액형을 이용한 개그를 선보이고 있는 '혈액형 브라더스' ⓒ KBS


생물학적인 근거가 없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답은 심리학적 방면에서 찾을 수 있다. 선천적인 요인보다는 후천적인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혈액형 성격론이 유행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1901년 혈액형이 처음 발견되자 유럽의 인종주의자들이 혈액형에 따른 인종적 우열을 연구했지만 과학적인 근거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백인들은 A형과 O형 두 가지 혈액형이 전체의 약 90%를 차지하였으므로 분류 자체가 별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남자의 특성과 여자의 특성'이라는 두 가지 분류에 대해 사람들이 흥미 없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시에 유럽에 유학을 갔던 일본의 의사가 혈액형 성격론을 배워 와 일본에 소개했다. 피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있는 동양문화권에서 혈액형 연구는 자연스럽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네 가지 혈액형이 어느 정도 균질하게 분포한 것도 혈액형 성격론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요인이다. (참고로 영국인은 A형 43%, B형 8%, O형 46%, AB형 3%이지만 일본인은 A형 38%, B형 22%, O형 30%, AB형 10%이다)

1930년대 일본의 심리학자인 후루카와 다케지가 친척과 지인 309명을 조사해서 혈액형에 따른 성격을 분류했다. 지금 보면 상당히 허술한 연구였지만 그의 주장은 급속히 일본사회에 퍼져나갔다. 혈액형을 연구하는 단체가 생기고, 혈액형에 따른 군부대가 만들어졌다. 이력서에 혈액형을 기재하는 관행도 그 때 생겼다. 하지만 학자들이 혈액형별 성격분류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후루카와 다케지의 주장은 몇 년 만에 급속히 힘을 잃었다.

30년 뒤 무덤 속에 있던 혈액형 성격론을 다시 세상에 끄집어 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의사도 심리학자도 아닌 방송작가 '노미 마사히코'였다. 독자들의 심리를 읽을 줄 아는 그는 유려한 필치로 '혈액형으로 알아본 궁합'이라는 책을 썼다. 책은 대박이었다. 그는 일반인 3만 명, 전문가 집단 1만 명의 혈액형을 조사해 통계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분류방법과 내용은 30년 전 후루카와 다케지와 큰 차이가 없다.

노미 마사히코의 주장은 일본과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생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주장은 큰 힘을 받지 못한다. 마치 점이나 궁합이 과학적 근거가 없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에서 혈액형은 실제로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일종의 '학습효과' 혹은 '암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A형은 소심하다'고 믿게 되면 스스로 소심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대중 앞에 설 때 기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소심하다고 믿는 A형은, '나는 A형이니까 원래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며 점점 더 소심한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자기암시). 그리고 A형이 소심하다고 믿는 사람은, A형이 소심하게 행동하는 걸 보면 '제는 A형이니까 원래 그런 거야'라며 당연하게 받아들인다(타인암시).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데?

그렇다면 아나운서에 AB형이 많은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통계수치가 의미 있다고 전제할 경우, 여기에는 일종의 자기암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A형 유전자와 B형 유전자 다 있으므로 천재와 바보 같은 양극단의 성향이 공존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바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자신을 천재라고 믿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자기암시가 수백 대 혹은 수천 대 1의 어려운 '아나운서'시험을 통과하게 만든 저력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아나운서에 AB형 비율이 높다면 후천적인 심리적 요인 때문이지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 때문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참고로 일본사람들은 AB형을 천재 아니면 바보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이중 인격자라며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방송국에서 만난 동료PD는 혈액형이 이렇게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경우, 이것을 발전시켜나갈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칭찬이 어린이들의 학습효과를 높이듯, 혈액형 성격론도 숨겨진 능력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혈액형 성격론은 판단력이 미약한 어린이들에게는 일종의 운명론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그 무엇이 나의 장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가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SBS 아나운서들의 혈액형 중 AB형 비율이 일반인의 2배라는 사실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볼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대한민국 전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SBS 아나운서의 혈액형에는 AB형이 많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혈액형과 직업의 상관관계 연구에 대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누가 알랴? 대한민국에서 아나운서가 되려면 AB형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지.

덧붙이는 글 필자 오기현은 SBS의 PD이자 <혈액형과 성격>의 저자이다.
혈액형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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