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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가무(飮酒歌舞)의 민족, 그 후예

우리 민족(요즘 같은 때에 이런 거 강조하는 게 좀 안 좋은 것이긴 하지만)은 예로부터 '음주가무'를 즐겨왔다고 하지요. 이게 다 풍류이고, 또한 한풀이이자 신명풀이인 겁니다. 저도 이런 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인지라 어릴 때부터 노래하는 걸 많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전설적인 유로팝 그룹 '아바(ABBA)'의 노래 <땡큐 포 더 뮤직(Thank you for the music)> 가사처럼 말도 떼기 전에 노래부터 배웠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오래 전부터 이런 '끼'를 주체하지 못했던 처라 이런저런 기회가 생기면 '폭풍'처럼 얼굴을 비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아 조그만 것이긴 하지만 상도 받았고요.물론 그 결과는 말할 수 없지만 수백 대 1에 달하는 경쟁률을 뚫고 '일요일의 남자' 송해 선생님의 무대에서 노래하기도 했었고, 서울 강남 모처, 동대문이나 명동 같은 곳에서 열리는 노래대회에서도 작지만 상을 차지하곤 했던 저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끈질기게도 제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일 가라오케대회'.

'한일가라오케대회'는?
2002년, FIFA 월드컵이 한일 공동개최로 열리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민간교류를 노래를 통해 증진하자는 목적으로 열리는 노래자랑 같은 대회입니다. 한국 주재 일본인단체인 '서울재팬클럽(Seoul Japan Club, 이하 SJC)'가 주관하고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이 후원하고 있으며 올해로 9회째. 내년이면 10회 째를 맞이합니다. 이 행사의 주된 특징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은 일본어 노래를,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은 한국어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노래의 솜씨를 겨루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깊은 교류의 장을 마련해 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열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3수' 만에 오른 무대

지극히 사적인 얘기입니다만, 전 이 대회에 꼭 나가고 싶어서 전에도 무려 두 번이나 예선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줄줄이 낙방. 문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좌절하기를 몇 년, 매년 8월이면 어김없이 내걸리는 '한일 가라오케대회' 참가자모집 안내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 딱 한 번만 더, 망가져주는 거야!' 하는 생각으로 참가원서를 냈습니다.

절대 4수만은 안 된다는 반쯤은 비장한 각오로 들어선 예선. 열심히 질러주고 열심히 흔들어준 결과, 관중들의 손뼉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에는 '아, 이제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무대를 내려오면 느껴지는 후회. 하지만 내가 부르고, 흔들 수 있는 만큼은 했다는 생각은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몇 주 뒤. 주최 측인 SJC로부터 예선을 통과해 본선진출 20팀에 뽑혔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무려 3수 만에 본선진출이라는 결과를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기어이 '결전의 날' 은 밝아오고...

그리고 드디어 맞이한 본선 날. 10월 23일 일요일. 조금 서늘한 아침 공기에 감싸인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 봄'. 이미 본선을 위한 준비는 다 되어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을 받아들자 제 출연순서인 2부의 네 번째 출전자로 제 증명사진이 찍혀 있었습니다. '아…. 내가 진정 이 무대에 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찾아오는 긴장감. 식구들에게는 전혀 얘기도 안 해놓아서 연습다운 연습도 하지 못한 채 서는 무대라 리허설 자리에서도 춤은 뻣뻣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리허설 중인 다른 출전자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신감은 더 기어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서부터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들까지. 모두 자신만의 최고의 노랫소리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실력을 내세운 참가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저처럼 그냥 '잘 놀려고' 나온 사람들은 틀림없이 위축되기 마련이니까요(틀림없이 최근의 <나는 가수다> 같은 프로그램을 너무 본 탓일 겁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가 참가하는 대회이고, 방청객들도 마찬가지이기에 대회장을 알리는 배너 역시 '2개국어' 입니다.
▲ 대회 개최를 알리는 대회장 입구의 배너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가 참가하는 대회이고, 방청객들도 마찬가지이기에 대회장을 알리는 배너 역시 '2개국어' 입니다.
ⓒ Seoul-Japan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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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이 끝나고 1시 30분이 넘어가자, 슬슬 관객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이 동 자치센터 일본어교실이라든가 일본어학원, 일본어를 많이 쓰거나 일본인들이 있는 기업체 등에서 동료들이나 선생님의 권유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응원단들도 많은 겁니다. 저도 간단히 점심 요기를 하고 객석에 앉아 있으니, 어느새 행사가 시작됐습니다.

역시나 리허설 때만큼의 출중한 실력을 보여주는 출전자들. 특히 가창력을 내세운 여성 참가자들에게서는 소위 말하는 '소름 돋는' 가창력마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더 인상 깊었던 건 노래가 무얼 말하는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 가락과 박자에 맞춰 큰 호응을 보내주는 많은 관객들이었습니다. 노래는 국경도 언어도 초월하는 세계 공통어라는 말이 바로 이래서 생긴 건가 봅니다.

1부의 첫 무대를 열어 준 참가팀은 일본인들로 구성된 4인조. 무대 준비 때부터 의자까지 갖다놓고 하는 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출전곡이 아이유의 <좋은 날>이라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아기자기한 연기와 노래가 가사와 절묘하게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내주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날을 위해 연습도 많이 했는지 매끄러운 우리말로 노래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아...해버렸다!

1부 순서가 끝나고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뒤, 2부의 첫머리를 열어 준 첫 출전자는 서울 이촌동에 위치한 '스타터즈어린이집'의 아이들. 한복과 일본 전통의상을 나누어 입고 등장한 이 아이들은 아마도 그날 대회의 최고 스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인상 깊은 노래를 들려주었으니까요. 재한 일본인 자녀들인 이 아이들은 창작동요제 대상곡이었던 <예쁜 아기곰>을 한목소리로 예쁘게 불러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2부의 첫머리를 깜찍하게 장식해 준 이촌동 스타터즈 어린이집 아이들. 유카타와 한복을 나눠 차려입은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 얘들아, 너희들은 최고였어! 2부의 첫머리를 깜찍하게 장식해 준 이촌동 스타터즈 어린이집 아이들. 유카타와 한복을 나눠 차려입은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 박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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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는 흘러 제 차례.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가사마저 부분 부분 잊어버리려 했던 터라 모니터가 없었으면 정확히 노래 부르지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선 때보다 더 큰 박수 소리는 제 이런 불안감을 싹 씻어내주었고, 여느 때처럼 마음껏 노래 부르고, 또 춤출 수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왔습니다. 언제나처럼 참 큰 무대에 약한 접니다. 최고의 마이너스 요인은 흰색 운동화.
▲ '까짓거, 불러제끼는 거야!' 제 차례가 왔습니다. 언제나처럼 참 큰 무대에 약한 접니다. 최고의 마이너스 요인은 흰색 운동화.
ⓒ Seoul-Japan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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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출연진 20팀의 모든 경연이 끝나고, 출연자 대기석에 모인 참가자들. 아마 이 자리에서 전 지금까지 말해본 일본어보다 더 많이 일본어로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 노래를 칭찬해주셨고, 가장 재미있는 무대라는 찬사를 주셨습니다.

그중에는 회사 동료로 만나 함께 출전 길에 오르셨다는 화음이 아름다운 두 여성분, 70이 넘은 나이에도 여기저기 봉사활동을 다니시면서 이제는 일본어로 새로운 자신의 가능성을 찾으셨다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 일본어를 더 많이 배워 엔지니어링 계통에서 일하고 싶다는 희망을 애기해 준 '훈남' 대학생까지. 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홀로 와서 아무것도 남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일부러 찍은 동영상까지 나누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소중했던 것. 그건 아마도 오랜 감정의 앙금을 씻어버리고 노래라는 하나의 접점을 통해 서로의 공통점을 알아가고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서로 교감할 수 있었던 자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한국과 일본, 여기엔 없습니다

사실 한국과 일본이란 두 나라. 아직까지 이런저런 문제들로 서로의 마음 속 앙금이 온전히 씻겨내려간 상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그러시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 흔히 말하는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고, 또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함께해나가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서로 힘을 합쳐나가야 할 두 나라라는 입장에서, 묵은 감정에 구애되지 않고 노래라는 공통의 접점을 갖고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자리. 그곳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10월 23일 한일 가라오케대회. 이 곳에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없습니다. 함께 노래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말은 통하지 않아도 신명나는 리듬과 멜로디로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전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뒷이야기 한 토막

결과가 궁금하시죠. 열심히 흔들고 열심히 질러준 결과, '퍼포먼스상'을 받게 됐습니다. 무려 3수 만에 얻어낸 값진 결과였기에 더더욱 자랑스럽습니다만 저 때문에 입상의 영광을 놓치신 많은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제게 이 자리를 허락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 노래를 동영상으로 보고 싶으시면 클릭해주세요. 유튜브 동영상으로 이동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에 실린 사진 중 일부는 주최측인 SJC의 협조를 얻어 마련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태그:#10월23일, #대방동, #가라오케대회, #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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